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6. 일본을 탈환한 개로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18

 

 

◈ 일본을 탈환한 개로왕 (재위 455~475)

 

 

 

개로왕(429~475)은 <삼국사기>와 달리 위대한 백제 왕이었다.
고구려에 빼앗겼던 일본을 다시 백제계로 통일한 왜제왕(倭濟王)이었고
중국에도 진출하여 백제의 거점을 양자강 북쪽에 확보하였다.

 

개로왕의 일본정벌

 

438년 7월에 백제계 반정천황(反正天皇)이 교토 북쪽 미야쯔(宮津)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백제 비유대왕의 태자 개로왕자(蓋鹵王子)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개로대왕은 스스로 왜제왕(倭濟王)이라고 칭하면서 일본 왜왕으로 즉위하였다.

반정천황과 개로왕의 궁터는 해부씨(海部氏)들의 신사인 농신사(籠神社)로 고려된다.

 

 

미야쯔시 농신사

 

개로왕자의 왜제왕 재위시에 [삼국사기]를 보면

눌지왕 때인 444년에 신라 경주를 포위한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개로왕자 왜제왕은 일본 동북방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할 때에 후쿠이현(福井縣)에 있었으며

여기서 계체천황을 낳았다.


[계체천황기]에 계체천황의 부왕이 그곳 후쿠이현 삼미국(三尾國)별업(別業)에서 진부인(振夫人)

미색을 전해 듣고 초대하여 계체천황을 낳았다.

그후 버림받은 진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체천황을 길렀다.

진부인(振比賣.434~485)의 고분에 쓰인 석곽은 배 모양(舟形) 석곽으로서 매우 크고 특이한데

후쿠이현의 족우산(足羽山) 산정고분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서 개로대왕은 여자를 많이 밝혀서 도미(都彌)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신하인 도미를 괴롭혔다.

 

[삼국사기]에서 도미부인 이야기에서는 도미 부인이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도미가 화를 입고 눈이 뽑혀서 배를 타고 떠났고, 도미 부인도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갔다가

고구려로 갔는데 이 천성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알 수 없는 지명이라고 했다.

천성도(泉城島)는 바로 오사카에 있는 지명이며. 고구려계 일본천황인 웅략천황의 고분이 바로 천성도에

있으니 당시 웅략천황의 수도였다.

 

[일본서기/웅략천황기] 7년의 기사에서 예의 도미부인은 다사(田狹)라는 장수의 부인이었는데 다사의 부인

자랑으로 그 미모가 알려졌다.

천황이 듣고 다사를 대마도의 관리인 임나국사로 보내고 부인을 뺐었다.

이 천황은 웅략이 아니라 왜제왕인 개로왕이다.

단, 임나국사 문제에 있어서, 실제 상황은 왜제왕인 개로대왕이 다사(田狹)에게 오사카의 고구려를 치라는

것인데, 다사가 오사카 천성도에 가다가 개로대왕이 자기 부인을 뺏었다는 만행 소식을 듣고 고구려에

귀순하고, 천성도의 고구려계 웅략천황으로부터 신라땅인 대마도의 관리로 임명된 것이다.

즉 개로대왕의 도미부인 이야기는 [웅략천황기]의 다사 부인과 똑같은 인물의 이야기다.

[웅략천황기]에는 이렇게 개로대왕의 이야기가 웅략천황의 이야기처럼 변조되어 실려있다.

개로대왕은 엄청난 정력가였던 것 같고, 변강쇠라고도 일컬어지는 가루지기전은 개로대왕의 이름자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으로 고려된다.

가루지기전의 상대인 옹녀도 개로대왕의 백제 수도였던 평양 출생이다.

개로나 가루는 칼의 고어 발음이다.

 

이어지는 [웅략천황기]기사에서 451년 개로대왕의 큐슈정벌이 나온다.

이는 [안강천황기]에 있는데 결론은 백제의 큐슈 남부 일부 회복이었다. 

광개토왕의 400년 대마도 정벌로 인해서 큐수가 임나일본부가 되어서 고구려계로 넘어갔었다. 

이 때 왜제왕의 일본 북부 회복의 공적이 송나라에 보고되니,

송나라는 451년에 왜제왕에게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책명을

내려주었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 계체천황의 계보가 나오는데,

응신천황의 아들로서 아신왕과 전지왕이 있고, 그중 전지왕이 비유왕과 개로왕을 낳았다.

 

<일본서기>에서는 응신왕의 아들이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의 아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의 아들

계체천황인데 [일본석기]와 서로 다르다.

