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21. 위덕왕과 혜왕 법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31

 

위덕왕과 혜왕 법왕

 

 

[1]. 위덕왕 (재위 554~598)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원년(554)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 왔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웅천성은 임진강의 토산군 북포 고마성이다.
550년 백제의 평양 공격 때에 고구려는 경기도를 잃었으므로 백제의 거점을 공격한 것이다.

이 웅천성 공격은 충청남도 부여에 위치한 백제 사비성 공격으로 볼 수 없다.

해로 공격은 금강 어귀부터 공격을 해야 한다.

따라서 예성강을 넘어온 임진강 공격으로 고려되고 고구려가 패퇴하였으므로

예성강 동편의 백제 땅은 보전된 것이다.


 

 

 

위덕왕은 자신감을 상실하였는지 불교에 출가하려고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서기]에 보인다.


(흠명16년, 554년) 百濟余昌謂諸臣等曰:「少子今願,奉?考王出家修道.」

 

신라 진흥왕이 16년(555) 봄 정월에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완산주는 비사홀, 또는 비자화라고도 하였는데 비자화는 경상남도 창녕이다.

진흥왕 26년에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경상남도 합천이다.
따라서 신라의 완산주는 비자화라고 부르던 창녕이었다.
한편 전주의 완산주는 비사벌이라고 하였다. 

 

경기도 김포군 통진읍에 비사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열전/취도(驟徒)전]을 보면 경기도 통진의 전투를 알수 있다.

<취도(驟徒)는 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기록에 그의 성이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이었는데 맏이는 부과(夫果),가운데가 취도, 막내는 핍실(逼實)이었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도옥(道玉)이라는 이름으로 실제사(實際寺)에 머물고 있었다.

655년 태종대왕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 오자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조천성이 이제까지 충북 영동으로 알려졌는데 신라 조비천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북 영동에도 마니사와 마니산성이 있다. 강화도 사람이 옮겨간 것이라는 추정이 더해진다.) 
이에 도옥은 그 무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로서 상등은 학업[道]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를 실천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데,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고 취할만한

 한 가지 착한 일도 없으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낫겠다!”


승복[法衣]를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군대를 따라 전선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賊)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그 후 함형 2년 신미(문무왕 11: 671)에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백제 변방의 벼(가림성)

짓밟고 드디어 웅진의 남쪽에서 백제 사람과 싸웠는데 그때 취도의 형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니

논공서열이 제일 높았고, 문명(文明) 원년 갑신(신문왕4: 684)에 고구려의 남은 적이 보덕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대왕이 장수에 명하여 이를 치도록 하였는데 취도의 동생 핍실을 귀당(貴幢)의

제감(弟監)으로 삼았다.

핍실이 출전에 임하여 자기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에 죽어 이름을 길이 남겼는데,

나는 비록 어질지 못하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겠소?

오늘이 그대와 살아서 헤어짐이요 결국 사별일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 있으시오.”

 

적진에 맞서자 홀로 앞에 나가 용감히 싸워 수십 명을 목베고 죽었다.>
경기도 
통진에 있는 조강원(祖江院)이 본래 조천성인 것이다. 

가림성은 개성시 남쪽에 가림이 있다. 웅진은 임진강이다.

본래 보덕성은 평양 남쪽의 한성에 있었다. 673년 당나라가 안승의 우잠군을 쳤다. 

황해도 예성강 평산시 동쪽 우봉현 지역인데 안승은 이곳에서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잠시 물러갔을 때에 674년에 문무왕은 안승에게 책명을 주어서 보덕국왕이라고

하였다. 
한성에서 우잠군을 거쳐 새로 자리잡은 안승의 보덕국 위치는 황해도 금천군의 상류인 대흥산성,

본래 백제의 임존성으로 고려된다.


경기도 통진의 비사성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0년에 전주로 옮겨진 것으로 고려된다.

670년에 백제의 63성 내지는 75성이 내지로 옮겨졌다.



 

 

 

6년(559) 여름 5월에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추산에 의하면 양력 6월 21일이다.

0559 Jun 21 08:40 T 94 -0.334 1.049 4.2N 47.7E 71 172 04m59s

 

8년(561)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쳐서 약탈하었다.

