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23. 법흥왕(法興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30

 

 23. 법흥왕(法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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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法興王)

※ 생존기간 : (?~540)
※ 재위기간 : ( 514~540)



※ 본문설명

신라 23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책부원귀(冊府元龜;서기 1005년 송나라 정종 때의 왕흠약과 양억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유서)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하였다.>

지증왕(재위;500-514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다.

비(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이다.

514년 아버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시법(諡法)을 제정하였다.

516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용이 양산(楊山) 우물 안에 나타났다.

517년 4월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18년 2월에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520년 율령(律令)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521년 양(梁)나라와 국교를 열었다.

522년 3월 가야국(伽倻國)이 청혼하자, 이찬(;2등급)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출가시켰다.

523년 감사지(監舍知) 19인을 임명하였다.

524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525년 2월 대아찬(;5등급)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에 군주(軍主)로 삼았다.

528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이것은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불교 수용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17대 눌지왕(訥祗王;417-458년)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왕은 묵호자(墨胡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더니, 왕의 딸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궁궐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소지마립간)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였는데 신봉자가 가끔 있었다.

이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난처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자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뭇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

<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529년 살생을 금지시켰다.

531년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4월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國事)를 총리하게 하였다.

531년에 이찬(伊飡;2등급) 철부(哲夫)가 최초로 대등에 임명되었다.

532년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4년 상대등 철부(哲夫)가 죽었다.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하였다.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이라 하였으며,

538년 정월에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540년 7월 왕이 죽었으며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능은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있다.

그 뒤를 이어 지증왕(智證王)의 손자이고,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

진흥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엠파스 블로그/山寺愛人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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