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4.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12

 

 14.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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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 생존기간 : (?~298)

   □ 재위기간 : (284~298)




◐ 본문설명

신라 14대 왕으로서 성은 석(昔)이며 11대 조분왕(助賁王;재위230-247년)의 큰 아들이고 어머니는 갈문왕 내음(奈音)의 딸 박씨(朴氏)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기(古記)에는 제 3대와 제 14대 두 왕의 이름을 같이하여 유리(儒理)를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어머니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와 임신했고, 태어나던 날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고 한다.

유례이사금 재위 기간 동안 박씨 집단과의 제휴로 권력을 유지하는 한편 김씨 집단이 지닌 무력에 많이 의존하여 균형을 유지했다.

284년 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285년 정월에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2월에 이찬 (;2등급) 홍권(弘權)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아 정치의 중요한 일을 맡겼다.

286년 정월 백제와 수교하였고, 3월 가뭄이 들었다.

287년 4월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해 와서 포로 1천을 잡아갔다.

289년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290년 5월에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291년 정월에 말구(末仇)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말구는 충성스럽고 곧으며 지략이 있었으므로, 왕이 항상 정치의 중요한 일들을 그에게 물었다. 말구는 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의 형제로 알려졌다.

292년 6월에 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7등급)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게 하였다. 7월에 가물었고 누리[蝗(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상주)의 호민 80여 가를 옮겼다.

294년 여름에 왜의 군사가 장봉성(長峯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7월에 다사군(多沙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295년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弘權)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297년 정월에 지량(智良)을 이찬(;2등급)으로 삼고 장흔(長昕)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으며, 순선(順宣)을 사찬(;8등급)으로 삼았다.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하였다.

298년 2월에 서울에 안개가 짙게 끼어 사람을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 걷혔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기림이사금이 계승하였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