개로대왕의 어머니는 모의도국조(牟義都國造)인 이사모라군왕(伊斯牟良)의 딸 구류히메(久留比賣命)라고

하였다.

모의도국은 황해도 예성강의 우잠군(牛岑郡)에 해당하고, 이사모라는 이천(伊川)에 해당하니,

지금 지명은 금천군(金川郡) 우봉면(牛峰面)이고, 이사모라는 그 동북쪽 지금의 이천군(伊川郡)

말하는데 토산군도 포함된다.

고구려 이진매현(伊珍買縣)이었고 토산군에 속했었다.

토산군의 서쪽에 예성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임진강(臨津江)이 흐른다.

 임진강이 고대 이천(伊川)이었다.

개로대왕이 고구려 장수대왕에 의해 비명횡사하였는데, 일본에서 개로대왕릉을 만들었다.

인릉(忍陵)이라고 하는데, 오사카(大阪府) 사조철시(四條?市)에서 발굴되었다.

전장 87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묘비에 429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죽은 것은 458년인데 이 해가 웅략천황을 굴복시키고

다시 백제로 돌아간 해이다.

 

 

인릉신사

 

한편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기사년己巳年(429년) 개로왕의 즉위 때에 미녀를 청하여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適稽女郞)을 데려왔다고 하였다.

427년은 비유대왕이 백제대왕이 되었고 개로왕은 429년생이니 기사년은 도무지 틀린 것이고

기묘년己卯年 439년으로 교정해서 보면 왜찬왕 반정천황의 서거 다음 해이므로,

왜제왕(倭濟王)인 개로대왕의 왜왕 즉위년도가 된다.

 왜제왕은 443년에 중국 송나라로 사자를 보냈다.

왜제왕이 개로대왕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뒤에 밝혀지는 왜무왕(倭武王.462~523)이 시마왕(斯麻王),

즉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인데, 그가 일본에서 왜무왕 자격으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증거가 들어있다.

국서 중에서 자신의 부왕이 개로대왕인데 이를 왜 제(濟)왕이라고 기록하였고,

동시에 475년 고구려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의 죽음을(奄喪 父兄), 부왕과 형들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즉 왜제왕이 개로대왕과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宋書》 臣亡考 濟……奄喪 父兄……申父兄之志……

 

개로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나와있다. 

 

自昔祖?,躬?甲?,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즉 개로대왕 때에 동정을 통해서 후쿠이현으로부터 일본 동북부의 모인국 55국을 정벌하고,

중이(衆夷) 66국을 정벌하고, 해북(海北) 95국을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중이는 중국을 말한다.

 

451년에 왜제왕(倭濟王)인 개로왕자는 미야쯔시(宮津市)로부터 큐슈의 안라일본부를 정벌하였다.

 

[웅략천황기] 9년 기사인데, 고구려 윤공천황은 신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사카의 고구려 왜국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고구려를 배반했던 신라인 안강천황의 큐슈임나일본부를 차마 처벌할 수가 없었다.

즉 [웅략천황기] 9년에 천황, 즉 왜제왕인 개로왕자가 큐슈를 친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때 개로왕의 신하들이 친정을 말리고 4인의 장수가 나섰는데, 장수 이름이 기소궁숙녜(紀小弓宿?)、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대반담련(大伴談連)、소록화숙녜(小鹿火宿?) 등이었으니

모두 백제 신하들인 것이다.

 

천황(왜제왕)은 말하기를

“신라가 신하로서 조공을 위반하고 몸이 대마도 밖까지 나와서 쥐새끼같은 발자국을 잡라(?羅)에까지

드러내고 백제의 성을 뺏었으니...천벌을 가하라!”는 것이다.

 

新羅自居西土,累葉稱臣,朝聘無違,貢職允濟.逮乎朕之王天下,投身對馬之外,竄跡?羅之表,阻高麗之貢,

?百濟之城.況復朝聘?闕,貢職莫脩.狼子野心飽飛,飢附.以汝四卿,拜?大將.宜以王師薄伐,天罰?行

 

큐슈 정벌 사유에 신라가 백제의 성을 뺏은 것이 들었으니,

이 교지를 내린 사람은 고구려계 윤공천황이나 웅략천황이 아니라 일본 북부의 왜제왕인

백제계 왜제왕, 즉 개로왕자인 것이 확실하다.


이때 451년에 신라 본토가 왜국에게 피침당한 기록은 [삼국사기/신라기]에 당연히 없다.

