민애왕(閔哀王)
※ 생존기간 : (?~839)
※ 재위기간 : (838~839)
※ 본문설명
신라 44대 왕으로서 성명은 김명(金明)이고 원성왕의 증손이다.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로서 민애왕(敏哀王)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로 혜충태자(惠忠太子)로 봉해졌다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仁謙)이다. 835년(흥덕왕 10) 대아찬(;5등급)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 836년 제륭(悌隆;희강왕)과 균정(均貞)이 왕위를 다툴 때, 6촌 재종인 제륭을 도와 왕(희강왕)이 되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38년 시중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과 함께 희강왕(재위 836-838년)을 협박, 자살하게 하고 838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아버지 충공(忠恭)을 선강대왕(宣康大王),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朴氏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라 추시(追諡)하고, 처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라고 하였다.
균정의 아들인 6촌 재종인 우징(祐徵; 신무왕)이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서 진장(鎭將) 장보고(張保皐)에 의탁해 있었는데, 민애왕이 즉위하자 장보고의 힘을 빌려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즉 12월이 되자 김양은 청해진(淸海鎭)에서 평동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치현(鐵冶縣)에 다다랐다. 이때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싸우게 하였으나, 김양의 기병 3천 명에 의해 섬멸되었다.
839년 윤 정월에 김양(金陽)의 군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여 19일에는 달벌(達伐 또는 달구벌, 대구)에 이르렀다. 왕은 김양의 군사가 닥침을 듣고 이찬(;2등급) 대흔, 대아찬(;5등급) 의훈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게 하였으나, 군사의 반이 넘게 죽고 싸움에 패하였다. 이 때 왕은 월유택(月遊宅) 서쪽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곁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달아나므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살해 당하였다.
신하들이 왕을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그 뒤를 이어 6촌인 우징이 신무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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