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9.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01

 

 9.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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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생존기간 : (?~196)

   □ 재위기간 : (184~196)



◐ 본문설명

신라 9대 왕으로서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발휘왕(發暉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이며 탈해왕(脫解王;재위57-80년)의 아들인 구추각간(仇鄒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伐休系)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邪正)을 알아맞혀 성인(聖人)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즉위조 이외에 구추(仇鄒)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 김씨이다.

박씨(朴氏)인 아달라왕(阿達羅;재위154-184년)이 184년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벌휴이사금이 왕으로 즉위할수 있었던 것은 선왕인 아달라이사금이 아들없이 죽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철기문화수준에서 월등한 우의를 지닌 새로운 지배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기존의 여러 세력을 누르고 대세를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석씨왕계 이후에 신라가 비약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5년 처음으로 좌우군주(左右軍主)의 군직(軍職)을 신설하여, 구도(仇道)·구수혜(仇須兮)를 군주로 삼았다. 이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군주(軍主)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86년 정월에 주·군을 두루 돌며 풍속을 살펴보았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7월에 남신현(南新縣)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187년 3월에 주·군에 영을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 농사의 때를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10월에 북쪽 지방에 큰 눈이 내려 한 길이나 쌓였다.

188년 2월에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왔으므로 파진찬(;4등급)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막게 하였다.

189년 7월에 구도(仇道)가 백제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겨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90년 8월에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였다. 또 진군하여 부곡성(缶谷城)을 에워쌌으므로 구도(仇道)가 굳센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났다. 구도(仇道)가 뒤쫓아가 와산(蛙山)에 이르렀다가 백제에게 패하였다. 왕은 구도(仇道)가 실책하였다 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191년 9월에 치우기(蚩尤旗;혜성의 옛이름)가 각(角)·항(亢) [별자리]에 나타났다.

192년 정월에 국량(國良)을 아찬(阿飡;6등급)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3월에 서울에 눈이 내려 세 자나 쌓였다. 5월에 홍수가 나서 1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193년 정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한기부(韓祇部)의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194년 6월 그믐 을사에 일식이 있었다.

196년 2월 궁궐을 크게 수축하였다. 3월에 가물었다. 4월에 궁궐 남쪽의 큰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 금성 동쪽 문에 벼락이 쳤다. 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손자가 내해이사금이 되었다.



※ 내용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