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9. 구주백제를 세운 무령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26

 

◈구주백제를 세운 무령왕 (재위501~523)

 

 

 

무령대왕(武寧王:462~523)은 개로왕과 반풍황녀의 아들로서 일본에서 태어났고

왜무왕(倭武王)이었으며 이름은 시마왕(島王)이라고도 했다.

 

[일본서기]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은 도군(島君), 즉 도(島)왕자라고 하였다.

도(島)는 일본말로 시마(斯麻)라고 발음하는데 무령대왕릉 지석에 기록된 이름이 역시 시마(斯麻)다.

 

왜무왕은 당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대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父兄)죽음으로 기록하였다.

그 국서에서 왜제왕을 부왕이라 하면서 동시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을 부왕이라고 부른

그 국서에 의해서 왜무왕이 시마왕, 즉 백제 무령대왕인 것이 증명된다.

[宋書] 臣亡考 濟 , 奄喪 父兄 , 申父兄之志..

 

왜무왕은 이 국서로서 자신의 왜왕 즉위를 알리면서 동시에 왜왕과 백제왕의 겸왕을 선언하였다.
[宋書] 自稱使持節 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무령대왕은 개로대왕의 아들로서 숙부인 문주대왕을 인정 안한 것이다.
하지만 송나라는 무령대왕에게 백제를 제외한 6국제군사겸 안동대장군 왜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무령왕보다 훨씬 나이많은 삼촌인 청령천황 곤지왕이 있었고, 또 모후 반풍황녀의 

오라비들인 인현천황, 현종천황 형제들이 있어서 왜무왕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479년, 청령천황은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왜무왕의 왜군을 동원하였다.

백제대왕으로는 인현천황(仁賢天皇.447~498) 억계왕(億計王)을 임명하였다.

[일본서기/청령천황기]에서 청령천황은 억계왕을 태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건원 2년, 480년에 백제왕으로 모도왕(牟都王)을 책명하였고,

또한 영명8년, 490년에 그 손자 모대왕(牟大王)을 백제왕으로 책명하였다.

즉, 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동성대왕(東城大王)이며 인현천황(仁賢天皇)이다.

 

479년인 웅략천황 23년에  말다왕(末多王)을 백제왕으로 봉하여 축자국군(筑紫國軍):(큐슈의 군대)

500명으로 호송하고, 또 축자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神)들이 배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고 하였다. 

 

동성대왕(東城大王):(모도대왕牟都大王=인현천황仁賢天皇)은 이중천황(履中天皇)의 아들인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 416~458)의 큰 아들이다.

인현천황은 동생인 현종천황과 함께 몸을 피했다가 여동생인 반풍황녀가 개로대왕비가 되니

누이를 찾아와서 각자궁(角刺宮)에 살고 있었다.

청령천황은 그중 인품이 있는 첫째 인현천황으로 백제왕을 삼고,

반풍황녀의 아들인 무령대왕으로 왜무왕을 삼았던 것이다.

 

이때 479년에 부형을 잃은 왜무왕, 무령대왕과 청령천황이 함흥 방면 고구려 공략의 선봉에 선 것이다.

청령천황과 무령대왕이 고구려로 떠나던, 479년에 미에(三重縣)에 은거했던

웅략천황(雄略天皇. 418~479)이 죽었다.
위험인물이라서 일본을 떠나기 전에 미리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고분은 75m의 원분으로 되어 있다.

 

무령대왕(武寧大王. 462~523)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 461~498)사랑에 빠졌다.

 

[고사기/웅략천황기]에 나오는 천어가(天語歌) 등의 시가(詩歌) 6편이 무령대왕의 이야기이다.
시 한 편에서는 오도히메
(袁杵比賣)=(小姬=웅략천황의 손녀)와 술래잡기를 하였고, 또 한 편에서는

미에(三重)=(웅략천황이 은거한 곳)의 공녀가 무령대왕을 축수하는 시가였고, 또 한 편은 황후가

그녀에게 무령대왕을 위해서 술을 올리라는 것이고, 또 무령대왕이 그녀에게 술병을 꼭 잡으라는 시가도 있다.

마지막 한 편은 그녀가 무령대왕을 위해 헌신한다는 축사였다.

 

그런데 청령천황과 왜무왕의 고구려 정벌은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청령천황과 무령대왕은 함경북도 청진(淸津)에 상륙하여

경성(鏡城)과 부령(富寧): 옛 사마현(斯馬縣)등을 점거하고 그곳에 이름을 남겼다.
청진의 어원이 청령천황이었던 것이다.

 

무령왕은 478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했으나,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 청령천황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에 나가서 지켰다.
이때 왜국에서는 조정을 맡났던 무령왕의 모후 반풍황녀가 서거하니,

현종천황이 484년에 왜왕위를 빼앗았다.

 

무령대왕의 479년, 고구려 공격과 함경북도 청진 지배는 현재 지명과 [삼국사기지리지]로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경성(鏡城) 도호부에는 길주(吉州), 명천군(明川郡) 부령군(富寧郡) 등이 속해 있었다.