 

위 글에서 대마도 밖에 있던 잡라는 큐슈의 다라국(多羅國), 안라국(安羅國)을 통칭한다.

큐슈의 구마모토 북부 구루메시(久留米市)에 다라국이 있었고 안라국은 그 남쪽 녹천(綠川)

일성군(溢城郡)에 있었고, 김무의 아나호국(穴穗國)은 후쿠오카 서부 사와라구에 있었다.   

451년 왜제왕인 개로왕자의 4인의 장수들은 신라 큐슈의 여러 군을 약탈하고,

깊숙히 들어가서 녹지(?地)까지 점령하였다.

녹국(?國)은 본래 한반도 거제도의 구사가야(狗邪伽倻)지만, 이 글의 녹지(?地)는 큐슈에

세운 구록(口?)=(?), 즉 구려(句麗), 고구려를 의미하며, 구마모토시 남쪽 녹천(綠川)

익성(益城)과 관련된다.

익성은 윤공천황 아들들의 일성(溢城), 즉 이리성이었고 아소산을 낀 안라국지였다.

이때 개로왕자의 정벌에서 신라왕 김무는 녹지에서 겨우 살아서 도망하였다.

안라라국왕이라고도 했던 아나호왕 김무가 패주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큐슈의 병사들이 깊숙이 진격한 왜제왕의 4인의 장수를 다 물리쳤다.

 4인의 장수 중에 두 명이 죽고 일부 땅을 뺏었다.

 

[웅략천황기]에서는 이때 백제왕(바로 일본에 있던 개로대왕이다.)이 패전하고, 살아 남은 장수들을

불러서 장수들의 불화를 풀어주려고 장수들의 봉지를 확인해서 보여주겠으니 돌아오라고 했다.

 

於是, 百濟王 聞日本諸將 緣小事有隙, 欲觀國界. 請(命의 조작)垂降臨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에 큐슈에서 전사한 기소궁숙녜(紀小弓宿?)의 아들인 기대반숙녜(紀大磐宿?)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를 죽였다.

결국 개로왕자, 왜제왕의 큐슈 탈환은 거의 실패하였다.


신라왕자 김무가 안라일본부의 왕으로서 입장이 모호한 이때에 마침 453년 1월 윤공천황이 독살되었다.

[윤공천황기] 24년 기록에 천황의 국물이 응어리졌다고 하였다.

   御膳羹汁凝以作?

윤공천황이 먹는 국물 속에 독이 들었던 것이다.

 

453년 1월 윤공천황이 죽자, 신라에서는 80척의 선단으로 조문사를 파견하였다.

신라에서 천황 조문사를 보내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들은 대마도에서부터 곡(哭)을 하였고, 큐슈에서도 곡을 하였고

오사카의 난파항에 도착할 때는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복 작전은 철저한 위장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윤공천황의 태자인 목리경태자를 습격한 것이다.

이때 목리경태자의 군대는 카루-화살(輕括箭)이라는 구리촉의 화살을 사용했고

신라인들의 조문 대표인 안강천황은 아나호화살(穴穗括箭)을 사용했는데 철촉이었고

이후로 일본에서는 아나호화살이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의 김무 왕자는 제위 찬탈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한 것이었다.  

목리경태자는 김무 왕자의 조문 위장 습격을 당하여 신하의 집으로 숨었으나

김무 왕자는 추격하여 포위하였다.

 

《고사기》에서 당시 안강천황은 우박이 떨어질 때에 신하의 집에 도착하여 말했다.

“숙녜(宿?)들아, 가나(金)가 바다 건너 왔다”

 

須久泥賀, 加那 斗加宜...하략下略

(須久泥=宿?) (加那=金) (斗加宜=渡海)

 

두가이(斗加宜)는 도해(渡海)의 발음과 똑같다.

그러자 목리경태자를 보호하던 신하가 나와서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서 몸짓?으로 가나(詞那)에게 뜻을 전했다.

擧手打膝 “? 詞那(金) 傳” ....하략下略

신하들은 다음날 안강천황에게 투항하였다.

목리경태자를 죽였는지 고구려로 보냈는지는 알수 없는데 의통랑희가 먼저 떠났던

시코쿠(四國島)의 아이메현(愛媛?松山市?原)에 있는 카루노신사(輕之神社)의 전설에는 목리경태자와

의통랑희가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신라의 조문사는 대화에 무려 10개월을 머물렀다.

일본내 고구려계 도읍지에서 신라인 안강천황의 보위 승계 임무와 호위를 마치고,

10개월 후에 80척의 신라군이 돌아가면서 우네미산(畝傍山):(일본 천황 고분이 많이 있는 곳)에 들려서

새 소리를 듣고 노래를 하였다. 