신라 군사가 이기니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562년에 가야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니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서 멸망시켰다.

이때 일본에서 건너갔던 현종천황과 계체천황 구신들이 가야에 기생하던 임나일본부도 함께 정리되었다.
흠명천황은 군대를 보내어 가야를 되찾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임나십국은

가라국加羅國(김해金海 금관가야金官伽倻),

②아라국安羅國(함안咸安 아나가야阿那伽倻),

③사이기국斯二岐國(일기도一岐島),

④다라국多羅國(합천陜川 대가야大伽倻),

졸마국卒麻國(진해鎭海 탁순국卓淳國),

⑥고차국高嵯國(고성固城),

⑦자타국子他國(창녕昌寧 비자호국比自?國),

⑧산반하국散半下國(진주晋州 반성班城),

⑨걸손국乞飡國(큐슈九州 웅본熊本),

⑩임라국稔禮國(임나=대마도) 등 합해서 10국이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대마도와 일기도, 큐슈에 있던 3국을 제외한 임나 7국을 신라에게 잃은 것이다.

 

14년(567) 가을 9월에 사신을 진(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7년(570)에 고씨의 제나라(高齊) 후주(後主)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18년(571)에 고씨의 제나라高齊 후주(後主)가 또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동청주제군사(都督東靑州諸軍事)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
19년(572)에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초하루 경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추산에 의하면 양력 9월 23일이다.

0572 Sep 23 04:06 A 82 0.756 0.935 40.7N 145.6E 41 357 06m08s

 

24년(577) 가을 7월에 사신을 진(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신라의 서쪽 변방 주·군(州郡)을 치자 신라의 이찬(伊~) 세종(世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다.

신라는 내리서성을 쌓았다.


 

신라기에서는 2년(577)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군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았다.


구미의 일선군 전투와 내리서성은 별개로 본다.

내리서성은 철원의 고석정(孤石亭) 고성으로 고려된다. 

진평왕이 방문해서 꼭대기에 오른 기록이 있다.

 

11월에 사신을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5년(578)에 사신을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6년(579) 겨울 10월에 살별(長星)이 하늘에 뻗쳤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지진이 일어났다.

 

이때 신라기를 보면 진평왕 4년(579) 봄 2월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蒜山城)과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內利西城)의 길을 막았다.

 

 四年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蒜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秋七月十七日.

 

웅현성은, 백제 망국후 부흥기인 662년에 신라 문무왕기에도 등장하는데 웅진도독부로 가는

길목을 막은 백제부흥군의 성이다.

<百濟>殘賊, 據<甕山城>遮路, 不可前. 大王先遣使, 諭之, 不服. 九月十九日, 大王進次<熊峴停>,

集諸摠管大監, 親臨誓之. 二十五日, 進軍圍<甕山城>. 至二十七日, 先燒大柵, 斬殺數千人遂降之.

論攻, 賜角干?伊?爲摠管者劒, ???波珍??大阿?爲摠管者戟, 已下各一品位. 築<熊峴城>

 

 

 

웅현은 웅섬산현(熊閃山縣)이라고 했던 연천군 서쪽 임진강 동쪽의 전곡읍이다.
송술성은 삭녕군 승령산성이 된다.

뒤에는 옹산성이라고 했다.
마지현성은 마전천현(麻田淺縣)으로 고려되는데 경기도 연천군의 서쪽 미산면이다.

 

28년(581)에 왕이 사신을 수(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隋)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삼았다.

29년(58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1년(584) 겨울 11월에 사신을 진(陳)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3년(586)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6년(589)에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하였다.
전선(戰船) 한 척이 탐모라국(眈牟羅國)에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려고 나라의 경계(國界)를 경유하였다.
왕은 필요한 물건을 매우 후하게 주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

하였다.

고조가 이를 좋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듣고 멀리서 표를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나면 곧 상하고 파손됨(傷損)을 입게 된다.

백제왕의 마음씨가 순수하고 지극함은 짐이 이미 잘 알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록 멀다고는 하나 사정이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자주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와서 서로 상세히 알았으니(體悉) 지금 이후부터는 매년

별도로 조공할 필요가 없으며 짐도 또한 사신을 보내 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니 왕은 마땅히 알지어다.』

39년(592) 가을 7월 임신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추산에 의하면 양력 9월 11일이다.

