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사비성시대 성왕 (재위523~554)
성왕(聖王)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일본 흠명천황(510~591)의 형이다.
성왕(聖王)은 이름이 명화농(明禾農)이고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성왕이라 하였다.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이때 패수는 동해안 패수로 고려된다.
금야강이다.
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2년(524)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지절(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3년(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4년(526) 겨울 10월에 웅진성(熊津城)을 수리·수선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
527년, 계체천황 21년에 백제 무령대왕이 서거한 것을 이용하여 계체천황은 오사카 대화(大和)의 군력을
모아서 백제에 맞서기 시작했다.
계체천황은 먼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에게 6만의 군대를 주어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와
녹기탄(?己?)=(거제도巨濟島)을 쳐서 일본 임나에 합병할 생각을 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큐슈 북부의 축자국(筑紫國. 후쿠오카福岡)의 수장인 반정(磐井)이 근강모야신을
돕지 않고 중간에서 훼방을 하였다.
화국(火國): 나가사키(長埼縣), 풍국(豊國):오오이타현(大分縣)이 축자와 연합하였으니
큐슈 북부는 계체천황과 다 반대편에 선 것이다.
위의 세 나라는 백제가 지배하는 큐슈 중남부 안라(安羅)의 이웃으로서, 백제의 눈치를 본 것이다.
계체천황은 축자의 반정(磐井)을 치도록 물부추록화대련(物部?鹿火大連)에게
부월(斧鉞)을 잡아주며 명령하였다.
축자국을 이기면 축자이서(筑紫以西), 즉 큐슈를 그에게 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즉 축자 아래의 구주백제까지 없애주기를 바란 것이다.
축자의 반정(磐井. 475~528)은 528년에 가까스로 토벌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물부추록화대련(物部?鹿火大連)이 축자를 지배한 기록이 없으니,
반정은 죽었어도 그 땅이 왜국 땅이 되지는 않았고 다음 기록으로 보면 백제 땅이 되었다.
오히려 529년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은 계체천황에게 근강모야신이 이미 건너가 차지하고 있는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鎭)을 요구하였다.
이는 거제도(巨濟島) 남단 구조라 남쪽의 다대포(多大浦)로 고려된다.
그 이전까지 백제는 남해도(南海島)의 미조면(彌助面)=(美佐岐)을 주요 교통로로 사용하였다.
계체천황은 굴복하여 다사진(多沙鎭)을 구주백제에 내준다고 약속하였다.
큐슈에서 대화조정의 원정군이 구주백제군에게 패전했던 것이다.
이때 안한천황은 큐슈의 축자에서 물부추록화대련을 물리치고, 큐슈에 광국(廣國)을 만들었다.
광국(廣國)은 축자국(筑紫國)=(복강현福岡縣)과 풍국(豊國):대분현(大分縣),
화국(火國):장기현(長崎縣)을 합친 것이다.
백제 큐슈 광국의 수도는 지금 후쿠오카(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 춘일신사(春日神社) 위치다.
훗날, 흠명천황의 광정궁(廣庭宮)과 황극천황의 미경궁(味經宮)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천지천황(天智天皇)은 장진궁(長津宮)으로 고쳤다.
안한천황은 이 광국(廣國)으로부터 다시 오사카 대외조정을 향해 역으로 진격하였다.
그동안 신라에게 압박을 받아오던 금관가야는 거제도의 근강모야신에 의지하였고
다사진을 백제에 준다는 것에 반발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 구사모라(久斯牟羅):(구조라)에 성을 쌓고 2년 동안 머무르면서
백제에 다사진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신라는 대마도 임나를 공격하였다.
근강모야신은 웅천(熊川)=(마산馬山)에 건너가서 신라를 탓하였다.
그러자 신라 진흥왕은 장군 이사부와 군사 3000을 웅천(마산)에 보냈고,
놀란 모야신은 급히 거제도로 후퇴하였다.
금관가야는 2년 동안 거제도를 점거 당하고 도움되는 것이 없으니,
근강모야신에게 실망하여 대화조정에 근강모야신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여의치 않으니 백제와 신라의 군사를 요청하였다.
백제군이 와서 근강모야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근강모야신이 거제도의 성을 잘 지켜서 버티어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 의하면
531년 3월 백제군이 안라(安羅)로 나아가 걸둔성(乞屯城)에 주둔하였다.
取百濟本記?文.太歲辛亥三月, 進至于安羅, 營乞屯城.
[일본서기]는 乞屯을 脚下宅로 읽으라고 하였다.
각하타(脚下宅)는 다리하라, 혹은 아시카라로 읽어지는데 다라국의 아스카라(朝倉)가 된다.
큐슈 조창군(朝倉郡)에는 귤광정궁(橘廣庭宮)이 있었다.
즉, 구려(橘), 고구려의 광정궁인 귤광정궁이 있었던 것이다.
안라는 큐슈안라, 즉 구주백제의 중심이며 윤공천황의 성장 중심이었다.
이제 백제군은 거제도 공격을 멈추고 대화조정을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
구마모토로 상륙하여 귤광정궁에 있었던 것이다.