“우니미-하야, 미미-하야 / 宇泥?-巴椰, 彌彌-巴椰”

우는 소리가 참 좋다! 귀에(耳耳=彌彌) (듣기) 좋다!(巴椰=好也)는 뜻이다.

윤공천황 아들인 웅략천황이 이 노래를 듣고 이들 신라인을 잡아다가 황실의 우네미(采女)

몰래 건드리지 않았냐며 시비하여 고문하고 돌려보냈다.

안강천황은 신라 군대의 호위 없이 왜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오오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408~454)를 죽이고 부인을 빼앗아 황후로 세웠다.

오오쿠사카 황자는 인덕천황의 막내아들이었고,

그의 부인은  윤공천황의 장녀로서 오사다노오이라쓰메(長田大郞皇女.418~462)였다.

또 죽은 오오쿠사카 황자의 딸은 웅략천황에게 시집보냈다.

윤공천황의 장녀를 김무의 황후로 세운 것은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과 윤공천황 신하들의

지지가 김무 왕권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강천황은 바로 그 오오쿠사카 왕자의 어린 아들에 의해 3년만에 암살당했다.

신라인 안강천황의 후예는 공왕부수(孔王部首)라 하였는데 그 뒤는 알 수 없다.

 

[신찬성씨록] 孔王部首 穴?天皇《謚安康》之後也

그러나 안강천황의 동생이 미에현(三重縣)에 남아있었다.

 

[신찬성시록]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그리고 큐슈 사와라의 김무성(金武城)에 그 후손들이 전해져 왔다.


윤공천황의 시노산(市野山) 고분은 230m의 전방후원릉이고,

안강천황의 고분은 모호한 상태이나 제사는 봉래신사(蓬萊神社)에 모셔져 있다.

안강천황 묘비는 최근에 사이다마현(埼玉縣) 관원고성(菅原古城)에서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 주인을 알수 없던 330m 길이의 하내대총산(河?大塚山) 고분에서

윤공천황의 묘지문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내대총산 고분이 본래 윤공천황릉이 되고, 이제까지 윤공천황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안강천황릉으로 고려된다.

현재 윤공천황릉은 시노산(市野山)고분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읽으면 시야산 고분이고

신라산이 되니 이는 신라 눌지왕의 왕자 김무 안강천황 신라산 고분이 합당하다.

 

457년, 개로대왕 때에 중국 송나라에 보내졌던 백제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이 있다.
청령천황이 된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와 동일인물로 고려된다.

453년, 개로대왕의 백제대왕 즉위 직후에 좌현왕, 우현왕 등이 이미 존재하는데 여기서 좌현왕은 일본을,

우현왕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하는 대백제 연합체제로 추정된다.

왜제왕(倭濟王.443~458), 개로대왕(蓋盧大王.456~475)은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했는데

중국에도 백제 영역을 넓혀나갔다.


458년 일본에 친정해서 웅략천황을 치기 전에, 개로대왕은 이미 중국에도 열한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중국 땅을 경영하였다.

458년에 개로대왕이 중국에 보낸 백제 장군은..... 관군장군우현왕 여기(餘紀),

정로장군좌현왕 여곤(餘昆): 일본 청령천황이 되었다.

정로장군 여훈(餘暈)

보국장군 여도(餘都):(백제 모도대왕이 되었다.)

보국장군 여예(餘乂)

용양장군 목금(沐衿)

용양장군 여작(餘爵)

영삭장군 여류(餘流)

영삭장군 미귀(미貴)

건무장군 우서(于西)

건무장군 여루(餘婁) 등 11명이다.

 이들 11명의 장군이 중국 땅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464년 경부터 송나라가 말기적 증세를 보였고, 각 지방에서 송나라 장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회수(淮水) 북쪽 땅을 잃고서 찾지 못했으며, 그 땅은 북위(北魏)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의 뿌리 부분인 청주(靑州)와 산동반도 남쪽 경계 동양성(東陽城)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동쪽인 청도시(靑島市) 동쪽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문등군, 동래군, 성양군 등 해안과 도서(島嶼)지역에서 위에 적힌 11명의 백제 장수들이 나와서

경영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또한 490년 모대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 내용에는

개로대왕이 465년에서 471년 사이에 백제의 3장군을 추가로 중국에 내보냈다.

송나라가 위나라에 잃은 회북(淮北)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건위장군、광양태수、겸 장사신 고달(高達),

건위장군、조선태수、겸 사마신 양무(楊茂)

선위장군、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이미 송나라에 있었다.

