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왕(哀莊王)
※ 생존기간 : (788~809)
※ 재위기간 : (800~809)
※ 본문설명
신라 40대 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휘(諱;임금의 이름)는 청명(淸明)·중희(重熙)이다.
소성왕(재위 798-780년)과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의 맏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 헌덕왕)이 섭정하였다. 처음에 원성왕이 죽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사봉랑중(司封郞中)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위단(韋丹)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서 조문하고, 또 왕 준옹(俊邕;소성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케 하였으나, 위단이 운주(州)에 이르렀다가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되돌아갔다. 7월에 왕의 이름을 중희(重熙)로 바꾸었다. 8월에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학생 양열(梁悅)에게 두힐현(豆縣) 소수(小守) 벼슬을 주었다. 일찍이 덕종이 봉천(奉天)으로 갔을 때 양열이 난리통에 따라 가서 공로가 있었으므로 황제가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벼슬을 주어 돌려 보냈다. 그래서 왕이 그를 발탁하여 등용한 것이다.
801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두 사당을 따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明德大王), 증조부 원성대왕, 할아버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으로 5묘(五廟)를 삼았다. 삼촌인 병부령 김언승(金彦昇; 헌덕왕)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있어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5월 초하루 임술에 응당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9월에 형혹(熒惑)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武珍州)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치고 우두주(牛頭州)에서 흰 꿩을 바쳤다. 10월에 몹시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耽羅國)에서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802년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4월에 아찬 김주벽(金宙碧)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에 가야산(加耶山)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12월에 균정(均貞)에게 대아찬(;5등급)의 관등을 주어서 거짓 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이를 사양하였다.
803년 4월에 왕이 남쪽 교외에 나가서 보리 농사를 둘러보았다. 7월에 일본국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예방하고 우호를 맺었다.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04년 정월에 삼촌인 이찬(;2등급) 수승(秀昇;흥덕왕)을 시중으로 삼았다.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7월에 알천(閼川) 가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임해전을 거듭 수리하고 동궁(東宮)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지었다.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생각된다. 우두주(牛頭州) 난산현(蘭山縣)에서 엎어진 돌이 일어섰다. 웅천주 소대현(蘇大縣) 부포(釜浦)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9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려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805년 정월에 어머니 김씨를 대왕후(大王后)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삼았다. 이 해에 당나라 덕종이 죽었다. 순종(順宗)이 병부랑중(兵部郞中) 겸 어사중승(御史大夫) 원계방(元季方)을 보내 죽음을 알리고, 또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使持節) 대도독 계림주제군사(大都督 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林州刺史) 겸 지절충영해군사 (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그 어머니 숙씨(叔氏)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다.<왕 어머니의 아버지인 숙명(叔明)은 나물왕의 13대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성은 김씨인데, 그 아버지의 이름자를 따서 숙(叔)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8월에 공식(公式) 20여 조(條)를 반포하였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06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 당나라 헌종(憲宗)이 숙위하던 왕자 김헌충(金獻忠)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면서, 그에게 시비서감(試秘書監)의 관작을 더하여 주었다. 8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07년 정월에 이찬(;2등급) 김헌창(金憲昌)<또는 정(貞)으로도 썼다.>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에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앉아 음악 연주를 관람하였다. 8월에 큰 눈이 내렸다.
808년 2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왕이 두터운 예로 그들을 접대하였다. 김력기(金力奇)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김]력기가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정원(貞元) 16년(800)에 조칙으로 저희 나라의 죽은 임금 김준옹을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신(申)씨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으며, 아내 숙(叔)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봉 사신 위단(韋丹)이 도중에 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습니다. 그 책봉문서가 중서성(中書省)에 있다 하오니,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저에게 주셔서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황제가 명을 내려 말하였다.
“김준옹(金俊邕) 등의 책봉문서를 홍려시에 명하여 중서성에서 받아오게 하고, [그것이] 홍려시에 이르면 김력기에게 주어서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라!”
이어 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헌덕왕)과 그 아우 중공(仲恭) 등에게 문극(門戟)을 주되 본국의 예에 따라 주도록 하였다.<신(申)씨는 김신술(金神述)의 딸인데, 신(神) 자와 음운이 같다 하여 신(申)을 성씨로 삼았으니 잘못이다.> 12방면으로 사자를 보내 여러 군과 읍의 경계를 나누어 획정하였다. 7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809년 정월에 달이 필성(畢星)을 침범하였다. 6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의 소금 창고가 울었는데, 그 소리가 소 우는 것과 같았다. 벽사(碧寺)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었다. 7월에 대아찬 김륙진(金陸珍)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크게 가물었다. 왕의 숙부 언승(金彦昇; 헌덕왕) 및 그 아우 이찬 제옹(悌邕)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난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體明)이 왕을 지키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왕의 시호를 추증하여 애장(哀莊)이라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숙부 언승이 헌덕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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