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41. 헌덕왕(憲德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3:14

 

 

 

 헌덕왕(憲德王) 

 
※ 생존기간 : (?~826)


※ 재위기간 : (809~826)


※ 본문설명

신라 41대 왕으로서 성명은 김언승(金彦昇)이고 소성왕(昭聖王;재위 798-780년)의 동생이다.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 숙정부인(淑貞夫人)김씨이며 비(妃)는 각간(角干)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이다.

790년(원성왕 6) 당나라에 다녀와 대아찬(大阿飡;5등급)이 되고, 이듬 해 역신(逆臣) 제공(悌恭)을 죽인 공으로 잡찬(;3등급)에 승진하였다. 794년 시중(侍中)을 거쳐, 이듬해 이찬(;2등급)으로서 재상에 올랐다.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을 제수받았다. 800년에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년)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으며,

801년(애장왕 2) 어룡성(御龍省)의 장관인 사신(私臣)이 되었고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09년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뒤 8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창남(金昌南) 등을 당나라에 보내 왕의 죽음을 알렸다. 헌종이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최정(崔廷)을 보내면서 신라의 볼모 김사신(金士信)을 부사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제사하고,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林州諸軍事) 겸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아내 정씨(貞氏)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숭빈(金崇斌) 등 세 사람에게 문극(門戟)을 내려 주었다

810년 정월에 파진찬 양종(亮宗)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河西州)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자를 보내 나라안 제방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7월에 유성이 자미(紫微)에 들어갔고, 서원경에서 흰 꿩을 바쳤다. 10월에 왕자 헌장(憲章)을 당나라에 보내어 금 ·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을 바치고, 당나라 순제(順帝)의 명복을 비는 등 친당(親唐)정책에 힘썼다.

811년 정월에 시중 양종(亮宗)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2등급) 원흥(元興)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이찬 웅원(雄元)을 완산주 도독으로 삼았다. 4월에 처음으로 평의전(平議殿)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처리하였다.

812년 균정(均貞)을 시중으로 삼고, 이찬(;2등급) 충영(忠永)의 나이가 70세였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9월에 급찬 숭정(崇正)을 북쪽 나라[北國;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813년 정월에 이찬(;2등급) 헌창(憲昌)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현덕문(玄德門)에 불이 났다.

814년 3월에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흥이 한껏 올라 왕이 거문고를 타니, 이찬(;2등급) 충영(忠榮)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5월에 나라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으므로 사자를 보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조세[租調]를 면제해 주었다. 8월에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이 [중앙에]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 10월에 대사 검모(黔牟)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815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헌종이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5월에 눈이 내렸다. 8월 초하루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으므로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翼星;남쪽 여섯 번째 별자리)과 진성(軫星;남쪽의 일곱 번째 별자리) 사이에 나타나 서쪽으로 향하여 갔는데, 뻗쳐진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넓이가 두 치[寸] 가량 되었다.

816년 정월에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 도독으로 삼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절동(浙東)지방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한산주 당은현(唐恩縣)에서 길이 열 자, 넓이 여덟 자, 높이 세 자 다섯 치되는 돌이 저절로 100여 보를 옮겨갔다. 6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려 싸우는 듯하였다.

817년 정월에 이찬(;2등급) 김충공(金忠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5월에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더니 7월에 비가 내렸다. 10월에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었으므로 주와 군에 명을 내려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도록 하였다. 왕자 김장렴(金張廉)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18년 6월 초하루 계축에 일식이 있었다.

819년 정월에 이찬(;2등급) 진원(眞元)의 나이가 70세였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이찬(;2등급) 헌정(憲貞)이 병으로 걸어다닐 수 없었으므로, 나이는 70세가 되지 않았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목(紫檀木)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2월에 상대등 김숭빈(金崇斌)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수종(金秀宗)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3월에 초적(草賊)들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므로 여러 주와 군의 도독과 태수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7월에 당나라 운주절도사(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헌종이 장차 이를 토벌하고자 조칙으로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갑병(甲兵)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820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목종(穆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불러 접견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며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821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생활하였다. 4월에 시중 김충공(金忠恭)이 죽었으므로 이찬(;2등급) 영공(永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청주 도독(菁州都督) 헌창을 웅천주 도독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7월에 패강(浿江)과 남천(南川)의 두 돌이 서로 싸웠다. 12월 29일에 천둥이 크게 쳤다.

822년 정월에 왕의 친동생 수종(秀宗;흥덕왕)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가게 하였다.<수종을 혹은 수승(秀升)이라고도 하였다.> 2월에 눈이 다섯 자 내렸고 나무들이 말랐다.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武珍州), 완산주(完山州), 청주(菁州), 사벌주(沙伐州)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 서원경(西原京), 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이 몸을 빠져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王京]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마침내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서울을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7등급)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3등급) 위공(衛恭)과 파진찬(;4등급) 제릉(悌凌)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찬(;2등급) 균정(均貞)과 잡찬(;3등급)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5등급)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의 무리들과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均貞)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열흘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宗族)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들 무릇 239명을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祿眞)에게 대아찬(;4등급)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청주(菁州) 태수가 집무하는 관청 남쪽 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다섯 자이고 검은 색이었으며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의 머리만하고 부리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었다. 또 눈은 사람 눈 같았고 모이 주머니는 다섯 되들이 그릇만하였는데 사흘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貞嬌)를 맞아 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패강의 산골짜기에 쓰러진 나무에서 움이 돋아 하룻밤 동안에 높이가 열세 자, 둘레가 네 자 일곱 치나 되었다. 4월 13일에 달빛이 핏빛 같았다. 7월 12일에 해에 검은 햇무리가 생겨 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12월에 주필(柱弼)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23년 정월 5일에 서원경에서 벌레가 하늘로부터 떨어졌고, 9일에 흰 색, 검은 색, 붉은 색 세 종류의 벌레가 눈을 무릅쓰고서 기어다니다가 햇볕을 보자 그쳤다. 원순(元順)과 평원(平原) 두 각간이 나이가 70세였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아뢰자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2월에 수성군(水城郡)과 당은현(唐恩縣)을 합하였다. 4월 12일에 유성이 천시(天市)에서 일어나 제좌(帝座)를 범하고 천시(天市) 동북쪽과 직녀(織女)·왕량(王良)을 지나 각도(閣道)에 이르러 셋으로 갈라져 북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없어졌다. 7월에 눈이 내렸다.

825년 정월에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 도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반란을 꾀하여,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 도독 총명(聰明)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붙잡아 죽였다.<평양은 지금[고려]의 양주(楊州)이다. [고려] 태조가 지은 장의사(義寺) 재문(齋文)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3월에 무진주 마미지현(馬彌知縣)의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이고 몸도 둘이었으며 팔이 넷이었다. 아이를 낳을 때 하늘에서 큰 천둥이 쳤다. 5월에 왕자 김흔(金昕)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앞서 와 있는 대학생 최리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등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고, 새로 간 김윤부(金允夫), 김립지(金立之), 박량지(朴亮之) 등 12명이 머물러 숙위하게 해주십시오. 아울러 국자감에 소속시켜 학업을 닦게 해 주시고 홍려시(鴻寺)에서 경비와 양식을 지급해 주십시오.”

[황제가] 그대로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牛頭州) 대양관군(大楊管郡) 나마(;11등급) 황지(黃知)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둘 딸 둘을 낳았으므로 조(租) 100섬을 주었다.

826년 7월에 우잠군(牛岑郡)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의 여러 주와 군 사람들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長城) 300리를 쌓았다. 10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헌덕왕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헌덕왕의 동생인 수종이 흥덕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답사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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