 

개로대왕은 471년에 관군장군 불사후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장무(張茂)

북위국에 사자로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황해도 봉산(鳳山)에 묻힌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고분은 468년에 만들어졌는데,

위에 나온 대방태수 장무의 부형(父兄)일 것이다.

이들이 중국에서 차지했던 지명은 488년과 495년에 중국 제나라(南齊國)에 보낸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의 국서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 때인 488년 겨울에 북위국(北魏國) 산동반도의 백제를 쳤다.

산동반도의 백제군은 북위국의 수십만 대병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겨서 산동반도를 수호하였다.

모대대왕은 북위군(北魏軍)을 격파하고 나서 승전한 백제 장수들을 승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 10년 488년에 위(魏)나라가 백제를 치러오다가 패하였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제서(齊書)]에도 이 부분의 백제 기록이 파훼되었는데 남아있는 부분은 모대왕이 남제국(南齊國)

올린 국서 내용이다.

“노고에 보상하여 이름을 길이남긴다.

영삭장군신 저근(姐瑾) 등 4인이 충효를 다하여 국난을 막았다....

이 4인의 장수에 대하여 임시책명을 정식으로 황명을 내려 책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을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를,,,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餘歷)을,,,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餘固)를...건위장군, 불사후로 책명을 바랍니다.

이들 4명은 488년에,,,산동반도에 있다가 서북에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백제 장수들이었다.

 

490년에 모대대왕은 여기에 더하여 3장군을 산동반도에 보냈다.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신 고달(高達),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신 양무(楊茂)

행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송나라에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나의 신하로 봉사중이다.

 比使宋朝,今任臣使

그러한 선례에 따라서 이 장군들에게 새로 제나라의 책명을 바란다. 

광양태수 고달(高達)은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조선태수 양무(楊茂)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참군 회매(會邁)는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남제 무황제(武皇帝)는 모대왕이 열거하고 원하는대로 백제의 세 장군들에게 군호를 내리고

중국의 태수로 임명하고, 모대대왕을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봉하였다.

 詔可,竝賜軍號,除太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東大將軍.

그리고 사자를 백제에 파견하여 모대대왕에게 조부 모도대왕을 세습하여 백제왕이라는 책명을 주고

인장과 인수, 옥부, 동부, 호부, 죽부 등 여러가지 선물을 하였다.

(여기서 모도대왕은 망(亡)자가 없으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는 일본에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한편 [남제서]에는 이때 490년에 다시 북위 수십만이 2차로 백제를 공략했으나 모대왕이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우나(木干那) 등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고 기록했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衆 襲擊虜軍,大破之.

 

495년에 모대대왕이 다시 보낸 국서에서는

“490년, 경오년에 북위 선비 오랑캐가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반격하게 하였다.

해일처럼 쓸어버리고 달려 추격하여 베어버리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

목우나(木干那)는 광위장군, 면중후


그리고 다시 파견한 장군은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신 모유(慕遺 )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신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겸 참군신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 등 4명인데 이들을 정식으로 책명해 달라는 모대대왕의 주청을

남제 명황제(明皇帝)는 다 들어주었다.

 

선비족 척발씨(拓跋氏)의 위나라(北魏)는 386년부터 534년까지 존재하였고, 439년 북조(北朝)

통일하였는데 당시 척발씨 북위(北魏)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남제국(南齊國)

[남제서(南濟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위와 같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중국에 생겨나고 최후에 사라진 백제 진평군(晉平郡)

하북성 형수지구(衡水地區)와 보정지구(保定地區)의 경계인 안평현(安平縣)이다.

서남쪽에 진현(晉縣)도 남아 있다. 

백제 요서군은(遼西郡)은 하북성 노룡현 북쪽 천안현(遷安縣) 영지성(令支城)에 있었다.
백제 구이대왕(234~238)의 직함이 위영지령(
魏令支領)으로서 오래전부터 백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385년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취하였으나 그해 말에 후연(後燕)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개로대왕 때에 다시 요서를 찾은 것이다.

 

광릉태수(廣陵太守)의 광릉군은 산동성 아래 회하(淮河) 남쪽 회계산(淮稽山) 유역이다.

청하태수(淸河太守)의 청하군은 제나라가 있던 곳으로 하북성 형수시 남쪽 황하 주변의 청하성이다.