함안의 아나가야에는 신라의 소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 기록은 한반도 안라가 아니니,
걸둔성이 조창군(朝倉郡)이기 때문이다.
백제 군대가 건너왔다는 소문만으로,
이때 531년 2월 계체천황은 자신의 태자와 황자 모두가 한꺼번에 살해당했다.
이는 《일본서기》에 숨어있는 아래의 한 줄의 기록이다.
“또 듣기에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 등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훗날 깊이 따져 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 後勘校子 知之也”
이는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이 531년, 새로 큐슈에 온 백제군을 이끌고 오사카 대화조정을 공격하려고 하니,
대화조정이 먼저 선수를 쳐서 계체천황을 죽이고 환영한 것이고 안한천황의 군대는 저항없이 대화조정에
입성하였다.
이후에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이 살아남는다.
계체천황 일가를 살해한 것은 대화의 성 안에서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된다.
근강모야신은 구주백제 안한천황의 공격을 받는 계체천황을 구출하러 거제도에서 철수하였는데,
도중에 임나에서 죽었다.
개로대왕의 서장자인 계체천황(繼體天皇)=(450~531)은 백제에 대항하여 옹립되고,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근강모야신을 출병시켜서 도전하였으나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계체천황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226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신찬성씨록]에서 고시촌주는 백제국 호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古市村主 村主 出自百濟國虎王也
고시촌에 안한천황 고분이 있었다고 전하여 왔으니 안한천황이 백제 호왕(虎王)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계체천황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왜왕은 안한천황(安閑天皇. 466~532)이니 백제 무령대왕의 동생인
사아왕(斯我王)이다.
그의 시호는 광국압건금천황(廣國押建金日命)이다.
그의 시호에 들어간 건금(建金)은 금(金)을 건설했다는 것인데, 바로 지금의 큐슈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되찾은 것이다.
이곳은 고구려 윤공천황 이래로 안라일본부가 있던 곳이다.
당시 백제 수도 금강의 웅진성(熊津城)에 금강이 흐르는데 금강이 본래 곰강이 변한 말이다.
즉 금(金)은 곰의 차자이다.
사아왕은 큐슈 중심부의 안라국을 되찾아서 곰한성(熊本城)을 세우고 백제 분국으로 만든 것이다.
웅본 쿠마모토의 배경이 바로 금봉산(金峰山), 곰산이다.
안한천황(安閑天皇)이라는 시호도 안라왕, 아나왕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일본 천황까지 되었다.
그러나 안한천황은 자식이 없었고, 이미 노쇠하였다.
사아왕(斯我王)은 자손이 없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교토 동북방의 사가현(滋賀縣)을 사아현(斯我縣)으로
불렀는지 시가현(滋賀縣)의 옛이름 중에 사아현(斯我縣)이 들어있다.
옛 백자국이다.
사아왕 안한천황이 오사카의 대화 천황이 되니,
구주백제의 왕으로는 백제 동해안으로부터 선화천황(宣化天皇. 467~539)이 옮겨갔다.
그도 역시 무령대왕의 동생이었다.
그의 시호는 무소광국압순천황(武小廣國押盾天皇), 혹은 건소광국압순천황(建小廣國押盾天皇)이라
했는데 순(盾)은 다데라고 읽으니 다라국의 왕이었던 것이다.
소광국(小廣國)은 귤광정궁(橘廣庭宮)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531년에 백제군을 끌고서 큐슈로 온 장수가 선화천황이다.
즉 대화조정에는 안한천황이 서고, 큐슈 다라국 귤광정궁에 있던 선화천황은 구주백제왕으로 있었다.
선화천황(宣化天皇. 467~539)은 동성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의 딸을 정비로 내세웠다.
그는 일본의 각 항구에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저장하였다.
532년에 신라가 임나의 금관가야를 멸망시켰으므로,
백제는 임나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서 축자에 거점을 마련했다.
바로 후쿠오카의 춘일시(春日市)다.
무령대왕의 아들 사귀왕(斯貴王)이 535년 선화천황이 규슈로부터 오사카 대화의 천황으로
떠나간 뒤에 구주백제왕이 되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의 춘기광정궁(春岐廣庭宮)에서 큐슈를 다스리다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대화로 가서 흠명천황(欽明天皇)으로 즉위했다.
그가 후쿠오카 춘기광정궁에 있었던 사실 때문에
그의 시호가 아마노쿠니오시하루키비리이하(天國排-春岐廣庭命)이 되었다.
춘기광정국은 나중에 춘일신사(春日神社)가 된다.
무령대왕 때에 큐슈 임나 중남부가 백제로 병합되고, 성명대왕 때에 안한천황으로 인하여
큐슈 임나 전체가 백제 땅이 되고, 일본도 백제계로 다시 통일된 것이다.
나라현(奈良縣) 회외사(檜?寺)에 선화천황의 궁터와 사당이 있다.
선화천황의 후예인 화수왕(火穗王)은 시히라군(志比陀郡)의 선조였다.
