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元聖王)
※ 생존기간 : ( ?~798)
※ 재위기간 : (785~798)
※ 본문설명
신라 38대 왕으로서 성명은 김경신(金敬信)이며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이고,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혹은 知烏夫人) 박씨(朴氏)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 淑貞夫人).
780년(혜공왕 16) 이찬(伊飡;2등급) 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 그 공로로 선덕왕 즉위 한 780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선덕왕(재위780-785년)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이 점을 짐작할 수 있다.
785년 2월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문무백관들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고, 이찬(;2등급) 병부령 충렴(忠廉)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이찬(;2등급) 제공(悌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제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삼았다. 3월에 전왕의 왕비 구족왕후(具足王后)를 바깥 궁으로 내보내고 조(租) 3만 4천 섬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고쳤다. 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였다.
786년 4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덕종(德宗)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신라 왕 김경신(金敬信)에게 조칙을 내린다. 김원전이 가지고 온 표문과 바친 물건들을 살펴보니 모두 잘 갖추어 있었다. 경(卿)의 나라 풍속은 믿음과 의리가 두텁고 뜻을 지킴이 곧고 순수하여 일찍부터 중국을 받들어 천자의 교화에 순종하였고, 번방을 편하게 하여 모두 유교의 유풍을 받아서 예법이 시행되고 나라 안이 평온하여졌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천자의 대궐로 향하고 천자에 조회하는 일을 빠뜨리지 아니하였으며, 자주 사신을 보내 윗대로부터 내려온 덕을 이어 조공과 진상을 잘 하였다. 비록 바다가 멀고 넓으며 길이 멀어도 예물을 가지고 왕래하는 데는 옛 법을 좇아 충성스러움이 더욱 돋보이니, 진실로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다. 내가 온 세상을 다스리고 인민의 부모가 된지라, 안으로부터 밖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맞게 하고 문화를 같이하여 태평화락을 이루고 다 함께 안락장수의 길에 오를까 한다. 경은 마땅히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부지런히 백성들을 돌보아 길이 번방의 신하[藩臣]가 되어, 바다 모퉁이에 있는 나라를 평온케 하라. 지금 경에게 나금(羅錦), 능채(綾彩) 등 30필과 옷 한 벌, 은대접 한 개를 주노니 이르거든 받으시오. 왕비에게는 금채(錦彩), 능라(綾羅)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 및 은쟁반 한 개, 대재상(大宰相) 한 사람에게는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 차재상(次宰相)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주발 한 개를 주노니, 경이 받아서 나누어 주시오. 한여름이라 날씨가 몹시 더운데 경은 늘 평안하기를 바란다. 재상 이하 모두에게 아울러 안부를 전하는 바이다. 보내는 글에 나의 뜻을 모두 다 펴지 못하겠노라.』
7월에 가물었다. 9월에 서울[王都]의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벼 33,240섬을 내어서 진휼하였다. 10월에 또 벼 33,000섬을 내어 나누어 주었다.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현령(屈押縣令)의 관직을 주었다. 그리고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 身空詞腦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787년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5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에 일식이 있었다.
788년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예기(禮記) 또는 문선(文選)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에 밝은 사람을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중품(中品)으로 하였으며,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두루 능통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 넘어 이를 등용하였다. 전에는 단지 활쏘는 것으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고쳤다. 가을에 나라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발생하였으며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국학(國學)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789년 정월 초하루 갑진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내어 진휼하였다.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小守)로 삼으니 집사 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였다.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말하였다. “비록 문적으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으니 써도 좋지 않겠는가?” 왕은 이 말을 좇았다.
790년 정월에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였는데, 전주 등 일곱 주(州)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에 일길찬 백어(伯魚)를 북쪽 나라[北國;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크게 가물었다. 4월에 금성[太白]과 진성(辰星)이 동정(東井)에 모였다. 5월에 곡식을 내어 한산주와 웅천주 두 주(州)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791년 정월에 왕태자가 죽어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이찬(;2등급) 제공(悌恭)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웅천주의 대사(大舍) 향성(向省)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10월에 서울에 눈이 세 자 내렸고,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 시중 종기(宗基)가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대아찬(;5등급) 준옹(俊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내성 시랑(內省侍郞) 김언(金言)을 삼중아찬으로 삼았다.
792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 여자는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에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上大等) 충렴이 죽었으므로 이찬(;2등급) 세강(世强)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이찬(;2등급)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11월 초하루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793년 8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졌다. 나마(;11등급) 김뇌(金惱)가 흰 꿩을 바쳤다.
794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태자 의영(義英)이 죽어 시호를 헌평(憲平)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잡찬(;3등급)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처음으로 세웠다. 한산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궁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795년 정월에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俊邕;소성왕)을 태자로 봉하였다. 4월에 가물었으므로 몸소 죄수들의 정상을 살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796년 봄에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왕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4월에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이찬(;2등급)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에 나라 동쪽 지방에 누리[메뚜기]가 곡식을 해쳤고,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삼았다.
798년 3월에 궁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마주 부딪쳤다. 여름 6월에 가물었고 굴자군(屈自郡)의 대사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12월 29일에 왕이 죽어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였다. 유언에 따라 널을 들어 봉덕사 남쪽 토함악(吐含岳)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그 뒤를 이어 손자인 준옹이 소성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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