광양태수(廣陽太守)는 북경시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385년에 북경을 취하여 13군 태수를 두었었으나 389년에 후연에 빼앗겼었다. (유주자사 진묘)

성양태수(城陽太守)의 성양은 산동성 산동반도 남동해안 청도시(靑島市)에 있었다.
동청주(
東靑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했으니

백제가 오래도록 보전하였으며 백제왕이 있던 곳이다.

조선태수(朝鮮太守)는 하북성 진황도시 비여현(肥如縣)에 있었다.

하북성 노룡현의 30리 북쪽이다.

수나라 때 대방태수(帶方太守)는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

 

위에 적힌 9군, 진평군(晉平郡), 요서군(遼西郡), 광릉군(廣陵郡), 광양군(廣陽郡), 청하군(淸河郡),

낙랑군(樂浪郡), 성양군(城陽郡), 조선군(朝鮮郡),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의미를 타당하게 고려하건대

시간적인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 8명의 백제 태수가 가장 최전선이라고 보면 북청주(北靑州) 7현, 제남군(齊南郡) 5현, 낙안군(樂安郡) 3현,

고밀군(高密郡) 6현, 평창군(平昌郡) 5현, 북해군(北海郡) 6현, 동래군(東萊郡) 7현, 동모군(東牟郡) 1현,

장광군(長廣郡) 4현 등 산동의 44현이 역시 백제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대대왕 때의 중국내 백제 자치군은 최소 15개군 이상이다.

대체로 회하(淮河)에서 제하(齊河)까지 태산(泰山) 이동의 산동반도를 소유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 많은 백제자치군이 중국 사서에 올바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북연왕 풍홍처럼 중국에 황제로서 자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백제로부터 통치를 받는 자치군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체적으로 25개군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송나라가 망하고 남제가 서는 변혁기에, 개로대왕이 11명의 장수를

서쪽으로 보낸 458년 이후로부터 백제 장수들이 활발한 대륙 경영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정말 위대한 개로대왕이다.

근개루대왕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백제가 488년과 490년에 산동반도에서 북위군을 연파한 것은 고구려의 살수 대첩 이상의 대첩이다.

특히 이는 내지에서가 아니라 점령지에서 싸움이기 때문이다.

 

454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이후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
訥祗王)은 응원군을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였다.

 

일본의 고구려계 웅략천황은 백제 개로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청하여 시집온 백제 공주를 457년에

나무에 달아서 불태웠다. 
458년, 개로대왕은 딸이 웅략천황에게 극형으로 죽었으니 분노하였다.
개로대왕은 즉시 친정(
親征)에 나서서 백제에서 달려갔다.


미야쯔(宮津) 해안에서 교토(京都)를 거쳐 순식간에 오사카(大和):(大阪)로 진격하였다.
나라현(
奈良縣) 갈성산(葛城山)으로 도망치던 웅략천황을 협곡에서 포위하여 끝내 마주하였다.
웅략이 화살로 반격하였으나 15살의 어린 곤지왕자가 나서서 토벌하였다.

이 사실을 “등에
?가 개로천황의 팔을 물고, 잠자리??가 날아와 등에를 잡았다”고 시가(詩歌)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등에?는 웅략천황이고 잠자리??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昆支王)으로서 뒤에 왜흥왕(倭興王)

되었고, 청령천황(淸寧天皇:??: 제위444~484)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시가는 매우 어렵다. 끝의 일부만 해석한다.

“고구려 웅략의 깃발을 쫓아와서, 마침내 만났는데 곤지왕자가 빨랐구나
은국(
隱國) 일본 위에 나의 어검이 거침없이 아름답다.
왜국이라는 말이 오래되었으니 아기쯔시마로 국호를 바꾸노라.“


(원문) 다고모량이(多古牟郞爾=다카무라高牟良=雄川=許母理=koma)  ; 고구려

아모가기도기(阿牟加岐都岐[阿牟=幼武=雄略] ; 유무(웅략)의 깃발(牙旗)을 쫓아와서

회노아모원(會能阿牟袁) ; 유무를 마침내 만나니

아기두파야구비(阿岐豆)=(昆支=??)波夜具(=速)比 ; 곤지가 빨랐구나.

가구노기도(加具能碁登)  ; 숨은(隱) 나라터(碁=은국隱國=일본) 위에

나이오가모도(那爾?波牟登) ; 나의 어검(御矛)도

소라미도(蘇良美都) ; 거침없이 아름답다.

야마도노구이표(夜麻登能久爾表) ; 왜라는 이름이 오래되었으니

아기두지마도포(阿岐豆志麻登布) ; 아기쯔시마(청령도)로 국호를 바꾸노라.