 

경성鏡城의 옛이름은 목랑고성(木郞古城), 또는 우롱미(于籠耳)라고 했는데, 왜무왕(倭武王)이었던

무령대왕과 관련되어서 원래는 무령고성(武寧古城), 또는 왜룡미(倭龍彌)였을 것이다.

경성 남쪽 45리에 제왕산(諸王山)이 있었는데 제왕산(濟王山)이 었을 것이다.
청진 북쪽 부령군(
富寧郡)은 무령군(武寧郡)이 어원으로 무령대왕(武寧大王)과 관련된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이 곳이 무령대왕의 본 이름이 들어간 고-사마현(
古斯麻縣)이다.
부령군 무릉산은 무령산이 어원이다.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령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본래 용성천(龍城川)이었다.

즉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용성천의 하구인 청진시(
淸津市)에 청령대왕과 무령대왕의 궁성이 있었을 것이다. 

부거폐현 고성이 있던 용저동으로 고려된다.
명천군 성명봉(
聖明峰)은 무령대왕의 아들 백제 성명왕(聖明王)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은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
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대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
安班德山: 1830m)이 역시 무령대왕 동생인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산성, 소마온고성, 산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 지리 이름을 보면

우수주가 초고왕이 처음 개척한 함경남도 함흥이다.


[삼국사기/백제기]에서는 우곡성이다.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 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경남도 함흥에 비정하여서

잃어버린 고구려,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흑말강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호원군(乎原郡)은 북원(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근평군(斤平郡)은 병평(幷平)이라고도 했고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평주진 고성으로 고려된다.
심천현은 영흥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신포시 양화만(陽化灣)이다. 대양산(大陽山) 아래에 있다. 
저족현(猪足縣)은 신포시 동쪽 신창읍(新昌邑)의 저석봉(砥石峰)과 관련된다.

신창읍에 숙신고도 성터가 있다.
저족현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오사회는 신포시 압해산(壓海山)을 가리킨다.

 압(押)을 일본에서는 오사라고 읽는다.
압해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사회(烏斯廻)가 압해산이 된 것이다.

진사왕이 고구려를 친 도압산(都押城)일 수도 있다.
왕기현(王岐縣)은 개차정(皆次丁)이라고도 했는데 차호읍(遮湖邑)의 궁산(宮山)을 가리킨다.

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했는데 북청군의 북쪽 덕성군 삼산(三山)으로 고려된다. 

즉 덕성읍이 삼현현이다.
덕성군의 북쪽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성천군(犬生-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된다. 

시리군이라고도 하였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부령군 동쪽에 있는 부거폐현(富居廢縣) 성터로 추정된다.
부거폐현 고성이 있던 용저동은 백제 무령왕이 살던 곳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에는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麻縣)이 있었다.
고 사마현은 바로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고, 청진 북쪽 부령군(富寧郡), 부거현(富居縣)이

모두 무령왕에서 비롯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경성도호부의 18역(驛) 이름중에도 무녕역(撫寧驛)이 있었다.
부령군 석막면(石幕面)이 무령왕의 사마현이 변한 이름으로서 고사마현의 위치다.

석막면에 옥련성터가 있다.

지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릉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무령산이었을 수도 있다.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명천군 성명봉(
聖明峰)은 무령왕의 아들 백제 성명왕(聖明王)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은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
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대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
安班德山. 1830m)이 역시 무령대왕 동생인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산성, 소파온고성, 산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매곡현(買谷縣)은 청진시(淸津市) 수성천 동쪽이 고말산(高抹山)으로 추정된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犬生)川縣)이 있었다.
수성천현은 청진시 수성천(輸城川) 서남쪽으로 고려된다.

수성천의 최상류는 부령군에 있다.

그런데 이 수성천의 원류를 회령군 여이현(餘伊峴) 남쪽에서 발원하여 나온다고도 하였다.
지금 부령군이 된 여이현의 여이(餘伊)는 백제 왕족 이름일 것이다.

무령왕의 즉위전 아명일 수도 있다.

한편 회양도호부에도 여이파산(餘伊破山)이 있다.

급벌산군은 경성시(鏡城市)로 추정된다.
이벌지현은 경성시 주을읍으로 추정되는데 보로천(甫老川)이 지난다.

 보로(甫老)가 벌(伐)의 연음일 것이다.
문현현(文峴縣) 다른말로 근시파혜(斤尸波兮)는 어랑읍으로 고려된다.

본래 회문(會文)이라고 했고 주북천(朱北川)이 흐른다.

모성군(母城郡), 또는 야차홀(也次忽)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이

흐르는 어랑군(漁郞郡)의 어대진(漁大津)이다.
동사홀(冬斯忽)은 동생을 의미하는 어랑면 아우동(阿隅洞)으로 고려된다.
수입현(水入縣)은 어랑천과 명간천의 사이인 수암동(壽巖洞)으로 고려된다.

 

객련군(客連郡), 또는 가혜아(加兮牙)는 명천읍(明川邑)으로 추정된다.

