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3.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11

 

 13.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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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생존기간 : (?~284)

  □재위기간 : (261~284)



◐ 본문설명

신라 13대 왕으로서 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미조(未照) ·미소(未召)이다. 구도(仇道)의 아들로서, 김알지(金閼智)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이칠(伊柒)의 딸 박씨(朴氏)이며, 비(妃)는 11대 조분왕(助賁王;재위230-247년)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그의 선조 김알지는 4대 탈해왕(脫解王;재위57-80년)이 데려왔는데, 알지는 세한(勢漢, 熱漢)→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으니, 구도는 바로 미추의 아버지였다. 구도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11대 조분왕(助賁王;재위230-247년)의 사위로서 12대 첨해왕(;재위247-261년)이 후사 없이 죽자 261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262년 3월에 용이 궁궐의 동쪽 연못에 나타났다. 7월에 금성 서문(西門)에 화재가 나서 불길이 번져 민가 300여 채를 태웠다.

263년 정월에 이찬(;2등급) 양부(良夫)를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월에 몸소 국조묘(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仇道)를 갈문왕으로 봉하였다.

264년 2월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3월에 황산(黃山)에 거둥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진휼하였다.

266년 8월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해 왔다.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 200명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공격하니 적들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것을 듣고서 직선(直宣)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고 사졸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268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272년 2월에 왕명으로 농사에 불필요한 것을 죄다 없애게 하였다.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11월에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276년 2월에 신하들이 궁궐을 고쳐 짓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기 어려워 따르지 않았다.

278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槐谷城)을 에워쌌으므로 파진찬(;4등급) 정원(正源)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280년 4월에 가물었다.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281년 정월에 홍권(弘權)을 이찬(;2등급)으로 삼고 양질(良質)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으며, 광겸(光謙)을 사찬(;8등급)으로 삼았다. 2월에 조묘(祖廟)에 배알하였다. 9월에 양산(楊山)의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283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에 괴곡성(槐谷城)을 에워쌌으므로 일길찬(;7등급) 양질(良質)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284년 2월에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두루 돌며 위무하였다. 10월에 왕이 죽어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하였다.>에 장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11대 조분왕(助賁王;재위230-247년)의 큰 아들이 유례이사금이 되었다.

※ 보충설명

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미소(未召)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 → 세한(勢漢, 熱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구도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괴곡성(塊谷城) 등을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 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보충참고 :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韓國家族의 史 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始祖系譜の構成(木下禮仁,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 1966)
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 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1973)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