선화천황의 이름이 우리말로 사비왕(斯比王)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한편 무열천황 때에 백제 무령대왕이 보낸 사아왕(斯我君)이 왔는데 그의 아들이 법사왕(法師君)이며
왜왕(倭君)의 선조라고 하였다.
법사군은 법사왕, 왜군은 왜왕의 낮춤말이다.
여기서 왜(倭)는 구마모토(熊本)에서 강을 따라올라가서 큐슈를 횡단하여 산맥을 넘어서가면
교토군(京都郡)이 된다.
교토군 남쪽은 야마구니가와(山國川)를 따라내려간 나가쯔시(中津市)가 된다.
600년에, 일본이 수나라와 외교할 때에는, 이 나가쯔시(中津市) 구주백제왕의 수도 야마타이(野馬臺)에서
수나라 사자와 접견이 이루어졌다.
즉, 의자대왕이 구주백제에 있을 때의 수도였고 왜국이라고도 한 것이다.
뒤에 한자로는 산국(山國)으로 바뀐 것인데, 읽기는 야마(山)로서 야마대국이나 같다.
야마천의 계곡 이름도 야마계(耶馬谿)다.
나가쯔시에서는 바로 위에 금천(今川)=(곰천)을 따라서 행교시(行橋市)가 있고,
그중 어소정(御所町)이 전방후원분이 세워졌던 주요한 고대 고분 도시다.
나가쯔시 남쪽은 중진평야다.
그 아래에 우좌시(宇佐市)는 구주백제의 왕으로서 민달천황이 있던 곳이다.
큐슈 동북부인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 팔번신궁(八幡神宮)의 기록에
흠명천황 때에 처음으로 광번(廣幡)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큐슈 축자현의 광국에서 이곳 오오이타현에도 백제국 광번기를 꽂은 것이다.
그리하여 흠명천황의 후예가 이곳 왜군의 선조가 된 것이다.
이웃한 교토군(京都郡) 행교시(行橋市) 부근의 몇 곳에 전방후원고분과 성터, 사원의 유적들이 많고,
이곳에서 일본 천황으로 옮겨간 천황들의 이름자에 그 지명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현재 왜여왕 비미호 시대의 유적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의 천황과, 백제 영토인 구주백제 광국왕(廣國王)의 역학관계를 추정해보면,
구주백제가 일본의 거의 모든 병력과 병마를 가지고 있었고,
이 구주백제의 왕이자 군사령관은 백제의 태자거나 왕자였다.
구주백제 광국왕은 장차 백제 대왕이 되던지 일본 천황이 된다.
구주백제의 왕과 일본천황의 임명권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6세기와 7세기 일본 대화조정은 천황직이 종신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세습권이 없고,
독자 외교권도 없고, 오로지 백제에 조세만 거두어 받치는 백제의 위성국가였다.
단적인 예가 서기 600년 수나라와 일본의 외교문서인데, 이 당시 일본에는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나라와 직접 외교한 일본 왜왕 이름은 백제 의자왕자로서 훗날의 서명천황이었으니,
그는 바로 당시 구주백제왕이었으면서 대외적으로 왜왕이라고 칭한 것이다.
구주백제 성립 이후로 일본 대화조정은 구주백제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일본 천황의 독립운동은
6세기초부터 7세기까지 근 200년간 계속된다.
또한 백제가 660년에 본토에서 망한 뒤에도, 구주백제왕으로 선광(善廣)이라는 의자대왕의 아들이
차례로 이어받았다.
안한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무령대왕의 아들 백제 법사왕의 법사(法師)가 바로 계체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흠명천황(欽明天皇)=(510~571)의 이름인 하루끼(波流岐)다.
본래 춘기(春岐)에서 유래하여 춘일시(春日市)가 되었기도 하지만, 天國押-波流岐-廣庭命
이는 [고사기]에서 그렇고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는 하류기(波留岐),
[원흥사연기(元興寺緣記)]에서는 하라끼(波羅岐)였으니 대동소이하다.
현재 한자로는 개(開) 또는 춘기(春岐)로 해석해왔으나. 가운데 “류”나 “라”는 어조사였고 앞과 뒤만 의미있다.
일본 최초 사찰이라는 《원흥사연기》에는 춘기광정(天國案-春岐-廣庭-天皇)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법을 뜻하는 법(法)이 하(波)에 대응하고, 사(師)가 기(岐)에 대응한다.
즉 하류기(春岐)는 법사(法師)에 해당하고, 광정(廣庭)은 광법(廣法)일 수도 있다.
법사와 광법은 불교용어이다.
흠명천황을 가외천황(加畏天皇)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가사(袈裟)를 입은 천황,
즉 가의(加衣) 천황을 조잡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동시대에 양나라 무제(武帝: 재위 502~549)가 가사(袈裟)를 입고 나라를 다스린 기록이 있는데
이런 유행을 따른 것이다.
일본에 불법이 최초로 전래된 것은, 큰 부처,
혹은 큰 보시(意富富杵)=(大布施)라고 이름했던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
즉 전지대왕(?支大王)이 도래한 때이다.