상아동(象牙洞)이 있다.

백록산도 있는데 이 모두가 중국인 기자의 후예와 관련된다.

기자조선이 처음 생겨났던 요녕성 조양시 객좌현의 지명들이 옮겨온 것이다.
적목현(赤木縣), 또는 사비근을(沙非斤乙)은 길주군 서북 목성리(木城里)로 고려된다.
관술현(管述縣)은 학성군(鶴城郡)으로 추정된다. 
저란현현(猪蘭峴縣), 또는 조생파의(鳥生波衣), 또는 저수(猪守)는 단천(端川)으로 추정된다.

저란은 절(節)의 연음인데 단천에 직절리가 있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안변읍(安邊邑)이다.
경곡현(~谷縣) 또는 수을탄현(首乙呑縣)은 안변군 서곡면(瑞谷面)이다.
청달현(菁達縣) 또는 석달현(昔達縣)은 석왕사면(釋王寺面)으로 추정된다.
살한현(薩寒縣)은 통천군 흡곡면이다.
가지달현(加支達縣)은 안변부 남 30리라고 하였다.

현재 안변군 신아면 문곡리다.
어지탄현(於支呑縣) 또는 익곡현(翼谷縣)은 안변 남 65리라고 하였다.

통천군 학면으로 고려된다.
매시달현(買尸達縣)은 원산시(元山市) 무달사(武達寺)로 추정한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부사달현(夫斯達縣)은 덕원면(德源面)으로 추정한다.
동허현(東墟縣)은 원산시로 추정한다.

내생군(奈生郡)은 고원군(高原郡)으로 고려된다.

을아차현(乙阿次縣)은 천내군으로 고려된다.

우오현(于烏縣) 또는 욱오현(郁烏縣)은 문천시 구읍내 옥평리로 고려된다.

주연현(酒淵縣)은 통천 구읍으로 고려된다.

위 기록에서 천성군 비열홀이던 안변군이 가장 남쪽인데

현 이름들은 대개 현재 국사학계 통설과 일치한다.

천정군도 역시 일치한다.
그러나 천북군 이북의 우수주 9개군을 국사학계는 춘천 방향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함흥 방향으로 맞추어야 옳다.
734년 발해의 신라 공격 때에 함흥의 신라 우수주 사람들이 춘천으로 피난나왔을 수 있다.

 

 

 

모도대왕이 웅진의 백제왕이 되고, 청령천황과 왜무왕인 무령천황이 고구려 청진에 공략중인 때에,

모도대왕의 동생인 현종천황은 왜왕위를 찬탈하더니 고구려와 내통하여, 그 처벌로서 488년에

형왕인 모도대왕 인현천황이 일본에 복귀하여 제거당했는데, 이때 왜국 신하들의 반목이 있었다.

 

484년, 평군진조(平群眞鳥)가 모도대왕 인현천황을 수행하여 백제에 있는 동안에,

난파소야왕을 보호하던 평군진조의 아들 평군지비(平郡志毗)가 난파소야왕을 뺏으려는

현종천황과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그후 인현천황이 488년에 백제에서 돌아와 현종천황과 난파소야왕을 제거하고

인현천황으로 즉위하여서 평군진조를 재상으로 하니,

그 아들을 죽인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숨어지내야 했다.

현종천황의 아들 추촌(麁寸)은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대반금촌련이 평군진조를 죽였다.
그리고 10살의 어린
추촌(麁寸)을 천황으로 세우니 무열천황(武烈天皇. 489~506)이다.

 

494년에서 497년 사이에, 고구려 문자왕이 금야강의 수곡성을 비롯하여

문천의 우산성을 차지한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일본에서도 고구려계가 득세하여 무열천황이 다시 선 것이다.

 

이때 인현천황은 연금되었거나 중병에 들었다.
무열 3년 500년 11월에 백제의 의다랑(
意多郞)이 죽으므로 고전(高田)에 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의다랑은 바로 인현천황의 이름인 의기명(
意祁命)과 관련되며 그의 자(字)가 도랑(島郞)이었다.
즉 의다랑(
意多郞)은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이다.

그의 손자는 의다(意多)의 반대말인 말다(末多)이다.
함흥 서쪽에 모도봉(1833m)이 남아 있다.

당시 말갈과의 국경이라고 할 수 있다.

 

모도대왕의 손자인 백제 모대대왕은 이듬해 501년 12월에 백제에서 죽었다.

무열천황은 오토하스세와카사자키천황(小泊瀨稚鷦鷯天皇)이라고도 하였는데

하스세(泊瀨)라는 지명은 윤공천황, 웅략천황 등의 고구려계 호창으로서 무열천황 역시

고구려 피가 섞인 것을 나타낸다.
그의 다른 이름인 추촌(
麁寸)은 “우에끼”로 읽어서, 상성(上城)을 의미하고

이는 웅략천황이 은퇴하여 죽은 미에현(三重縣)의 성 이름이다.
또, 무열천황이 수파읍(
水派邑)에 쌓은 상성(上城)도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미에현에 쌓은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현종천황 즉위 전에 현종천황이 죽이는 평군지비(平群志毗)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서기]에서는 무열천황 즉위 전에 나온다.
이는 현종천황과 무열천황이 난파즉어녀설화
(난파소야왕)에 나오는 못된 부자父子라는 확실한 증거다.