0592 Sep 11 15:06:02 4785 -17406 102 A -0.6360 0.9673 30.6S 48.8W 50 34 149 03m07s

 

41년(594) 겨울 11월 계미에 살별이 각(角)·항(亢) [별자리]에 나타났다.

45년(598) 가을 9월에 왕은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遼東)에서 전쟁(遼東之役)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표를 올려

군(軍)의 길잡이[軍道]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아니하고 신하로서의 예가 없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토죄(討罪)하게 하였다.

고원(高元)[영양왕]의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며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을 할 수가 없다.』


[수나라는] 우리 사자를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자못 그 사실을 알고 군사로써 국경에 쳐들어와 약탈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威德)이라고 하였다.

 

백제는 성왕의 죽음으로 한반도에서 크게 세를 잃었고 신라가 대신 고구려와 맞서게 되었다.

 

 


위덕왕의 아들 민달천황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敏達天皇. 538~585)이 백제왕 선광(善廣)=(光)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백제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민달천황이 백제왕가 혈통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그러나 실제 밝혀지는 족보에는 의자대왕의 작은 할아버지가 민달천황이다.

민달천황은 누나카라후토타마시키(渟中倉太珠敷天皇)라고도 하는데 백제 성명대왕의 차자다.

성명대왕의 이름이 명농(明禾農)이다.

당시 큐슈에는 백제 대왕과 왕자들을 위한 둔창(屯倉)이 있었으니

화농왕(禾農王)의 둔창이 화농창(禾農倉)되는 것이고 이것이 일본말로 누나쿠라(渟中倉)인 것이다.
즉, 민달왕자는 구주백제왕 시절에 화농창(
禾農倉)에 있었으니,

성명대왕의 왕자인 것을 시호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시호에 역어전(譯語田)이라는 지명을 앞세운 것도 있다.

뒷날 대화에서 오사카의 궁을 역어전궁(譯語田宮), 혹은 오사다궁(他田宮)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대화조정에서 세운 궁이름이지만, 큐슈에서의 궁이름과 같은 것이다.

큐슈에서 역어전(譯語田) 누나카라(渟中倉)는 오오이타현(大分縣) 역관천변(譯館川邊)

우사궁(宇佐宮)이다. 


민달천황은 [흠명천황기]에서 552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민달천황기]에서는

568년에 황태자가 되어 서로 기록이 다르다.

앞에 552년 기록은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으로서 즉위를 의미하는 것이고,

뒤에 568년 기록은 일본 본토 천황 황태자로 보면 맞다.

그렇다면 568년에 흠명천황은 실제 천황에서 물러난 것이 되고,

그때부터 민달천황이 오사카를 통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흠명천황은 571년에 서거하였다.

회외합판릉(檜?坂合陵)에 묻혔는데 138m에 이르는 전방후원고분으로 되어있다.

 

민달천황은 오사카의 백제(百濟) 대정(大井)에 궁(宮)을 지었다.
이름자에 들어간 태주(
太珠), 태옥(太玉)을 보면 환(丸)의 의미이므로 한성(漢城)이라 불렀을 것으로

고려된다.
오사카 땅에 백제 한성이라는 지명을 최초로 붙인 것이다.

대정(大井)의 의미는 마을을 만들 때 먼저 하는 기초 공사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이고 정읍(井邑)을 우물 정(井)자로 만들기도 했다.

위덕대왕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민달천황이 백제 대왕이 되어서 백제 도읍을

오사카로 옮겨오려는 구상인지, 백제와 일본의 병합을 꿈꾼 것인지 알 수 없다.


554년, 백제에서 위덕대왕이 즉위하고 552년 일본 규슈에 온 민달천황은 구주백제의 왕으로 있다가,

흠명천황이 571년에 죽으니 민달천황(535~585)으로 즉위한다.

민달천황은 불교를 믿지 않았고, 즉위후 15년에 역병이 돌자 불교를 탓하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역병이 더욱 창궐하여 그도 결국 역병으로 죽었다.
민달천황은 그 이름에서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출신으로 보인다.

 광주의 옛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인데 무등산(無等山)이 광주에 있다.