큰 보시(富杵)를 한 것인지, 큰 부처(意富-富杵)라고 불린 것인지 불명하다.
이때 만들어진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이때 만들어진 사찰인 것은 전지대왕의 후예의 성씨가 포시씨(布施氏)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씨족사(氏族寺)로서 전승되었지만 포시산(布施山)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포시씨(布施氏)가 부지(富杵)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시는 재물을 받친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다.
전지대왕의 아들 이름에 사용된 불교용어가 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흠명천황 때에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와 불상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본 본토를 의미하며 큐슈와는 무관하다.
큐슈에는 백제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불교가 들어갔고 일본 본토에는 흠명천황 때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흠명천황은 이미 백제에서 불교를 접하고 큐슈로 건너갔고 다시 오사카 대화로 들어간 것이다.
이름에 오시(押 혹은 忍)가 들어간 천황은 도래인이다.
오시호미(忍穗耳), 효안천황(倭帶日子國押人命)과 그의 형인 오시타라시히코(押帶日子命),
그의 부인 오시히메(押媛), 그의 아들 히코후쯔오시노마코토(比古布都押之信命), 이치베노오시와(市邊忍齒王),
윤공황후이자 아신대왕의 딸인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忍坂大中津比賣命)가 있었다.
흠명천황은 그 이름에서 천국(天國)에서 배(排)하였으니, 백제에서 왜왕으로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국압(天國押), 혹은 천국배(天國排)이다.
흠명천황이 백제에서 일본에 올 때 본이름은 사귀왕(斯貴王)이었다.
그의 대화조정 궁이름이 사귀시마(斯貴嶋)=(법왕제설), 사귀시마(斯歸嶋)=(원흥사연기),
시키(師木宮)=(고사기), 磯城嶋(일본서기)로 각각 기록되었은데
이는 그가 백제 사귀왕(斯貴王)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령대왕=사마왕(斯麻王), 안한천황=사아왕(斯我王), 선화천황=사비왕(斯比王).
흠명천황=사귀왕(斯貴王), 이렇게 이어진 것이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일본 천황이 되어서 사귀시마(斯貴島)에
고마궁(金刺宮)이라는 대궁을 지었다.
金刺宮은 가나사시로 읽지 말고 백제 도성 이름인 고마성으로 읽어야 한다.
사아왕은 안한천황인데 그는 자식을 못낳았다.
따라서 흠명천황은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이고, 성명대왕의 동생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대왕인 청령천황도 자식을 못낳았는데 말다왕, 즉 모도대왕이나
무령대왕을 그의 자식이라고 기록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흠명천황을 굳이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딸 이시히메(石姬)를 황후로 세우고 그 동생을 또한 후비로 세웠다.
540년 흠명천황 2년,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과 졸마(卒麻)의
한지(旱岐)과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 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함께 가서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의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대왕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초고대왕(肖古大王), 귀수대왕(貴首大王)의 치세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중략)..록기탄(?己呑)=(거제도巨濟島)은
가라(加羅)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任那)=(구주백제)도 구원해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南加羅)=(금관가야金官伽倻)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창원昌原)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려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제 힘을 합하여 임나를 반드시 일으키자."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성명천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은 것이니 성명천황의 동생인 것이 확연하다.
그런데 함안(咸安)의 안라(安羅)가 이미 신라와 통하였다.
안라는 528년 지증왕 때에 신라가 소경을 두었었다.
성명대왕은 세 사람의 사자를 보내 백제로 귀화하라고 말을 하였다.
이때 안라에는 일본부집사(日本府執事)와 임나부집사(任那府執事)가 있었는데 이 둘은 백제에
반격한 계체천황의 유신(遺神)으로 고려되며 신라와 통하였고 백제나 일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 위가가군(爲哥可君)=(현종천황顯宗天皇)이 그들 때문에 쫓겨났다고도 언급하였다.
또한 근강모야신이 임나=(대마도)에서 죽었는데, 이때 임나는 현종천황의 잔류 세력인
좌로마도(佐魯麻都) 등이 좌지우지하였고, 그는 신라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난데없는 한반도의 임나 일본부는 바로 백제에 반기를 들다가 일본 천황 자리에서
쫓겨난 현종천황과 계체천황의 유신들이 가야에 건너와서 웅크리고 발악한 기록이다.
542년, 흠명천황은 전라도의 백제군 수령들에게 임나를 빨리 도모하도록 청하였는데,
백제 성명대왕은 일본의 군사 삼천으로 낙동강 서쪽을 치고 6성을 쌓으라고 권하였다.
이해 성명대왕은 고구려와 힘겹게 전투 중이었다.
성명대왕은 즉위 7년만에 무령대왕이 회복한 평안도, 황해도 강토를 다시 고구려에 빼앗겨 잃어버렸다.
성명대왕과 흠명천황이 서로 미루다가 가야 정벌의 기회를 놓치고, 백제와 신라는 불안한 동맹이 되었다.
이 때의 [삼국사기]를 보면 아래와 같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혈성(穴城)은 황해도 구월산 서쪽 해안인 풍천군(豊川郡)으로 고려된다.