 무령대왕은 백제왕으로 즉위하자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의 폐위를 요구하고

마나(麻那) 왕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는 모대대왕(牟大大王)=(재위 488~501)의 동생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모대를 마모(摩牟)라고도 기록했다.
그러나 대반금촌련(
大伴金寸連)은 마나를 몇년 동안 억류하였다.

 

504년 무령대왕은 동생인 사아왕(斯我王: 466~535)과 백제 군대를 함께 보내어 일본 큐슈(九州) 정벌을

시작하였다.


사아왕이 바로 안한천황(安閑天皇)이 되었다.

그는 백제 군대로서 큐슈 임나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사아왕은 법사군(法師君)을 낳았고, 그가 훗날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군은 곧 왜왕(倭王)을 왜곡한 것이다.
큐슈의 왜국을 가리킨다.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은 백제 침공을 당하여 일단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을 죽였다.
그리고 계체천황(
繼體天皇)을 새 천황으로 끌어들였다.
계체천황은 개로대왕이 미야쯔성(
宮津城)으로부터 후쿠이현(福井縣) 동북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할 때에 진부인을 취해 낳았던 아들이라서 무령대왕에게는 서형(庶兄)이었다.

대반금촌대련은 백제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의 딸인 수백향황녀(手白香皇女: 488~526)

짝지어서 계체천황의 황후로 세웠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여덟 명의 비(妃)를 들여서 팔도(八島) 결혼동맹으로 백제에 맞섰다.

백제 무령대왕은 피붙이인 계체천황을 향한 일본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일찍이 고구려 윤공천황이 점령했다가

그 세력이 많이 남아있는 큐슈 임나를 평정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일본에서는 규슈가 떨어져나와 백제 땅이 되어서 구주백제가 생겨났다.

다음은 백제의 왕자로서 구주백제왕을 지낸분들의 연표다.

구주백제왕은 뒤에 백제왕이 되거나 일본천황이 되었다.  

안한천황과 선화천황은 무령왕의 동생들이고 흠명천황은 무령왕의 아들인데 

일본천황이 되기전에 구주백제왕을 먼저 하였다.           

                               

 

 

509년, 백제 사아왕(안한천황)은 일본 큐슈 진출의 첫 사업으로 큐슈 임나의 현읍(縣邑)에 있는

백제인 후손을 찾아서 호적 정리를 하였다.
큐슈 임나의 백성이 백제의 백성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이다.

512년, 백제는 큐슈 임나의 상치리(上哆唎), 하치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4현을 차지하였다.
상치리(
上哆唎)는 파자(破字)하면 상구다리(上口多唎)니 구마모토(熊本市) 동북방 구루메시(久留米市) 일대다.

하치리는 역시 하구다리로서 옛 안라국이 있던 곳으로서 구마모토다.
하치리가 구마모토인 것은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구마나리(熊川)를 임나국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별읍(別邑)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이 구마나리(
熊川)는 구마모토(熊本)이며 동시에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 즉 하구다라였다.

 

                                

                                                                        구주백제

 

본래 다라국 중심인 구루메시(久留米市)가 고구려 고우라산(高良山) 고모라(高牟禮)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시 고구려 이름을 빼고 옛이름 다라국으로 돌아와서 구다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구다라를 감추기 위해서 구다(口多)를 합자하여 치로 위장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큐슈의 백제 땅이름 구다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타(娑陀)는 가고시마(鹿兒島) 남단의 사다(佐多)곶과 관련하여 가고시마로 추정된다.

모루현은 지금의 모로군(諸縣郡)의 위치다.

미야자와현(宮岐縣)이다. 제(諸)를 모로로 읽는데 우리말 “모두”의 고어다.

즉, 백제 무령대왕 때에 동생인 사아왕자는 규수 중부와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백제의 구다리국수(哆唎國守)로 임명된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은 계체천황이 있는 대화에

사자로 가서 백제랑 싸워 지킬 수 없으니 그냥 주어서 백제와 큐슈를 합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고, 대화의 대반대련금촌은 큐슈에 사신을 보내려했지만 죽을까봐 아무도 가지 못했다.

 

513년, 백제는 대마도 남도의 반파국(伴跛國)이 점령한 대마도 북도인 기문(己汶)내놓으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하였다.

 

반파국은 옛 불합국(不合國), 즉 불이합도(不二合島)인 대마도다.

하나지만 둘로 갈려져 합치지 못한 섬이 대마도인데 그 남쪽을 당시 반파국이라 한 것이다.

계체천황은 백제 큐슈왕인 사아왕(斯我王)에게 인현천황의 딸 춘일황녀를 보내서 달랬다.
사아왕은 시를 지어서 일본 팔도(
八島)를 얻지못하고 고작 여자를 받았다고 한탄하였다.

