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 생존기간 : (?~184)
□ 재위기간 : (154~184)
◐ 본문설명
신라 8대 왕으로서 성은 박씨이며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다.
키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두툼하고 커서 범상치 않은 형상이었다. 일성왕(逸聖王;재위134-154년)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이며 비(妃)는 지마왕(祗摩王;재위112-134년)의 딸 내례부인(內體夫人) 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다.
이와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4년 2월 아버지 일성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3월에 계원(繼元)을 이찬(;2등급)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155년 정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興宣)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156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鷄立嶺: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의 길을 열었다.
157년 2월 처음으로 감물(甘勿) ·마산(馬山)의 두 현을 두었다.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하여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고 각자에게 군복을 내려 주었다.
158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160년 4월에 폭우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민가를 떠내려보냈다.
금성(金城)의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161년 7월에 누리누리[蝗(황)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바다 고기가 많이 물 밖으로 나와 죽었다.
162년 사도성(沙道城)에 순행하여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였다.
164년 2월에 용이 서울에 나타났다.
165년 아찬(;6등급) 길선(吉宣)이 모반하였다가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백제 개루왕이 응하지 않아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졌다.
백제는 성 안에서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아, 우리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 돌아왔다.
166년 정월 초하루 신해에 일식이 있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여 1000여 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8월에 일길찬(;7등급) 흥선(興宣)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치게 하고, 왕도 또한 기병(騎兵) 8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 곳에] 다다랐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 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168년 4월에 이찬(;2등급) 계원(繼元)이 죽었으므로 흥선(興宣)을 이찬으로 삼았다
170년 2월에 시조묘를 다시 수리하였다.
7월에 서울[京師]에 지진이 일어났다.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10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171년 봄에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172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4등급)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2월에 시조묘에 변고가 있었다.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73년 5월에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174년 정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2월에 가물어 우물이 말랐다.
184년 3월에 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탈해왕(脫解王;재위57-80년)의 손자인 벌휴가 왕이 되었다.
이처럼 아달라이사금의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는 것은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한편, 연오랑(延烏郞) 과 세오녀(細烏女) 설화도 아달라 이사금 때의 일이다.
※ 보충설명
연오랑(延烏郞) 과 세오녀(細烏女) 설화
옛날 신라땅 동해 바닷가 조그마한 어촌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연오랑은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어부였고,
아내 세오녀는 밭을 매거나 베를 짜는 일을 했다. 이렇게 연오랑과 세오녀는 오손도손 정답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은 해변을 거닐며 낚시하기에 알맞은 곳을 찾다가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 하나를 발견하여 신을 벗어 놓고 그리로 올라가 낚시대를 드리웠다.
이날 따라 한 참을 있어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올 무렵 갑자기 몸이 갸우뚱하여 놀란 나머지 주위를 살펴보니 바위가 바다로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연오랑을 태운 바위는 동쪽으로 계속 떠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연오랑의 머리 위에 바짝 붙어 따라 오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점심을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오랑이 오지를 않자 바다로 나갔다.
세오녀는 남편이 자주 가는 바위가 있는 해변가로 갔다.
여기 저기 남편을 찾다가 어떤 바위 아래서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였다.
그 바위는 생긴 게 꼭 거북이 등과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였다.
세오녀는 신을 벗어 놓고 그 바위에 올라갔다. 이번에도 바위가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오녀를 태운 바위는 점점 빨라지면서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편 머리에 해를 이고 동으로 흘러갔던 연오랑은 이윽고 어떤 섬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서쪽 해안이었다.
당시 일본은 나라를 이루지 못해 부락 단위로 싸움이 심했다.(부족연맹체)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사람은 이를 보고는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하건데 전후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 없으니,
이는 변방 고을의 소왕<小王)이지 진왕(眞王)은 아닌것이다.]
일본사람들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임금이 된 연오랑은 마음이 무거웠다.
신라에 두고 온 아내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을때 세오녀를 태운 바위가 이 일본에 도착했다.
이 이상한 사실에 대한 신하의 보고를 듣고 연오랑이 나가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세오녀였다.
그리하여 세오녀는 일본의 왕비가 되었다.
연오랑이 일본을 다스리게 되면서 일본에는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이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점술가)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었는데 이제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朕)의 비(妃)가 짜놓은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고는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와 아뢰자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해와 달을 되찾은 신라 사람들은 그 뒤로 동해 벌판을 영일(迎日) 이라고 불렀으며,
비단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 지내던 곳을 도기야 (都祈野)라고 했다.
지금의 영일군 오천면 도구동이 그곳이다.
때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A.D 157년)의 일이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보충출처 : 삼국유사.권1.기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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