고구려는 구을현(仇乙縣)이라고 했는데 "굴"이 바로 혈(穴)이다.
고구려 굴천(屈遷)이라고도 기록했다.
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오곡은 황해도 서흥군의 옛이름이다.
대현산성이 있다.
서흥군의 서쪽 자비령은 주요한 방어선이었는데 뚫렸으므로 고구려군은 예성강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백제군이 2천명밖에 죽지 않은 것은 손해를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고 후퇴한 것이므로 예성강까지
뚫린 것은 아니다.
안장왕과 한씨미녀 전설이 경기도 고양에 전해온다.
안장왕이 왕자일 때에 백제 땅에 침투하여서, 고양 땅의 한씨 미녀와 정분을 맺었고,
을밀장군의 돌격대를 보내 고양 땅을 먼저 점거하고 뒤에 안장왕이 육로로 내려왔다.
이때 강화도와 김포, 통진, 고양, 양주 풍양궁 등을 고구려가 550년까지 21년간 점령했다고 보인다.
이때 세워진 고구려 풍양성이 고구려 남평양으로 김부식에 의해 잘못 인식되었다.
10년(531) 가을 7월 초하루 갑진에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12년(534) 봄 3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16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泗比)<다른 이름은 소부리(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백제 중기 수도 황해도에서 충청남도 부여로 천도한 것이다.
무령대왕릉도 이때 충청남도 공주로 옮겨졌을 것이다. 즉 천장한 것으로 고려된다.
아니면 성왕 즉위 초에 천도를 기획하여서 왕릉을 먼저 짓고나서 그 후에 천도하였을 수도 있다.
백제는 동서 2개의 수도가 있었다. 사비성(혹은 거발성)과 고마성(혹은 거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부여와 공주는 동서 양경, 즉 두 개의 수도성으로 고려된다.
현재의 공주는 당시 수도의 하나인 동성(東城)이었고, 백제 북방을 담당하던 웅진성은
본래 임진강에 있었지만, 670년 문무왕의 재배치 대에 현재 공주로 옮겨진 것이다.
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북사]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구당서] 其王所居有 東西兩城.
[신당서]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濱海之陽,西界越州,
南倭,北高麗,皆逾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거기에 충청남도 공주가 속하는 것이다.
백제 말기 동서 양 수도를 흐르는 강물은 백강(白江)이고,
백제 북방인 웅진부를 흐르는 강은 웅진강, 지금의 임진강이다.
성명왕은 동생왕인 흠명천황에게 백제군을 주어서 일본을 평정한 후에
이제 백제 본토를 정비하고 다시 북진을 준비하였다.
18년(540) 가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우산성은 고구려 문자왕 496년, 497년 조에 나오는데 동해안 니하에 있었다.
문자왕 5년(496)에 제나라 황제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사신을 제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이하(泥河) 가에 나와 반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증명된다.
일본 본토 오사카의 사비왕, 선화천황이 539년에 죽었다.
구주백제왕이던 흠명천황은 건너가서 오사카의 천황이 되었다.
540년에 위덕왕자를 규슈에 보내서 구주백제왕이 되게하였다.
19년(541)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였더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25년(547) 봄 정월 초하루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2월 6일이다.
0547 Feb 06 07:37 T 78 0.553 1.033 17.8N 62.5E 56 131 03m07)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북(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예의 군대는 단군시대 소시모리의 예읍이던 함흥의 민족이다.
따라서 무령왕이 개척했던 동해안의 여러 백제성들이 고구려에게 다 함락되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신평군의 달보산성이 한북의 독산성으로 고려된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27년(549)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양나라의 서울(京師)에 반란(寇賊)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성(城)과 대궐이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내어 우니,
길을 가다가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어서야 바야흐로 환국할 수 있었다.
549년, 백제는 한성을 되찾고, 대동강의 평양을 뺏어서 백제고지를 되찾았다.
같은 해에 백제 성명대왕이 일시적으로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친 기록이 [일본서기/ 흠명12년]에 남아있다.
十二年 是歲,百濟聖明王親率?及二國兵, 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復故地.
백제는 545년, 흠명천황 8년부터 왜군을 달라고 요구하였었다.
이때 [일본서기] 흠명 14년 10월조에 위덕왕이 된 여창(餘昌) 왕자의 무용담이 실려있다.
백제왕자 여창은 고구려 백합야(평양 합장강 유역 추정)에서 요새를 만들고 휴식했다.
이날 밤 조용하다가 갑자기 적들이 공격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창이 놀라 북을 치고 대응하여 밤새도록 요새를 고수하였다.
잘이 밝으니 적들이 가득하였다.
아침에 적장 5명이 와서 물었다. 손님은 성명, 나이를 밝히라고 했고 여창은 성은 동성이고
지위는 한솔이며 나이는 29세라고 하였다.
또한 백제도 적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여창은 말을 타고 싸워서 고려용사를 마상에서 찌르고
목을 베어 창에 꽂고 돌아왔다.
백제가 함성을 지르고 추격하였고 고구려왕은 동성산, 즉 대성산성 위로 퇴각했다.