 

513년 12월, 계체천황은 사아왕(斯我王)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다음대 천황으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계체천황은 사아왕을 마로고(
麻呂古)라고 불렀는데, 마로(麻呂)는 환(丸)이니,

안한천황의 “한”을 의미한 것이고, 마로고(麻呂古)는 큰 왕이라는 뜻이다.

안한천황을 한왕(漢王)이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514년, 계체천황은 백제장수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사라(斯羅)의 문득지, 안라(安羅)의 신기계, 반파의

기전계 등의 성주를 대화조정에 불러서 북대마도의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에 내주도록 하였다.

사라(斯羅)는 지금의 사와라인 큐슈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김무성(金武城)이다.
안라(
安羅)는 이미 백제 사아왕이 점령한 구마모토다.

기문(己汶)은 임나의 동북에 있고 삼기문(三己汶)이 있다고 숭신천황 때에 대마도주인 임나도주가 말했다.

 

[신찬성씨록]任那國奏曰。臣國 東北 有 三己汶地。上己汶。中己汶。下己汶。地方三百里。土地人民亦富饒

 

지방 300리 크기의 기문은 대마도 북도를 말한다.

좌호천, 인전천, 인위천이 흐르는 3마을이 3기문으로 고려된다.

체사성은 대마도 남도의 성이다.

 

기문 섬을 백제가 가지니, 반파국은 다시 기문을 돌려달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한다.
그러다가 반파국(
伴跛國)은 대마도 남도에서 대사성(帶沙城)=(滯沙) 등을 정비하고, 신라를 약탈한다.

반파국이 약탈한 신라는 큐슈 서북의 신라인 신량(新良) 사와라 땅에 해당한다.

이때 본토 신라는 512년에 울릉도를 점령하고 514년에 아나가야(阿那伽倻)에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강군으로서 국경을 확대 중이라서, 대마도 반쪽 반파국에 본토를 공격당할 수준이 아니다.

515년, 구주백제의 사아왕이 보낸 장수 물부련(物部連)이 사쓰도(沙都島)를 쳤는데

사쓰천(佐須川)이 중심에 흐르는 대마도 남도 반파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파국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문모라(汶慕羅)로 물러나왔다.

문모라는 미마나, 즉 예전의 대마도 임나다. 지금 대마도 미진(美津)의 계지천 부근이다.

구주백제왕은 물부련을 기문(대마도 북도)에서 위로하고 귀국시켰다.

이후 523년에 무령대왕이 서거하고 성명대왕(聖明大王. ?~554)이 즉위했다.

 

 

<삼국사기>

무령왕(武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혹은 융(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키가 여덟 자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

모대가 재위 23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에 좌평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가림성은 한강 하구 개풍군 백마산에 있었다.
충청남도 서천군의 가림성은 서림성이라고도 했고 새로 옮겨온 곳이라는 뜻이 된다.
성왕 대에 사비성이 옮겨가면서 가림성도 옮겨가고 그 뒤에 신라 덕물도의 진이 된 것이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率) 해명(解明)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우두성은 황해도 예성강 동편 우봉면이다. 무령왕은 동해안 함흥에서부터 육로로 진격해온 것이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에 던져버렸다.


백강은 예성강이다.

 

백제 부흥운동 때에 백강과 웅진강이 각각 나온다.

신라군이 웅진강(금강)에서 백강으로 가고, 백강에서 왜군을 섬멸한다.

 

사론(史論): 춘추(春秋)에

『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역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無將, 반역하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백가(加)와 같은 흉악한 역적은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바인 데 곧장 죄주지 아니하고,

이에 이르러 스스로 죄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반란을 꾀한 후에야 죽였으니 때가 늦었도다.


겨울 11월에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였다.

 

이후 역사에서 수곡성은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황해도 수안군 장새현에 있었다는 수곡성은 발해 때에 옮겨온 것으로 고려된다.
신라가 고구려로 진격할 때에 장새현이 나오는데 그 위치에서 수곡성은 나오지 않는다.
함흥의 수곡성은 백제 영토였으므로 고구려 수곡성은 그 서북으로 후퇴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위치는 대동강 동북단인 영원군(寧遠郡)으로 고려된다.

2년(502) 봄에 백성들은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3년(503) 가을 9월에 말갈(靺鞨)이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를 쳐서 물리쳤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고목성은 고원군일 것이다.

503년, 무령대왕 즉위 3년에 산동반도 백제땅을 잃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문자명왕 12년, 503년에 백제의 진평군(
晋平郡)을 없앴다고 하였다.

문자명왕은 백제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아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이 이제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다.

그러나 고구려가 산동 땅을 제대로 경영했는지는 의문이다.

6년(506)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내와 못이 말랐다.