민달(敏達)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무등산, 무진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무진주를 일명 노지(奴只)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민달은 일본에서 비다쓰라고 읽는다.

우리말 뜻으로 빛땅이 되는데, 무진주는 뒤에 빛산인 광산현(光山縣)으로 발전하여 빛고을 광주가

되었다.

 

민달천황 대에도 큐슈에는 백제에서 새로 온 성명대왕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명천황, 다치바나도요히(橘豊日)다. 그도 흠명천황의 아들로 조작되었지만,

본래 성명대왕의 아들이며 훗날의 백제 혜대왕(惠大王)이다.

 

그는 큐슈 다라국이 있던 아시카라(朝倉)에 와서 다치바나비리이하궁(橘廣庭宮)에 있었다.

구려의 광정궁이다.

571년에 성명대왕의 아들 용명천황이 구주백제왕이 되고 누이인 추고천황(推古天皇. 536~628)도

함께 일본에 건너와서 민달천황의 황후가 된다.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견람원(堅藍媛. 512~558)이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기다시(岐多斯)라고 읽었다.

중요한 사실은 추고천황 때에 견람원의 능을 새로 일본에 만들면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호칭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에 온 백제왕 후비에 대한 호칭이다.

즉 용명천황과 추고천황의 모후는 백제 왕비였다는 것이다.

 

582년, 민달천황은 즉위한지 12년에 자신의 일본 왕권을 강화하려고,

구주백제에 있던 신하 일라(日羅)불러서 독립할 방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구주백제왕이었던 용명천황의 신하가 미리 알고서 일라를 죽여버렸다.

그 후에도 민달천황은 포기하지 않고 신라와 임나가야에 사자를 보냈다.

또한 백제에서 전해주는 불교와 달리, 전통적인 신사 신앙으로 일본을 결집하려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여승들의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가두어두었다.

물론 일본 열도에 천연두 전염병이 돌아서 백성들의 인심이 매우 흉흉한 상황이었다.

 

585년에 민달천황이 죽었다.

그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전장 113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민달천황이 역병에 걸린지 5개월만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역병이란 일단 노출되면 한달 후에 30%가 죽고, 70%는 완쾌되어서 곰보 자국을 남긴다.

즉, 민달천황의 사후에 4개월 가량은 그의 죽음을 고의로 숨겼던 것이다.

대신에 구주백제왕인 용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내어 임나, 즉 큐슈를 잘 지키라고 전한다. 

민달천황의 부인인 추고천황은 백제에서 오는 자신의 형제들보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전위하고 싶어서 상을 감춘 것이다.

이때 추고천황의 아들인 죽전황자(竹田皇子. 562~596)가 23세였으므로 왕위를 이을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백제 혹은 구주백제에서 볼 때는 죽전황자보다 성명대왕의 아들들이 우선이었다.

 

 

 [2]. 혜왕(재위 598~599)

 

   혜왕(惠王540~599)은 이름이 계(季)이고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2년(599)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혜(惠)라고 하였다.

성명대왕의 왕자 혜대왕은 용명천황(用明天皇. 540~587)으로서 다치바나토요히(橘?日命)라고 하였다.

그는 큐슈의 귤광정성(橘廣庭城)에서 대화로 건너간 것이다.

그의 모후는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의 딸인 황태부인皇(太夫人) 기다시(堅藍媛)였고,

민달천황의 황후였던 추고천황의 동생이 된다.
민달천황과 용명천황, 추고천황은 각각 성명왕의 아들, 딸이다.

용명천황의 궁은 이케노베노나미츠키(池??槻宮)이였다. 


혜대왕이 571년 큐슈의 구주백제왕으로 부임했다가 민달천황의 죽음을 4개월만에 뒤늦게 듣고서,

큐슈에서 대화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에 아나호베왕자(穴穗部皇子. 543~587)가 같이 왔다.

아나호베황자를 황제황자(皇弟皇子)라고 했으니, 다음 즉위는 아나호베 왕자로 예정되었고,

그의 다른 이름인 스매이로네(須賣伊呂杵=聖明伊呂杵)는 성명천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이로(伊呂)는 마로(麻呂)의 반대말로 보인다.

 마로(麻呂)는 대형이니, 이로(伊呂)는 막내일 것으로 보인다.

