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興德王)
※ 생존기간 : ( ?~836)
※ 재위기간 : (826~836)
※ 본문설명
신라 42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경휘(景徽)이다.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昇)이며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의 손자이며 헌덕왕(재위 809-826년)의 동생으로 , 비는 소성왕(昭聖王;재위 798-780년)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인데[삼촌 조카의 근친혼] 즉위한 해 12월에 죽었는데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왕이 [왕비] 생각을 잊지 못해 슬픔에 싸여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글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였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차마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환관뿐이었다. 819년(헌덕왕 11) 이찬(;2등급)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822년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헌덕왕이 태자가 없이 죽자 친동생인 그가 826년 즉위하였다.
826년 즉위하자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 당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827년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헌덕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회를 폐하고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제사하고, 왕위를 이은 임금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 계림주제군사(大都督 林州諸軍事) 겸 지절충영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으며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에 고구려 승려 구덕(丘德)이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을 모아 나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5월에 서리가 내렸다. 8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永恭)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828년 정월 대아찬(大阿飡;4등급) 우징(祐徵; 신무왕)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눈이 세 자나 내렸다. 4월 중국 당나라의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한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한산주 표천현(瓢川縣)의 요망한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홀렸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옳지 않은 도[左道]로써 여러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를 벌하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라 하고는 그 사람을 먼 섬으로 쫓아 버렸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麟德殿)에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매우 성행하였다.
829년에는 원곡양전(源谷羊典)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執事部)를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그리고 829년 2월 당은군(唐恩郡)에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고 사찬(;8등급) 극정(極正)을 보내 가서 지키게 하였다.
830년 4월에 왕이 병환이 났으므로 기도를 드리고 아울러 15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31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시중 우징(祐徵; 신무왕)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2등급) 윤분(允芬)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왕자 김능유(金能儒)를 승려 아홉 명과 함께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였다. 7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 등 일행이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32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초목이 말라 죽은 빈 땅[赤地]이 되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지 않고 평상시에 먹던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7월에 비가 내렸다. 8월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에 왕이 사자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833년 봄에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4월에 왕이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다. 11월에 시중 윤분(允芬)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834년 정월에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9월에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 거둥하여 군대를 크게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 나아가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면서 늙은이와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아이,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服色),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하여 골품(骨品)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졌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835년 2월에 아찬 균정(均貞)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祐徵; 신무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글을 올려 관직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므로 대아찬(;5등급)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또 김유신(金庾信)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이다.
836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숙위하게 하였다.
6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동쪽에 나타났다. 7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침범하였다.
12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조정에서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合葬)하였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어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의 손자인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왕릉 전과후 12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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