백성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가을 7월에 말갈이 쳐들어 와서 고목성(高木城)을 깨뜨리고 6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해 백제는 대동강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이 기록된 것이 <평양성벽 각서>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평양성벽 각서중 4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술년 12월 중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후부(지명) 소형(관직) 문달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고

서북쪽으로 물을 건너갔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小兄 文達 節自此 西北行涉之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동강 평양성이 고구려 한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제1석부터 5석까지 있는데

제 4석은 내성의 대동강 강가 성벽 장경문(長慶門)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성벽은 대동강을 따라서 동북과 서남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한성은 바로 비문이 발견된 오늘날의 평양성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이름이고 백제 한성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네 개의 각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의 시작이나 끝은 정확한 날자가 기록되어야 하지만,

병술년 12월에 한성이 함락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황급히 서북으로 도망가다 보니,

그 뒷날에 공사가 중단된 날을 알 수도 없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비석이 발견된 곳에서 서북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으로 도망간 것이다.

즉 이 기록은 공사를 시작하거나 마친 기사가 아니라 일단 내성을 쌓다가 중단하였던 사실에 대한

뒷날의 기록이다.

백제가 대동강 북쪽의 한성을 되찾은 것은 5회로 추정된다.

1.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빼앗기고, 399년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나

   광개토왕이 다시 뺏았다.

2. 비유왕(毗有王)이 말년, 454년 이전에 수복하였으나 475년에 개로대왕이 장수왕에게 다시 빼앗겼다.

3. 무령왕(武寧王)이 506년 회복하여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으나 529년(성명왕(聖明王) 7년)에 빼앗겼다.

4. [일본서기]에서 성명왕(聖明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북한산성)과 한성(漢城: 니현 한성)을 되찾았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평양성벽각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병술년은 506년이다.

 

즉, 506년 2월에 무령대왕은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였고,
다음해 507년에 문자명왕의 용강 횡악성 공격이 있었으나 무령대왕이

이를 물리친 다음에는 적어도 청천강까지 다시 백제 영토로 확보하였다.

 

7년(507) 여름 5월에 고목성(高木城)의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웠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하여 말갈에 대비하였다.


장령성은 동해안 정평군에 있었다.

장곡성이 장령성이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漢城)을 공격하고자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횡악은 용강의 황룡산성이고 한성은 대동강 니현 한성이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 이를 물리쳤다.

10년(510)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게 하고 중앙과 지방(內外)에서 놀고먹는자(遊食者)들을

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12년(512) 여름 4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사를 옮겨 원산성(圓山城)을 깨뜨렸는데,

죽이거나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맹스러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 사람들은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만만히 여겨 진(陣)을 치지 않았다.

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급히 쳐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가불성은 가화압(加火押)이라고 하였던 한성 남쪽의 중화군이다.

고구려가 수군부대로 중화군 서쪽의 해압면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원산성은 본래 구월산 동남쪽에 있었지만 온조왕이 한산 북쪽으로 옮겼었다.

평양 남쪽 십성동의 낙랑토성으로 고려된다. 원형의 토성이다.
위천은 예성강 북쪽 위라천으로 고려된다.

 

16년(516) 봄 3월 초하루 무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4월 18일이다.

0516 Apr 18 00:07 A 95 0.761 0.942 52.9N 143.5E 40 327 05m01s

 

21년(521)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8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하여 들어간 자가 900집이었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12월에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해외에서 번방(藩方)을 지키고 멀리서 공물(貢職)을 보내 그 정성이 이르니 짐은 가상히 여기는도다.

마땅히 옛 법을 좇아 이 영예로운 책명(冊命)을 주니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 가(可)하다.』

 

22년(522) 가을 9월에 왕이 호산(狐山)의 들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3년(523) 봄 2월에 왕이 한성(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등에게 명령을

내려 한북주군민(漢北州郡民)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이전에 아신왕 7년(398년)에도 쌍현성을 쌓고, 개로왕 때에 쌍현성을 수리한 적이 있었다.
무령왕 때에는 한북의 주군민이 새로 쌓았으므로 한수, 즉 대동강 북쪽이다.
다루왕 4년에 횡악 아래서 쌍록을 잡은 일이 있다.

지금의 쌍아산(雙娥山)인데 백제 쌍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쌍아산이 있는 함종현은 아산현(牙山縣)이라고도 하였는데 쌍아산의 모양이 두 개의 상아,

혹은 두 개의 물고기가 뻗어나온 산의 모양이다.

쌍아산에는 남쪽의 내성과 북쪽의 산성이 보이는데 각각 책계왕이 쌓은 것과 무령왕이 쌓은

두 개의 쌍현성으로 고려된다.

 

 

 

 

3월에 한성(漢城)으로부터 돌아왔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령(武寧)이라 하였다.

 

무령대왕릉은 현재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되어 있다.
무령왕 때의 백제 신제도가 공주가 아니지만 성왕이 사비성 즉 충청남도의 새로운 고마성으로

천도하면서 부왕의 왕릉을 부여 북쪽 공주의 새로운 웅진으로 옮긴 것으로 고려된다.