 

웅략천황은 개로대왕 앞에 무릎꿇고 빌었다.

 “누구이신지?”

 “현인신(現人神)이다. 네 이름을 먼저 말하라.”

여기서 현인신은 현신(現神)을 의미하고 현신은 아기쓰카미로 발음한다.

이 아기쓰는 잠자리의 한자인 청령??과 같은 발음이니 고대로부터 일본 열도 모습을 형상한 말이다.

일본 열도가 잠자리처럼 생겼기에 왜국을 아기쓰시마(??島)라고 불렀었다.

즉, 청령도의 신이라고 한 것이니 개로대왕은 스스로 일본 열도의 왕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웅략천황은 “저는 와카무(幼武)라고 합니다.”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웅략천황의 이름은 고무(高武)인데 반대말인 유무(幼武)로 낮춘 것이다.

“나는 히토코노누시(一言主神)다.”
개로대왕 일언주신(
一言主神)은 일사주신(一事主神)이라고도 하였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히토코노누시는 계체천황의 부왕인 히코누시
彦主人과 동일인이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서는 한사왕(汗斯王) 이라고도 하였다.

한왕(漢王), 또는 한성왕(漢城王)이라는 뜻이다.

개로대왕의 도읍은 대동강의 한성이었다.


[고사기]에서 웅략천황과 그의 백관은 이때 천황 복식과 관복을 벗기우고 무기를 받쳤다고 하였다.

확실하게 항복한 것이다.

즉, 왜국이 개로대왕을 섬긴다는 뜻이고 웅략천황이 왜국을 받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을 다시 통일하여 완전히 발 아래에 둔 개로대왕은 그 존호를 높여서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계 마지막 천황이었던 웅략(雄略)이라는 시호의 의미는 웅조(雄朝), 고구려 왕계가

이제 끝(略)이 났다는 뜻이다.
웅략 4년 이후에 [웅략천황기]의 천황은 더이상 웅략천황이 아니니 백제계 천황이다.

[웅략천황기]의 일부인 7년, 8년, 9년 기사는 개로대왕의 기록이고, 그후로는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 청령천황(444~484)의 기록이다.


개로대왕의 《인릉(忍陵) 비문》에 의하면 458년에 일본을 떠난 것이 된다.

 이때 개로대왕은 곤지왕자를 데리고 귀국하였고, 또한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 ?~483)도 평양으로 데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461년에 곤지왕자를 일본 왜흥왕으로 내보냈는데, 이때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을

임신한 부인이 일본으로 따라왔다.

바로 반풍황녀다.

그녀는 딱 한 번 남자와 교합하여 여자의 도를 알았고, 그 한번에 임신하여 이상했지만,

이후로 평생 남자와 교합을 원치 않았다.

 

458년, 15세에 웅략천황을 사로잡은 곤지왕자는 백제로 돌아갔다가 461년에 다시 일본으로 왔는데

18세에 왜흥왕이라고 하였다.
458년부터 일본의 수도에 남아 왜왕의 지위를 누려온 도미 부인의 아들 성천황자(
星川皇子)

성문을 걸어 잠그고 곤지대왕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곤지대왕은 성을 태워버리고 성천황자를 죽였다.

이때 곤지왕자는 개로대왕비와 동행하였는데, 그녀는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로서

임신중이었고, 무령대왕을 일본에서 출산하였다.

반풍황녀의 궁은 갈성(葛城)의 아름다운 각자궁(角刺宮)이었다.

지금 각자신사(角刺神社)로 남아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당시에도 각자궁을 한번 구경하는 것이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다만 각자궁(角刺宮)은 부라궁(夫羅宮)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곤지대왕은 청령천황이 되어서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에 미카쿠리(甕栗宮)을 지었다.

왜제왕 즉, 개로대왕의 부인이었던 반풍황녀를 백제식으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봉하였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의 비인 갈성한원을 황태부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왜제왕의 부인인

반풍황녀를 황태부인으로 봉한 것의 오기이다.

갈성한원은 황태부인으로 봉하지 않아도 황후이다.


곤지대왕 청령천황은 부하장수를 시켜서 웅략천황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였다.

웅략 7년의 기사에서 미모로신(三諸岳神)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고무(高武)에서 고뢰(高雷)로 바꾸도록 하였다.

뢰(雷)의 발음에 “이가스시”가 있는데 [신찬성씨록]에서 다케하라(竹原連)는 신라국 아라라국왕의 동생

이가쓰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아라라국주는 안강천황을 가리키는데 신라왕자지만, 윤공천황의 양자였는지 웅략을

그 동생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이가(伊賀)는 미에현(三重縣)에 있고 그 중심성은 우에노성(上城)이다.