그러나 이 대성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여창은 백제 북한산성이던 평양성과 한성을 다시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百濟王子余昌,明王子,威德王也.悉發國中兵, 向高麗國, 築百合野塞,眠食軍士. 是夕觀覽,鉅野墳?,平原??,
人跡罕見,犬聲蔑聞.俄而?忽之際, 聞鼓吹之聲.余昌乃大驚,打鼓相應,通夜固守.凌晨起見,曠野之中,覆如?山,
旌旗充滿. 會明, 有著頸鎧者一騎,??者二騎,?字未詳.珥豹尾者二騎,?五騎,連?到來問曰:「少兒等言:
『於吾野中,客人有在.』何得不迎禮也.今欲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余昌對曰:
「姓是同姓,位是杆率,年二十九矣.」百濟反問.亦如前法而對答焉.遂乃立標而合戰.
於是,百濟以?,刺?高麗勇士於馬,斬首.仍刺拳頭於?末,還入示?.高麗軍將,憤怒益甚.是時百濟歡叫之聲,
可裂天地.復其偏將,打鼓疾?,追?高麗王於東聖山之上.
한편 [일본서기] 흠명23년조에 또다른 전황기록이 있다.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이다.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은 수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고 왔다.
고구려왕은 담을 넘어 도망하였고, 협수언은 궁에 들어가서 약탈하고 돌아왔다.
다른 책에 의하면 549년에 협수언은 백제와 연합공격하여 고구려왕 양향왕을 비진류도(比津留都)
=(요하의 비사성인 것으로 보인다.)로 쫓았다.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에 이 일이 흠명천황 11년, 즉 549년의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양원왕을 비진유도(比津留都)로 쫓았다고 하는데 "비사성의 백제 구도"이거나
비류왕(比流王)의 도읍을 의미하니 요양시 태자하로 고려된다.
二十三年八月, 天皇遣大將軍 大伴連狹手彦, 領兵數万, 伐於高麗. 狹手?乃用百濟計, 打破高麗. 其王 踰牆而逃,
狹手?遂乘勝以入宮, 盡得珍寶貨賂、七織帳、鐵屋還來. 舊本云, 鐵屋在高麗西高樓上. 織帳張於高麗王內寢.
以七織帳, 奉獻於天皇. 以甲二領、金飾刀二口、銅縷鍾三口、五色幡二竿、美女媛,媛名也.?其從女-吾田子,
送於蘇我稻目宿?大臣. 於是大臣遂納二女以?妻,居輕曲殿. 鐵屋在長安寺, 是寺不知在何國.
一本云,十一年(549년), 大伴狹手? 連共百濟國, 驅?高麗王陽香於比津留都.
당시 성명대왕은 일시적으로 대동강 북쪽의 평양군과 대동강 남쪽의 한성군 등 6군郡을 수복하였다.
여기서 평양은 대동강의 남평양이고, 동성산은 대성산성이다.
백제는 549년 10월에 평양을 차지했으나 그해 겨울인 550년 정월에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 때문에 한성에는 신라가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十三年 是歲, 百濟棄 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 漢城, 今 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地名,未詳.
이는 온조의 백제 한성을 찾는 단서가 된다.
바로 대동강 남쪽의 동명왕릉 동북에 있는 니현인 것이다.
신라기에서 한시성(韓始城)이라고 나오는 것이 이 니련의 백제 한성으로 고려된다.
550년 1월 백제는 수안 남쪽으로 다시 철수하면서 한성 수비를 못할 것 같아서 포기한 것이고
신라가 비록 한성에 들어갔으나 역시 얼마 견디지 못하고 553년 이전에 물러나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에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이 한성은 훗날 668년에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에서 고구려로 올라갈 때에 대곡(황해도 평산)과
대동강 평양 사이에 위치해서 북진해 올라가는 당나라 유인원에게 항복했던 한성이다.
또한 670년 후고구려를 일으키려던 안승의 한성이다.
이에 대해 문무왕기 14년조에는 신라왕이 고구려 부흥군을 받아들여서 백제 옛땅 한성에서
반란하게 도우니 고종이 화를 냈다고 하였다.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신라인 소나와 말갈인 사이에 아달성 전투가 나오는데 아달성이 역시 이 한성과 가깝다.
당시 백제는 황해도를 예성강까지 거의 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상태로서 예성강 상류 위례성(수안군)에서
고구려 장새현(상원군)을 넘어서 백제 한성과 평양성을 되찾은 것이었으나 황해도의 고구려성들이
항복하지 않았으면 평양 수비에 어려움이 있다.
549년 해로로 고구려 평양성을 친 백제군의 일부는 육로 공격으로서
역시 경기도 양주의 고구려 풍양성을 공략하고 도살성까지 수복하였다.
[삼국사기/백제기]에는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하였고 고구려는 3월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28년(550) 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진흥왕기]에는 이렇다.
11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개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였다.
549년 10월 평양과 한성 공략으로 시작하여 550년 1월까지 전투에서 백제는 경기도에 들어온
고구려군을 몰아낸 것이다.