이장한 것이라서 일본의 여러 능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한편 일본에도 무령대왕의 고분이 있을 것이다.
흠명천황이 바로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대형 전방후원고분들이 일본에 많이 남아있다.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 도입된 백제 기록은

[백제신찬(百濟新撰)]의 429년 기사년부터 461년 곤지군의 기록과, [백제기(百濟記)]의 475년 기록이 있다.

 

[백제기(346~475년)]는 근초고대왕부터 개로대왕까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이전의 역사를 포함할 수도 있다.

 백제의 박사 고흥(高興)에 의해 [백제서기百濟書記]가 편찬된 것이 근초고대왕 때이므로, 근초고대왕

 이전을 [백제서기]에 기록하고 근초고대왕 이후부터 [백제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백제신찬(429~501)]은 비유대왕부터 무령대왕까지 인용되었으며, [백제본기(百濟本記. 501~557)]는

 무령대왕부터 위덕대왕초기까지 기록이 인용되었다.

 

중국 [양서]의 기록을 본다.

 502년 백제왕을 정동장군이라고 하였다. 

그간 고구려에 많이 침략당해서 "남한"으로 천도했다. 
521년, 무령왕은 계속적으로 고구려를 쳐서 다시 중국과 통하고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양고조는 무령왕을 진동대장군으로 봉했다. 

다시 영동대장군으로 봉했다. 

무령왕이 죽자 성명왕이 즉위했는데 그의 도읍은 고마성이었다.


[梁書]
天監元年, 進<太>號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 普通二年,

王余隆始復遣使奉表,稱 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 其年,高祖詔曰...可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隆死, 詔復以其子明爲持節都督 百濟諸軍事綏東將軍 百濟王.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520년 큐슈를 거의 병합한 백제 무령대왕은 고구려를 여러번 무찔러서 비로소 양나라와  길을

통했으므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고, 양나라 무제는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에 봉하였다.

 

 

무령왕릉의 유물은 전축분과 함께 웅진시대의 대중교류를 밝히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무령왕릉의 전(塼)과 석수(石獸<돌짐승>), 지석(誌石)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아
대중교류(對中交流)가 재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수는 진묘수의 일종으로 진묘수는 기괴한 생김새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죽은 사람을 지킨다는 중국 부장문화의 일종으로 대개 묘실 입구에 놓아 사자의 방을

지키게 하는 의미이로서의 부장품이다.

그리고 무령왕릉 지석

(능의 주인에 대한 기록과 땅의신<地神>에게 땅을 사서 죽은자를 안장한다는 일종의 주술적 가치를 지닌

널판형의 돌문서로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의미로 실제 쓰이는 돈과 함께 매장한다)은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이 놓여 있었는데, 발굴당시 지석 위에서 오수(五銖)라는 글씨가 새겨진 철전(鐵錢<철로만든 돈>)이

한 꾸러미 발견되었다.

이 오수전은 토지 신에게 무덤 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은 것으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영향으로 보이며 묘의 축조는 물론 부장문화 까지 중국의 풍습을 따른 것은

무령왕 대에 이르러 그만큼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릉출토유물들>

무령왕릉 내부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분묘가 분포되어 있다.

해발 높이 130m의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능선의 중턱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으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궁륭상 횡혈식석실분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횡혈식의 전축분이다. 석실분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전축분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이입된 무덤양식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송산리고분군이 왕릉군임이 분명해졌고 공주 일원의 주미리, 교촌리, 금학동, 옥룡동 고분군이 동시기 귀족의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 발굴 전 모습

 

1971년 7월 6일 송산리 5호, 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벽돌무덤(전축분)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처녀분인 채로

조사되었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였던 무령왕과 왕비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어 백제사와 백제고고학 연구의 진일보를 알려주는 순간이었다.

 

 

무령왕릉 출토 상황 묘사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이상한 짐승(石獸)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되 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금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벽돌(塼)

연화문 벽돌

 

'중방(中方)'자 벽돌

위로 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명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명문 있는 벽돌은 '…士壬辰年作' 명문이 새겨진 벽돌과 '大方' '中方' '急使'명문이 압출(壓 出)된 벽돌이 있다.

문양 있는 벽돌에는 각각 짧은 변과 긴 변에 문양이 있는 것이 있는데 짧은 변에는 연꽃무 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로 장식되고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 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로 장식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석수〔石獸]

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석수는 응회암제이며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다.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다리는 짧고 발톱의 표현도 똑똑하지 않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묘실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무령왕릉 출토 지석(誌石)

<왕의 지석>

<왕비 지석>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이다.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 의 청회색 석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다.

무령왕이 523년에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하여 2년 3개월 간 가매장하였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후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529년에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짧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지석 2장이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왕릉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다.

영동대장군이란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작호이며, 사마왕은 무령왕의 이름인데 「삼국사기」에는 "斯摩"로, 「일본서기」에는 "斯麻"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죽음을 붕(崩), 무덤을 대묘(大墓)로 표현하고 있다. 지석의 사망년월은 「삼국사기」기록과 동일하다.

