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24.진흥왕(眞興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00:00

 

 24.진흥왕(眞興王)

 



진흥왕(眞興王)

※ 생존기간 : (534~576)
※ 재위기간 : (540~576)


※ 본문설명

신라 24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며 휘(;임금의 이름)는 삼맥종(纂麥宗)이다.

일명 심맥부(深麥夫)로서 법호는 법운(法雲)이며 지증왕(智證王;재위500-514년)의 손자이고,

법흥왕(;재위514-540년)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法興王)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이며, 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이다.

540년 법홍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태후, 즉 법흥왕비가 섭정하였다.

8월에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10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541년 3월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에 임명, 백제에 대해 화친정책을 썼다.

544년 2월에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3월 사람들이 출가하여 중이 되고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545년 7월에 이찬(;2등급) 이사부의 건의로 대아찬(;5등급)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문사(글하는 선비)들을 모아 《국사 國史》을 펴내게 하였다.

548년 2월에 고구려가 예나라 군사들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 충주)을 공격하였다.

위급해진 백제가 구원병을 청하자 왕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냈다.

그는 날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달려가서, 이들을 치고 백제를 구해 주었다.
549년 봄 양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 앞 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가 싸움에 지친 틈을 타서 이찬(;2등급)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두 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위 두 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성을 보수하여

1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551년(진흥왕 12) 개국(開國)이라고 개원(改元)하였고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그해 3월에는 왕은 국내를 순시하다가 낭성(지금의 충주)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에 빼어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가까이 불러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러 있게 하고,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우륵과 이문은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은 우륵에게 명하여 12현금을 만들고 곡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므로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왔는데,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 하였다.

같은 해에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왕이 거칠부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빼앗았다.

552년 왕이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전 낭성(娘城)에서 들었던 음과 다름이 없다.” 하고는 상을 후하게 주었다.

553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계획을]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6등급)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10월에 왕이 백제 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554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쌓았다.

이 때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 등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관산성의 군주인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2등급) 탐지(耽知)등적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인 김무력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 싸움을 도왔지만 매우 어려웠다.

이 때 비장(裨將) 인 삼년산군(三年山郡 지금의 보은)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갑자기 적을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마침내 적을 격파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좌평 4명과 사졸 2만9천6백 명을 죽이니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없었다.

555년 정월에 비사벌(比斯伐;지금의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10월에 왕은 북한산에 행차하여 국토를 측정하였다.

11월에 왕은 북한산에서 왕궁으로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州郡)의 일년간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고

그 지역의 죄수들을 풀어 주었는데, 두 가지 이상 죄를 지은 자 외에는 모두 놓아주었다.


556년 7월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8등급)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557년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8등급)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558년 2월에 귀족들의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들을 작은 서울인 국원(國原)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마(;11등급) 신득(身得)이 포노(砲弩;활의 일종)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562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異斯夫)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사다함(斯多含)이 큰 공을 세웠다.

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65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8월에 아찬(阿飡;6등급)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나아가 국원(國原)을 지키게 하였다.

9월에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년 기원(祇園) ·실제(實際)의 두 절을 지었으며, 왕자 동륜 (銅輪)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에 황룡사(皇龍寺)도 준공했다.

567년 3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68년 대창(大昌)으로 개원(開元)하였다.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 비열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570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1년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2년 정월 연호를 홍제(鴻濟)로 고쳤다.

3월 왕태자 동륜이 죽었으며,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바깥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만에 마쳤다.

574년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分]이었다.

그리고 같은 절의 구층탑, 진평왕(眞平王)의 옥대(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의 하나로 꼽힌다.

575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황룡사 장륙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에까지 이르렀다.

576년 봄에 비로소 화랑제도를 창시했는데, 이것이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장차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진평왕 36년(614년)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이 진지왕이 되었다.

한편, 진흥왕은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는데,

창녕(昌寧)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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