 즉 성명왕의 막내아들이다.

 

아나호베(穴穗部)는 큐슈 안라국을 의미하니,

아나호베황자가 용명천황이 되는 혜왕자의 뒤를 이은 585년 구주백제의 새로운 왕이었다.

아나호베황자는 대화의 새로운 정복자로서 대화에 오자마자 민달천황의 황후인 추고천황을

강제로 범하려고 하였다.

추고천황에 대한 이러한 무례는 형사취수(兄死取嫂)하여 용명천황보다 앞서서

일본 천황이 되려는 기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추고천황은 그를 싫어하여 몸을 피해 빈소에 숨었고 민달천황의 충신인 역군(逆君)이 막아섰다.

아나호베황자는 추고천황이 용명천황의 동부동모 친동생이므로 더이상 무례하지는 못하고,

대신 그를 훼방한 역군(逆君)을 무고하게 참소하고 직접 쫓아가서 쏘아죽였다.

 

용명천황은 즉위 이 년도 안되어서 천연두에 걸렸다.

용명천황은 죽어가면서 불교에 귀의하고저 하였다.

민달천황의 죽음이 4개월이나 숨겨진 것과 달리 아나호베 왕자는 미리 알고 달려와서

천황 즉위를 서둘렀고 불상을 가져다 주었다.

흠명천황 때부터 불교를 모시던 소아마자숙녜(蘇我馬子宿?)는 불교 도입을 찬성했다.

그러나 민달천황의 유신들이 반대하였고 그중에서도 물부수옥대련(物部守屋大連)이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수하인 승해련(勝海連)이 기습적으로 살해되었다.

물부수옥대련(物部守屋大連)은 재빨리 몸을 피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하였다.

바햐흐로 대화조정에 내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87년 4월에 용명천황은 황위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였다.

성명천황의 3째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위덕-민달-용명)의 전설이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전해오는데 바로 이 용명천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재 전해오는 그의 후예들이 본래 임나(任那):큐슈(九州)에서 야마구치현으로 건너와서

본래 다다라씨(多多羅氏)를 사용하다가 대내씨(大內氏)로 바꾸었는데,

용명천황의 출신인 귤광정성이 본래 다라국지였던 것이다.


용명천황 다음으로는 황태제인 아나호베황자가 들어와 천황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불교를 반대했던 물부수옥대련은 아나호베황자의 즉위를 돕는 척하다가 암살을 시도하였는데

음모가 누설되었다.

이때 추고천황의 지시로 소아마자숙녜가 아나호베왕자를 주살하였다.

아나호베황자가 추고천황을 범하려고 했던 죄가 있고 추고천황의 경호였던 역군을 죽인 죄가 있었다.


그후 흠명천황의 아들인 숭준천황(崇峻天皇)이 스스로 천황이 되었다.

7월에 숭준천황을 중심으로 소아마자숙녜등은 물부수옥대련을 토벌하였다.

이때 토벌군 후미에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따라나섰다.
성덕태자가 어린 나이인 14살에 이마에 속발하고 물부수옥대련의 정벌군에 따라나섰다.


성덕태자는 [일본서기]에 용명천황의 둘째 왕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부왕의 상중인데 빈소도 지키지 않고 정벌을 나가는 것은 전혀 성덕태자와 맞지 않는 것이다.

즉, 용명천황은 죽지 않았고, 불교에 귀의하기 위하여 스스로 양위하고 아나호베황자를 일부러

불러들인 것이며, 용명천황의 아들 성덕태자는 반란을 평정하러 나선 것이다.

이 용명천황이 뒷날 백제대왕으로 복귀한 혜대왕(惠大王. 540~599)이다.

 

 

[3]. 법왕(재위 599~600)

 

법왕(法王)은 이름이 선(宣)<혹은 효순(孝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죽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


[수서(隋書)]에는 선을 창왕(昌王)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度僧.
크게 가물자 왕은 칠악사(漆岳寺)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올려 법(法)이라 하였다.

칠악사는 칠갑산이라고 한다.
법대왕은 아좌태자의 동생이 아니다. 

동생이라면 아좌태자보다 뒤에 구주백제왕을 지냈을 것인데 먼저 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부로 고려된다.