 

 무령왕릉 출토 관식(冠飾)

◈ 국보 154호. 높이 30.7cm, 너비:14cm

 

위로 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透彫)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 5mm 정도의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중국 구당서(舊唐書)에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 ...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 했던 비단 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

 

 무령왕릉 출토 왕의 귀걸이

 

 무령왕릉 출토 뒤꽂이

◈ 국보 156호. 길이 8.3cm

 

왕의 머리 부분에 있는 수대경 위에서 출토되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과 유사하다. 새날개와 비슷한 역삼각형의 상단부에는 화문과 인동당초문이 타출되어 있다. 하단부에는 세갈래의 꽂이를 만들었다.

이 뒤꽂이는 금판을 꽂이부 쪽에서 상단부 쪽으로 갈수록 얇게 두드려 폈고, 끌을 이용하여 절단하였으며 테두리를 따라가면서 두둘겨 세겨 놓은 가는 선(打出細線)을 돌려 완성하였다.

 

 무령왕릉 출토 허리띠

◈ 길이 95.7cm

 

왕의 허리부위에서 2벌의 금속제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한 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띠고리는 버섯모양을 띠며 띠연결부에는 7엽장식과 하트형 장식이 투조되어있다. 과판은 표 면이

오목하게 패인 타원형 금구로 크기에 따라 대, 소의 두종류가 있는데 교대로 배열하였다.

띠끝장식은 전체 형태가 5각형에 가깝다. 드리개는 금제 오각형판과 금제와 은제 타원형 금구, 금제 사각형판, 은제 장방형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의 금판에는 도깨비문양, 두꺼비 무늬를 투조하였고 장방형 은판에는 백호, 주작도를 끌로 새겼다.

귀면은 벽사(귀신을 몰 아냄)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두꺼비무늬는 달의 상징이며 백호와 주작의 표현은 사신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무령왕릉 출토 왕의 신발

◈ 길이 35cm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각판은 다시 안의 은판이 있고 그밖의 금동판을 덧낸 것이다.

신발속에는 3중의 포가 밭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 모양이다.

내측면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 북등 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 무늬가 타출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출토 베개(頭枕)와 발받침

베개

발받침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모두 커다란 나무둥치를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그 가운데 부분을 U와

W자 모양으로 파내어 각각 머리와 두 발이 올려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표면에는 검은 칠을 두껍게 한 다음, 6각형의 거북등무늬와 금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길이 38cm)

 

 무령왕릉 출토 동제 수저

 

무령왕릉 출토 수저 가운데 숟가락은 몸체가 은행알 모양이고 손잡이가 끝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길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젓가락의 경우는 자름면이 각(角)져 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은 여러 줄의 돋을선과 가는 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으며 젓가락 가운데에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젓 가락처럼 끈으로 묶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文物交流) 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 관식(冠飾)

 

위로 2점의 관식이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 (忍冬唐草紋)과 화염문(火焰紋) 장식을 투조(透彫)하였다.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 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다. 중앙에는 7판의 복련(伏蓮-뒤집어진 연꽃)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화병(花甁)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인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서는 사각형과 오각형 금판장식이 함께 출토 되었다. 이 판장식의 테두리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어 실을 이용, 대륜(帶輪)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 귀걸이 (耳飾)

 

모두 4쌍이 출토되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주환(主環), 중간식(中間飾), 수하식(垂下 飾)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주환과 수하식만 갖춘 것이다.

유환(遊環)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이11.8cm로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이 붙은 사슬형 연결금구에 탄환형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장식으로 투작반구체(透作半球體)를 덮어씌운 담록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 금구로 사익형(四 翼形)의 수하식을 연결하였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 신발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신발의 형태와 제작기법은 왕신발과 비슷하지만 문양의 구성등에서 차이가 난다.

내외측판은 전면에 거북등무늬(龜甲紋)를 구획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鳳凰紋), 인동당초무늬

(忍冬唐草紋)를 표현했는데, 모두 문양부분만 남기고 바탕을 투각하였다.

영락은 신발이 맞닿는 부위를 제외하고 전면에 달았다. 바닥판의 문양은 내외측판과 같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9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원형이다. 전면에 영락이 달려 있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 베개(頭枕)와 발받침(足座)

<베개>

나무토막을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부분은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그림,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 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의 금박(金箔)을 띠처럼 돌렸다. 입안에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다.

<발받침(足座)>

 

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하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蓮花紋)와 구름무늬(雲紋)등이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鐵芯)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철막대에는 금제릉형장식(金製菱形裝飾)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 출토 다리미

 

무령왕비(武寧王妃)가 살아서 사용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이 다리미는 근래에까지 시골에서 숯불을 담아 사용하던 다리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반(原盤) 모양의 다리미 몸체와 긴 손잡이는 각기 따로 만들어 붙였다. 바닥은 납작하며, 약간 오목하면서 넓은 테두리에는 8줄의 동심원(同心圓)이 새겨져 있다.

자름면이 반원형(半圓形)인 손잡이는 끝으로 갈수록 들려 약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몸체에 모시와 같은 천조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직물로 감싸서 무덤 안에 넣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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