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0.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03

 

 10.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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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 생존기간 : (?~230)

   □ 재위기간 : (196~230)



◐ 본문설명

신라 10대 왕으로서 원래의 칭호는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다. 9대 벌휴왕(伐休王;재위184-196년)의 손자이며 이가(伊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으로 왕비는 11대 조분왕(助賁王)의 누이동생인 석씨(昔氏)로서 사촌간에 근친결혼을 하였다. 자녀로는 태자 우로(于老)와 병마사(兵馬事)를 관장하였던 이벌찬(;1등급) 이음(利音)이 있었다. 그 밖에 11대 조분왕(助賁王)의 비가 된 딸 아이혜(阿爾兮)가 있다.

그의 성은 석씨로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骨正)과 둘째아들 이매(伊買)가 일찍 죽고 적손인 골정의 아들 조분이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 내해가 신라의 왕으로 196년 즉위하였다. 즉위 해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는 날에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기뻐서 경축하였다.

197년 정월에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198년 4월에 시조묘 앞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 5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났으므로 수해를 당한 주·현의 1년 조세와 공물 부담을 면제해 주었고 7월에 사자를 보내 위문하였다.

199년 7월에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였다.

200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閼川)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201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였다. 3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크게 가물어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혀 있던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해 주었다.

203년 10월에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205년 2월에 진충(眞忠)을 일벌찬(一伐滄)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시켰다.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태백성[;금성의 다른 이름]이 달을 범하였다. 8월에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207년 정월에 왕자 이음(利音)<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하였다.>을 이벌찬(;1등급)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208년 2월에 서쪽으로 군읍(郡邑)을 두루 돌아보고 열흘이 되어서 돌아왔다. 4월에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이벌찬(;1등급) 이음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209년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駕洛國)의 요청으로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1등급) 이음(利音) 등 구원병을 파견,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때 팔국장군을 죽이고 포로 약 6,000명을 얻었다.

210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사신을 보내 군읍(郡邑)의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211년 정월에 훤견(萱堅)을 이찬(;2등급)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212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5월에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떠내려가고 부서졌다.

214년 3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7월에 백제가 나라 서쪽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해 와서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1등급)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6천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12월에 천둥이 쳤다.

218년에는 자신이 지휘하여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220년 3월에 이벌찬(;1등급) 이음(利音)이 죽었으므로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삼고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7월에 양산(楊山)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222년 4월에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를 해쳤다. 남신현(南新縣)의 사람이 죽었다가 한 달이 지나서 다시 살아났다. 10월에 백제 군사가 우두주(牛頭州)에 침입하였으므로 이벌찬(;1등급) 충훤(忠萱)이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막았는데,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여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으므로 진주(鎭主)로 좌천시키고 연진(連珍)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24년에는 이벌찬(;1등급) 연진(連珍)에게 명하여 백제군을 봉산(烽山) 아래에서 무찌른 뒤 그곳에 봉산성(烽山城)을 새로 쌓게 하였다.

226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진휼하였다. 10월에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다.

227년 2월에 서남쪽의 군읍을 두루 돌아보고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4등급) 강훤(康萱)을 이찬(;2등급)으로 삼았다.

229년 4월에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10월에 큰 눈이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230년 3월에 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사촌이 조분이사금이 되었다.


※ 내용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