웅략천황(418~479)이 오사카에서 쫓겨나서 여생을 마친 곳으로 고려된다.


청령천황은 웅략천황이 죽자 안강천황을 따라왔던, 신라의 또다른 왕자로 추정되는

조일랑(朝日郞)을 공격하였다.

웅략이 이름을 바꾸어 은거했던 이가(伊賀)의 청묘(靑墓)에서 싸워 죽였다.

조일랑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서 낭자왕의 후예로 고려된다.

대가랑, 가랑성 등은 신라국 낭자왕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신찬성씨록] 大賀良 新羅國?子王之後也     

 

[신찬성씨록] 賀良姓 新羅國?子王之後也


468년, 백제 개로대왕은 거꾸로 고구려 남변을 침범하였는데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예성강의 평산 한성에서 나라를 정비한 백제가 대동강 동북부까지 일부 수복한 것이다.

비유왕 때에 이미 평양 서쪽 서하군에 진출했었다.

이후 백제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병력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북한산성은 안학궁 대성산성이다.

쌍현성은 동해안 금야강의 영흥이다.

구천성(仇天城)으로 추정되는 순천군(順川郡) 은산(殷山)은 숭산(崇山)에 있는데 숭산의 북쪽까지

개로대왕이 방죽을 쌓았다.

개로대왕의 청목책은 이제까지의 희천군 읍성 아래 대추령(大楸嶺)으로 추정된다.

쌍현성은 무령대왕(武寧大王) 때에도 한북(漢北) 사람을 동원하여 다시 쌓았다.

 

이무렵 개로대왕은 부왕인 비유왕의 묘를 호사하게 꾸미기 위해 욱리하(郁里河):(비류강, 대동강 중류)에서

대석을 날라오고, 강을 따라 나무를 심어 방죽(緣河樹堰)을 쌓았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까지로 되어 있다.

사성(蛇城)은 평양 북쪽 평성시 사현(巳峴), 사천(巳川) 부근으로 고려된다.

숭산은 성천 위례성으로 고려된다.

사성(蛇城)은 책계왕 때에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수리한 기록이 있었다.

한편 계체천황의 모후였던 개로왕의 부인 진히메의 석관은 후쿠이시 산정고분에서 발굴되었는데 

배(舟) 모양이다.

 

 


후쿠이시 주형석관

 

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성(悉直城)을 공격하였다.

이후에 신라는 하슬라주 사람으로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실직은 강원도 삼척 땅이고, 하슬라는 강릉 땅 명주군이며 니하는
동해안 영흥의 용흥강이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대왕(長壽大王)은 3만의 병력으로 남하하여 476년 정월에는 백제의 수도인

개로대왕의 대산한성과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대왕을 아차성(阿且城)에 끌고가서 참살하였다.
이 아차성은 서울의 아차산성(
峨嵯山城)으로 알려져 왔으나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의 읍성이던

아단성(阿旦城)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고구려가 백제 북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이어 개로대왕이 있던

남성을 공격하여 서쪽으로 도망치던 개로대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북성은 북한산성이던 안학궁이고 남성은 한성이다.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 20년조에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개로대왕의 을묘년475년에 맥(貊), 즉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치고,

칠일만에 왕성(王城),즉 한성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위례성까지 잃었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의 국왕과 왕비, 왕자들이 고구려적에게 떼죽음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북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 즉 대산한성(大山漢城)이고 남성은 한성인데 성천의 위례성도

함께 잃었다고도 하였다.
다시 대동강 이북을 완전하게 고구려가 장악한 것이다.
이제까지 백제는 광개토왕에게 밀려나 남천하였던 아신왕 이후에 다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百濟記云,蓋鹵王乙卯年冬,貊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遂失尉禮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

 

 

개로대왕 후손도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11월 1일에 있었다.

 0468 Nov 01 00:47 A 89 0.076 0.923 10.9S 165.6E 86 293 10m34s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고구려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표(表)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는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


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北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爾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爾)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사론(史論):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걸루(杰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임금을 결박하여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이르기를

“그러면 오자서(伍子胥)가 영(逞)에 들어가서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어떠한가?” 하니,

 

이르기를

“양자법언(楊子法言)에 이를 평하여 ‘덕(德)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것은 인(仁)과 의(義)일 뿐이니 자서(子胥)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짊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걸루 등의 의롭지 못함은 명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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