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7. 문주왕과 삼근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20

                                                    

 

◈ 문주왕과 삼근왕

 

 

[1] 문주왕(재위475~477)

 

개로대왕의 사후에 그의 동생인 문주왕(文周王)이 임진강변 황해도 토산군 웅진성에 도읍하였다.
한반도의 중심 위치이며 이전에 아신왕이 임시 수도로 삼았던 적이 있어서 그후로 발전하여 왔다.

 

 

 

문주왕이 개로대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와 달리 [일본서기]에는 개로대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다.
문주대왕은 고구려 침략 때에 함경남도 문천(
文川)에 있던 문주(文州)에서 수비하고 있다가 신라로 가서

구원병을 얻어와서 토산군 웅진성에서 백제를 재건하였다.

 

477년, 문주대왕이 백제를 재건하는데 청령천황이 일본으로부터 찾아갔다.
문주대왕은 청령천황을 내신좌평으로 임명했다.
이후에 청령천황은 동해안으로 떠났다.

개로왕대에 상좌평이던 문주왕이 지키던 곳을 청령천황이 지키러 간 것이다.

478년 9월, 문주대왕은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암살당했다.

뒤이어 문주대왕의 13살 짜리 아들 삼근왕三斤王이 즉위하였다.

 

477년, 청령천황이 일본에서 백제로 떠날 때에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시켰다.

[고사기 하권]에는 천황 숫자를 19명이라고 하고 18명만 적었으니 한 명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대개 반풍황녀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빠진 것은 무령대왕(
武寧大王.462~523)이며 왜무왕(倭武王)인데

[고사기]를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없애버린 것이다.

 

[삼국사기/백제기]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洲)라고도 썼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毘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아직 평양의 남한성은 백제 영역이었다.

 

왕은 성품이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에 서울(都)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
아신왕 때와 마찬가지로 한성은 국경 지역이 되어 버려서 문주왕은 황해도 토산군으로 천도한 것이다.

 

2년(476)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들을 이주시켰다.

대두산성은 대동강 하구의 북쪽이다. 

고구려에 넘어간 백제 땅의 피난민들을 받아서 안치한 곳으로 보인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3년(477)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重修)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곤지왕은 아직 일본의 청령천황이므로 죽은 것이 아니다.

개로왕 때의 상좌평 문주왕과 마찬가지로 동해안을 지키러 떠난 것이다.

 

4년(478) 가을 8월에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해치게 하여 드디어 죽었다.

 

[양서]에 의하면 이때 백제 수도는 고마성이었고 남한에 있었다고 했는데 남한은 한수

쪽을 의미하니 대동강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양서] <慶>死, 子<牟都>立. <都>死, 立子<牟太>. <齊><永明>中, 除<太>都督<百濟>

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天監>元年, 進<太>號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 <百濟王>. 號所治城曰固麻.  

 

 

[2] 삼근왕(재위 477~479)

 

 

삼근왕(三斤王)<혹은 임걸(壬乞)이라고도 하였다.>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문주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이가 13세였다.

군무와 정사 모두를 좌평 해구에게 위임하였다.

2년(478)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자(市)에서 목을 베었다.
대두성은 용강현 위치로서 대동강 북쪽이므로 고구려로 투항한 것이다.

 

사론(史論): 춘추(春秋)의 법에 임금이 시해(弑害)를 당하였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이를 깊이 책망하여 신하(臣子)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를 시해하자 그 아들 삼근(三斤)이 왕위를 이었는데도 그를 능히 죽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가 한 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킴에 이른 연후에야 두 번이나 큰 군사를

일으켜서 이겼다.

이른바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으면 굳은 얼음을 만들게 되고, 반짝거리는 불똥을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는 것』이니 그 말미암는 바는 점차적인 것이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시해되었으나 3세(世) 뒤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다.

하물며 바다 모퉁이의 궁벽한 곳에 있는 삼근과 같은 어린아이야 또한 어찌 족히 말할 나위가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4월 18일이다.

0478 Apr 18 19:27 T 75 -0.634 1.042 24.0S 94.3W 50 179 03m36s

 

3년(479)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가을 9월에 대두성(大豆城)을 두곡(斗谷)으로 옮겼다.
백제인들을 대동강 이남으로 철수시킨 것이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수안군의 북쪽 연산군(延山郡)에 아달산 남쪽으로 공포면(公浦面)이 있다. 
우리말로 콩포다. 

용강의 대두산성 사람들을 아달산 남쪽 공포로 옮긴 것이 된다.

이는 웅진성의 북쪽 방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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