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7.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19:54

◐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생존기간 : (?~154)

   □ 재위기간 : (134~154)



◐ 본문설명

신라 7대 왕으로서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다.

 또는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

 비(妃)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제4대 탈해왕(脫解王;재위57-80년)이 80년에 죽자,

 유리왕의 태자였던 일성(逸聖)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으나 현명하지 못하여 신하들이 일성의 동생을 파사왕(婆娑王;재위80-12년)을

 옹립하였다.

 그리고 파사왕의 아들인 지마왕(祗摩王;재위112-134년)이 134년 아들 없이 죽자 일성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134년 9월에 죄수들을 대사했다.

135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136년 정월에 웅선(雄宣)을 이찬(;2등급)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주관하게 하고,

  근종(近宗)을 일길찬(;7등급)으로 삼았다.

137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長嶺)에 있는 다섯 개의 목책(木柵)을 불태웠다.

138년 2얼에 정사당을 금성에 설치했다.

 7월에 알천 서쪽에서 왕이 친히 군사를 사열했다.

 10월에 왕이 북방으로 순행하여 친히 태백산으로 제사지냈다.

139년 7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8월에는 말갈이 장령(長嶺)을 습격하여 인민을 노략하고, 10월에 말갈이 또 왔으나 눈이 심하니 물러갔다.

140년 2월에 목책을 장령(長嶺)에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141년 9월 그믐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142년 7월에 여러 중신들을 불러서 말갈을 정벌할 일을 의논했는데 이찬(;2등급) 웅선(雄宣)이 불가하다고 말하므로 그만두었다.

143년 2월에 궁궐을 수리했다.

  6월 을축일에는 형혹(熒惑; 화성)이 진성(鎭星;토성)을 범했으며, 11월에는 우레[;천둥]가 울었다.

144년 2월에 영을 내렸다. "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은 제방을 수리하여 완전하게 하고, 논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 " 또 명을 내렸다.

 " 민간에서는 금은과 주옥의 사용을 금하라. "

145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는데,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옮겨 구제해주었다.

146년 10월에 압독(押督)이 배반하므로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평정하고, 그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에 옮겼다.

147년 7월에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각 지혜와 용맹이 있어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했다.

148년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葛文王)에 봉했다

 -신라에서는 추봉한 임금을 모두 갈문왕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149년 정월에 득훈(得訓)을 사찬(;8등급)으로 삼고, 선충(宣忠)을 내마(;11등급)로 삼았다.

  8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천시[별자리]에 나타났다.

 11월에 우레[;천둥]가 울었고, 서울에 역질이 크게 번졌다.

150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151년 2월에 이찬(;2등급) 웅선(雄宣)이 죽으니, 대선(大宣)을 이찬(;2등급)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일을 겸하여 주관하게 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다.

 

153년 10월에 대궐의 문이 탔다.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154년 2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맏아들이 아달라이사금이 되었다.


※ 내용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