 

 

 

아좌태자와 의자왕, 서명천황 

 

일본 숭준천황(崇峻天皇. 530~592), 하쓰베노천황(泊瀨部天皇)

혹은 하쓰베와카사자키(長谷部若雀天皇)라하시노시바카키궁(倉椅柴垣宮)에서 다스렸다.

무령왕의 손자다.

 

587년, 백제 위덕대왕이 보낸 용명천황이 물러나고 아나호베황자가 죽고서,

일본 안에서 흠명천황의 아들인 숭준천황이 즉위하였다.

숭준천황은 민달천황(538~585), 용명천황(540~599)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용명천황의 막내동생이라는 [고사기] [일본서기] 기록은 모두 허위다.

 

그가 일본에 최초라는 법흥사(法興寺)라는 절을 세웠는데,

이는 법사군(法師君)이자 가의천황(袈衣天皇)이었던 흠명천황(欽明天皇)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는 흠명천황의 아들로 추정되는 것이다. 

즉 무령왕의 손자다.


[고사기/ 흠명천황기]에서 누카고노이라쓰메(糠小郞女)가 낳은 삼남매로서

가스가노야마다노이사쓰메(春日山田郞女)와 마려고왕(麻呂古王),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이 있다.

 

[일본서기/흠명천황기]에서는 이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의 기록이 아예 누락되어 있다.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은 소하씨(宗賀):(蘇我)에게 장가간 왕으로서, 흠명대왕의 아들인

숭준천황으로 추정된다.

 

[숭준천황기] 말미에 숭준천황의 부인으로 소아빈하상랑(蘇我賓河上郞)이 존재한다.

그가 소가노쿠라왕(宗賀之倉王):(宗賀-蘇我)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한다.

창기(倉椅)에 궁을 짓고 살았다는 사실도 소가의 창왕倉王(宗賀之倉王)에 어울리는 방증이 된다.

숭준(崇峻)의 숭(崇)도 소가(宗賀)에서 따온 것이 된다.

 

백제 위덕대왕은 이때 587년에 법왕(~600)을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백제 무대왕의 모후, 즉 법대왕의 왕비가 일본 큐슈에 살다가 643년에 서거한

 오오타마히메왕(大?姬王. 562~643)이다.

 

숭준천황 때에 다시 백제에서 들어온 불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숭준천황은 백제에 반기를 들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독주하는 가문인 소아씨 세력을 등에 업고서 대화를 충분히 장악하여 백제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590년, 숭준 4년에 그는 신라를 치고 임나를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신라 공격은 허위 사실이고 실제는 그 중간의 임나, 그 중에서도 큐슈 임나에 있는 이는

구주백제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2만 병사를 출병시켜서 큐슈 북부 축자국(筑紫國)에 정벌군을 보냈다.

그러나 구주백제왕 법대왕은 이들을 물리치고 일본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숭준천황의 구주백제에 대한 도전은 실패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대화조정을 다스린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었다.

 

구주백제에 패전하고서 일년후 숭준천황은 궁중에 진상된 산돼지(山猪)의 목을 자를 때에,

언젠가 생각하는 사람의 목을 치겠다고 하였다.

그의 배후였던 소아마자숙녜는 숭준천황의 본심을 의심하고 숭준천황을 암살했다.

4년이 흘렀고 패전을 겪으면서 서로의 인심이 틀어진 것이다.

 

소아마자숙녜는 아나호베 왕자와 숭준천황을 암살했지만 구주백제왕인 법대왕의 지시였는지

처벌받지 않았다.

백제 위덕대왕은 오사카 대화에 성명대왕의 딸인 추고천황을 세우고, 용명천황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일본의 상궁(上宮)에 거주하며 일본 황태자가 되어서 실제적으로 성덕태자가

대화를 지배하도록 하였다.

 

대신 구주백제왕은 법대왕에서 위덕대왕의 적자인 아좌태자(阿佐太子)로 교체하였다.

 

 

 

592년에 즉위한 추고천황(推古天皇. 536~628)은 토요미키카시키야히메(?御食炊屋姬)라고 불렀다.
그녀는 성명대왕의 딸이며 이복 오빠인 민달천황의 황후였고, 용명천황, 즉 백제 혜왕의 윗누이였다.