그러나 황해도 대부분인 예성강 서편이 계속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고구려는 3월에 강화도 방면에서
다시 경기도에 상륙하여 금현성을 탈취한 것이다.
금현성은 파주 서쪽 월롱산성으로 고려된다.
이때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노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기습 공격으로 두 성을 모두 빼앗아 신라가 차지하였다.
신라가 이 두 성을 빼앗아서 한강 하구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임진강과 한강 사이를 신라가 점령한 것이다.
이 도살성에서 648년에 벌어진 전투의 백제 장수 이름은 양주 회천읍 덕정리 부근에서 발견된다.
백제 좌평 은상(殷相), 달솔 자견(自堅)이 그러하다. 자견은 견성(堅城), 즉 포천의 옛이름을 의미하고,
은상은 지금의 동두천에 있는 은현(殷縣), 상수(湘水), 상패천(相敗川)을 의미한다.
상패천은 핏물에 공이가 흐르던 격전지였던 것이다.
도살성 부근의 석토성은 그 서북의 석적산(石積山, 대동여지도)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김유신이 습격한 백제 장수 은상의 거점은 동두천시(東豆川市) 서쪽 상패동으로 고려된다.
도살성은 살수(샛강)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는데, 한탄강이 바로 임진강의 살수이었을 것이다.
전곡의 동쪽에 위치한 청산면 대전리 산성이 도살성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거칠부전]에는 진흥왕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할 때에 고구려의 동해안 방어가 쇠약한 틈을 타서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죽령은 강원도 삼척에 있었다.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比台角~·耽知~~·非西~~·奴夫波珍~·西力夫波珍~·比次夫大阿~·
未珍夫阿~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529년의 고구려 침공 이후에도 백제는 예성강 동쪽에서 임진강 사이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백제 멸망 후에는 그 땅이 신라 땅을 거쳐서 발해 땅이 된다.
백제 멸망후에 백제 땅을 발해국이 나누어 가진 것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도 이남에 발해가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황해도에 백제 땅이 남아있었던 것이 증명된다.
그래서 백제 수도가 동서 양경, 고마성과 사비성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553년 고구려의 백제 웅천성 침공은 임진강변의 황해도 토산군 고마성 침공이다.
예성강의 수안군은 본래 저색(猪塞)이라고 했는데 백제의 국경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장새현(墻塞縣)은 수안군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 [대동여지도]에 보인다.
즉, 웅천현은 문주왕이 만든 백제 중기수도 고마성이다.
이 전쟁에서 백제가 승리하여 백제는 황해도 임진강과 예성강 유역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550년 3월 신라 진흥왕의 돌연한 배반은 신라의 급속한 성장과 백제의 몰락을 촉발하였다.
신라가 임진강 하구에 진출한 것이다.
이후 급격하게 영토를 넓힌 신라 진흥왕 때 568년 신라 북변의 지도는 아래와 같다.
신라 진흥왕은 555년 11월에 북한산주를 순행하였다.
현재 서울 북한산에 북한산 순수비가 남아있다.
비문에는 568년의 관직인 남천군주가 나오지만 진흥왕순수비가 568년에 한꺼번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68년 신라 진흥왕은 함경남도 최북단인 단천 마운령에도 순수비를 세웠고 함흥 북쪽 황초령에도 순수비를
세웠다.
고구려가 점거했던 고양시 일대를 점령했을 뿐이고 김포반도와 개성은 백제 소유였다.
568년에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세웠는데 [헌덕왕기]에서 패강남천이
부딪치므로 패강이 대동강으로 보면 그 남쪽 가지로서 남천주를 보면 현재의 신평군이 된다.
달보산성이 있는데 한북 독산성으로 고려되는 곳이다.
발해 침략 때에 대동강의 남천주가 현재의 경기도 이천 지역으로 옮겨갔을 것으로 고려된다.
역시 568년에 신라 진흥왕은 비열홀주를 폐하고 달홀주를 세웠는데 지금은 달홀주를 통천으로
보고 있지만 이는 발해에 밀려나서 후퇴한 달홀주이고, 본래 진흥왕의 달홀주는 마운령순수비가
568년에 세워진 함경남도 북단의 단천(湍川)이 옳다.
568년에 비열홀주를 폐지하고 남쪽 통천으로 퇴각했다는 현재 학설은 단천의 순수비를 헛것으로 보는 것이다. 발해국의 공략으로 후퇴한 달홀주 위치가 통천이 된다.
551년 백제는 금동불상을 일본에 보내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일본은 배 두 척에 무기를 실어서 보내고 병사들도 보냈다.
백제 성명왕은 둘째왕자 민달천황을 552년에 일본에 보내어서 구주백제의 왕으로 삼았다.
흠명천황기에서 흠명천황이 황태자를 세운 기록 시점이다.
이때 구주백제왕이던 위덕왕자 여창이 백제로 귀국한 것이다.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는 경기도 광주에 해당한다.
겨울 10월에 성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극도로 양국이 대치하던 상황이라서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성왕의 딸을 진흥왕이 후비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聖)이라 하였다.