추고천황의 모후는 성명대왕의 황태부인(皇太夫人)이었던 기다시(堅藍媛)로서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의 딸이다.

 

일본 [원흥사연기]에서는 토요미키카시키야(等與彌氣賀斯岐夜)라고 했고

613년에  원흥사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추고천황 즉위 당시에 우헤노미야노우마야도노도요도미미(上宮廐戶豊聰耳)태자를

황태자로 하였는데, 백제 혜대왕이 되었던 용명천황의 아들이다.

추고천황을 세운 때부터 성덕태자는 대화의 조정을 모두 섭정하였고 만기를 위임받아

실제적인 왕권을 가졌다고 기록되었다.

성덕태자는 불교를 장려하여 신하들이 다투어 절을 지었다.

 

당시 구주백제왕이던 아좌태자는 큐슈 동북부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우좌팔번신사(宇佐八幡神社) 터의 우좌궁에 있었다.

 

이 지역의 성씨가 우좌씨(宇佐氏)와 일자씨(日子氏)인데,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시의 일자씨(日子氏)이고, 민달천황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씨(宇佐氏)였다.

본래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 시절 도읍은 오사다(譯語田),

즉 큐슈 오오이타현의 우사시(宇佐市)였고 우사씨(宇佐氏)를 남겼다.

그러나 이 우사시에 또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였던 것이다.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의 아들인 서명천황(舒明天皇. 593~660)대해

 좀더 밝히면 그의 시호는 능비에서 오기나가-대광액(息長帶廣額)이었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족일광액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대(帶)는 타라시라고 읽으라고 [고사기/서문]에서 저자 야스마로가 말했는데

이 대(帶)가 [일본서기]에서는 모두 족(足)으로 바뀌었다.

둘 다 우리말 다리와 관련된다.

그런데 [수서]에 기록된 서기 600년의 왜왕의 호(號)가 아배계미(阿輩鷄彌)이면서,

자(字)는 다라시북고(多羅斯北孤)라고 했으니 서명천황의 시호 족일광액(足日廣額)과 똑 같다.

또한 액(額)은 고대의 우리말 발음이 “아이”이고, 이는 아배(阿輩)의 당시 발음인 아히와 비슷하다.

계미(鷄彌)는 우리말로 닭미인데 일본에서는 서명천황을 다무라(田村) 황자라고 불렀었다.

즉 서기 600년에, 구주백제왕이었던 아배계미가 629년에는 일본 서명천황이 되고,

641년에는 백제 의자대왕이 된 것이다.

보충 증거로는 600년의 [수서] 기록에 나타난 왜왕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다.

 

[수서]에서 600년의 왜국왕비 이름은 계미(鷄彌)라고 하였다.

우리말로 닭미인데 추고천황의 딸로서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다미왕(多米王)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말로 닭(鷄)미왕이 다미왕(多未王)도 되고 계미(鷄彌)왕도 되고 다무라왕(田村王)도 되고,

그리고 다카라왕(寶王)=(닭라)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수나라에 간 사자가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으로 섬긴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대왕(
武大王)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서 아배계미는

백제 무대왕의 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의자대왕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원자(元子)라고 했는데,

이는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의 적장자로서 원자(元子)라고 주장한 것이 된다.

대신에, 의자대왕의 후비인 제명천황(齊明天皇)이 모정왕(茅渟王)의 딸이라고 했는데

바로 백제 무대왕(武大王)의 딸이었던 것이다.

의자대왕이 백제의 원자라는 사실은 또한 그가 위덕대왕의 동생인 민달천황의 손자가 아니라

위덕대왕의 적손자라는 것이니, 의자대왕의 부왕인 아좌태자,

즉 히코히토태자는 민달천황이 아니라 위덕대왕의 아들인 것이다.


아좌태자는 후손으로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우좌시에서 구주백제왕을 지냈다.

우좌시에는 흠명천황 때에 처음 광번(廣幡)이 나타났다.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백제로부터 광번(
廣幡)을 들고 왔던 것이고 큐슈 춘일시의

광정궁(廣庭宮國)에서 광번이 유래된다.

아좌태자는 추고천황의 딸인 다카라왕(寶王.?~618)과 결혼하였다.

이때 다카라왕을 다무라왕(田村王)이라고도 했으며,

그래서 그녀의 아들인 서명천황을 다무라황자(田村皇子)라고도 불렀다.

다카라왕의 또다른 이름은 누카데히메(糠代比賣)인데 누가데는 액전(額田)이라고도 기록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좌태자(572~598)는 부왕인 위덕대왕(~598)보다 며칠 먼저 죽었다.

 

아좌태자의 고분인 히코히토 태자 고분은 나라현의 법륭사 서쪽에 만들어졌는데,

후지노키고분(藤木古墳)이라고 부르며 원분인데 지름이 48m다.

 

도굴당하지 않아서 매우 많은 귀중한 장식품들이 나왔다.

금동제 마구류와 코끼리 장식, 봉황장식, 귀면 장식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옥구슬과 옥전대도(玉纏大刀)가 나왔고, 유체는 20세 전후의 남자였다.

능비에서 598년 11월 27일에 죽은 것은 확인되었는데 나이가 정확히 해독되지 않았다.

27세로 추정하고 있다.

위덕대왕은 12월에 서거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니

그보다 며칠 앞서 아좌태자가 죽은 것이다.

아좌태자의 부인인 보왕(寶王)의 고분도 역시 618년에 서거한 것만 밝혀지고, 출생년을 알 수가 없다.
오사카 태자정 관음총고분(
?音塚古墳)이라고 한다.

 

위덕대왕의 태자인 아좌태자를 민달천황의 태자라고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조작한 이유는,

서명천황을 백제 왕자가 아닌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런 조작이 아니면 일본 서명천황의 뿌리를 만세일계로 주장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592년 숭준천황이 죽고 추고천황이 즉위하니 구주백제왕으로서는 법대왕이 있고,

일본 대화조정의 황태자로는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있었다.

법대왕은 594년에 포로로 잡고 있던 대화의 장군 5명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591년 숭준천황의 큐슈 침공 때에 잡힌 장군들이다.


596년 위덕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적장자 아좌태자(阿佐太子)를 구주백제왕으로 보내어

법대왕과 교체하였다.

아좌태자는 큐슈에 가서 우좌시 팔번신궁(宇佐八-幡神宮)에서 다스리면서 일본의

추고천황을 만나러 갔다.

이때 성덕태자의 그림을 일본에 남겼다고 전하는데 현재 일본 국보로 되어 있다.


598년 11월말에 아좌태자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죽었다.

 

백제 혜왕은 아좌태자의 뒤를 이어서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武大王)을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으로 간 것도 추정이지만 확실하다.
무대왕의 아들 효덕천황이 큐슈에 남아 있다가 구주백제왕을 하고,

또 대화의 효덕천황(孝德天皇. 596~654)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대왕이 큐슈에 가서 세력을 심어놓지 않았다면, 그의 아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없는  일들이다.

또한 무대왕의 모후인 오오타마왕(大?姬王)이 길비황조모명(吉備皇祖母命)인데,

643년 9월에 일본에서 죽어서 나라현의 암옥산(岩屋山)에 묻힌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분은 한변 40m의 방분(方墳)이다.

물론 이는 백제 법대왕도 일본에 살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무대왕의 다른 이름이 무광왕(武廣王)이다.

 따라서 그가 구주백제왕으로 있던 곳은 후쿠오카현(福岡縣) 춘일시(春日市) 광정궁(廣廷宮)

가능성이 높다.

아좌태자가 죽은 다음 달 598년 12월에 위덕대왕이 서거하여,

동생인 혜대왕(慧大王: 용명천황)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혜대왕도 단 1년만에 서거하고, 위덕대왕의 막내 아들인 법대왕(法大王)이 즉위하였다.

백제 법대왕은 전국에 살생을 금하였다.

독실한 불자(佛子)였던 것이다.

 

법대왕이 백제에서 한왕(漢王):(안한천황으로 고려된다.)의 딸인 대고왕(大股王)과 결혼하여,

지노왕(知奴王. ?~618)을 낳았다.

 

무진주의 옛이름이 노지(奴只)인데 노지는 이 지노왕(知奴)를 뒤집은 것이다.

바로 백제 무왕이다.

무강왕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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