553년 겨울에 백제는 가야와 신라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황해도 주요성을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가 동쪽 신라로 진격한 것이다.
554년에 태자 창왕昌王(=위덕대왕威德大王)이 신라와 전투 중에 고립무원의 위기에 빠져서 성명대왕이
직접 구원을 나갔다가 성명대왕이 신라군에게 포위되어 화를 입어서 이만육천의 병사와 함께 화를 입어
참수당하였다.
엄청난 병력 손실이다.
[삼국사기/신라기]에서는 관산성管山城의 싸움에서 신라가 위험에 처하였는데 신라 북쪽의
신주군(新州軍) 김무력이 내려와서 구원하였고, 김무력의 비장이던 삼년산군(三年山郡)
출신의 장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관산성(管山城)은 충청북도 옥천(沃川)의 고지명이고, 삼년산군(三年山郡)은 보은(報恩)의 고지명이다.
삼년산성은 보은읍의 동쪽에 있고 관산성은 옥천 서북쪽 환산(環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유신전]에서는 성왕이 들어갔던 곳이 고리산(古利山)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대청호 동쪽 환산이다.
사지촌은 사지성, 즉 신성을 의미한다.
신주군(新州軍)의 장수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의 비장이었던 것이라서,
그의 출신 고향인 옥천 고리산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일본서기]에 성명왕의 전사와 관련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12월 백제왕은 사자를 보내어 백제군과 규슈안라신과 임나제국신에게 말했다.
신라가 무도하여서 맥인(고구려)과 연합했으므로 왜국의 군사를 얻어 신라를 쳐야겠다...
성왕은 6월에 왜국군을 얻었고 12월 9일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여서 함산성(관산성)을 함락하였다.
冬十二月
不畏天皇.與貊同心欲殘滅海北彌移居.臣等共議,遣有至臣等,仰乞軍士,征伐斯羅. 而天皇遣有至臣,
帥軍以六月至來.臣等深用歡喜. 以十二月九日,遣攻斯羅.臣先遣東方領物部莫哥武連,領其方軍士,
攻函山城.有至臣所將來民筑紫物部莫奇委沙奇,能射火箭.蒙天皇威靈,以月九日酉時,焚城拔之.
그러나 고구려, 신라군의 저항이 심하니 죽사도의 제군사를 보내라.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고 성왕은 말하고 사자를 보내 노획물을 전했다.
故遣單使馳船奏聞.」別奏:「若但斯羅者,有至臣所將軍士亦可足矣.今貊與斯羅,同心戮力,難可成功.
伏願速遣竹斯島上諸軍士, 來助臣國. 又助任那, 則事可成.」又奏:「臣別遣軍士万人, 助任那. ?以奏聞.
今事方急,單船遣奏.但奉好錦二匹、?氈一領、斧三百口, 及所獲城民, 男二女五.輕薄追用悚懼.」
한편 태자 여창은 신라국에 침입하여 구사모라색(久陀牟羅塞)=(구천狗川의 구천책이다.)에서 포위되었다.
성왕이 염려하여 스스로 가서 위로하려고 하였다.
신라왕은 성왕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신라 좌지촌사마 고도(苦都)가 성왕을 목베었다.
성왕의 목을 신라 대궐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다.
태자 여창은 축자국조(筑紫國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遂入新羅國,築久陀牟羅塞. 其父明王憂慮, 余昌長苦行陳,久廢眠食.父慈多闕,子孝希成.乃自往慰勞.
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 是時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 明王名主也. 今使賤奴殺名主, 冀傳後世, 莫忘於口.」
已而, 苦都乃獲明王,再拜曰:「請斬王首.」明王對曰:「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我國法違背所盟,雖曰國王,當受奴手.」一本云, 明王乘距胡床,解授佩刀於谷知令斬.
明王仰天大息涕泣,許諾曰:「寡人每念,常痛入骨髓.顧計不可苟活.」乃延首受斬.
苦都斬首而殺,掘坎而埋. 一本云,新羅葬理明王頭骨,而已送於骨於百濟於百濟.
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名此廳曰-都堂.
余昌遂見圍繞, 欲出不得. 士卒遑駭, 不知所圖. 有能射人,筑紫國造. 進而彎弓,占擬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
發箭之力, 通所乘鞍前後橋, 及其被甲領會也.復續發箭如雨,彌?不懈,射?圍軍.由是余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
余昌讚國造射?圍軍,尊而名曰-鞍橋君.鞍橋,此云???.
於是,新羅將等具知百濟疲盡,遂欲謀滅無餘.有一將云:
「不可!日本天皇以任那事,屢責吾國.況復謀滅百濟官家,必遭後患!」故止之
'뿌리와 역사 >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 무왕 (0) | 2008.09.17 |
---|---|
21. 위덕왕과 혜왕 법왕 (0) | 2008.09.17 |
19. 구주백제를 세운 무령왕 (0) | 2008.09.17 |
18. 모도왕과 모대왕 (0) | 2008.09.17 |
17. 문주왕과 삼근왕 (0) | 2008.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