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8. 모도왕과 모대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21

 

 

◈ 모도왕과 모대왕

 

 

 

 

[1] 모도대왕(재위479~488)

 

무령왕의 모후인

모도대왕(447~498)은 일본의 인현천황이다.

인현천황과 현종천황은 형제이며  반풍황녀의 오빠들이다.
청령천황은 오사카에서 두 형제를 맞이하여서 인현천황을 후계자로 삼았다.

인현천황과 현종천황 형제는 근수대왕의 증손자인 시변압반왕의 아들들인데 

시변은 황해도 토산군의 지명으로서 예성강 동쪽의 주요성이다.

시변압반왕은 웅략천황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백제 삼근왕이 죽자 청령천황은 후계자로 키웠던 인현천황을 일본에서 백제로 보내어 백제왕이 되게 하였다. 

동시에 왜무왕으로서 일본에서 천황을 하던 무령왕은 청령천황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 함경북도로

건너가고 일본은 무령왕의 모후인 반풍황녀가 맡아서 각자궁에서 다스렸다.

 

청령천황은 일본에서 죽지 않았으므로 [고사기]에 그 서거 기록이 없다.

그러나 청령천황이 된 백제 곤지대왕을 모시는 일본의 신사가 남아있는데 아스카베신사(飛鳥部神社)이다.


飛鳥部神社

所在地 羽曳野市飛鳥(河?國安宿郡)

祭神 百濟王弟こん伎王, 古代のこの地は安宿郡賀美?で

飛鳥部造一族の居住地で現在もその祖神を祀っている

現在の社地は小さな杜に過ぎないが

?時は氏の勢力も?勢であったことから

相?な有力神社であった

この地の有力渡來系氏族としては

飛鳥部造氏と上曰佐氏のニ氏がある


[신찬썽씨록]에서는 이들의 후예를 백제 동성대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新撰姓氏錄]飛鳥部造、百濟末多王の後也

 

청령천황 곤지왕자와 백제 동성대왕을 모시는 아스카베(飛鳥部) 신사

 

백제 서성왕이 된 모도대왕(牟都大王)

[삼국사기]에서 483년에 한산성을 순무했는데 대동강 평양에 있던 남한산성이다.

 

 

 

 

모도왕은 황하 하구 유역과 산동반도, 양자강 북쪽 회대 지방에 상당한 연합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로대왕이 빼앗겨 고구려가 차지했던 평양성, 즉 북한산성에 대한 무력 탈환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중국 동부 지역을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했는데 모도왕은 그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남제(南齊) 건원(建元) 2년(480)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였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와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번국(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하노라.」
또 영명(永明) 8년(490)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렸다.

 

488년, 모도대왕을 세습했던 손자 모대대왕은 거듭되는 폭정(暴政)으로 인하여 501년에 신하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함경북도 청진에 있던 무령대왕이 들어와 역신(逆臣)을 죽이고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일본에 있던 개로대왕비 반풍황녀는 해외 원정중인 왜무왕, 즉 무령대왕을 대리하여 일본의

조정을 맡았고, 평군지비平(群志毗)에게 정사를 위탁하였다.

이때 평군시비의 부친인 평군진조숙녜(平群眞鳥宿~)는 백제에서 모도대왕을 수행하였고 그 아들인

평군지비(平群志毗)는 무령대왕이 사랑하던 오도히메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을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다.


한편 각자궁에 기탁해 있던 이치베오시와(市邊忍鹵王)의 작은 아들이자,

백제 모도대왕의 동생인 홍계(弘計)가 무령대왕이 사랑하는 오도히메를 가로채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군지비를 습격하여 죽이고, 오도히메(小野王)를 차지하였다.

이는 왜왕위의 찬탈이나 같다.


반풍천황(~483)이 483년 11월에 죽고,

이듬해인 484년에 홍계가 현종천황(顯宗天皇.451~488)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무령대왕의 비였던 오도히메, 난파소야왕을 황후로 세웠다.

현종천황은 난파소야왕에게서 추촌(?寸), 즉 무열천황을 낳았다.
게다가, 무령대왕과 난파소야왕이 낳은 어린 곡녀
哭女를 범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훗날 추촌은 포전녀를 범하고 고구려로 갔다.

난파소야왕이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이자 웅략천황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현종천황은 즉위 3년 486년에, 가야신인 고황산령(高皇山靈)에게 제사드렸는데,

그가 왜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는 왜국에 뿌리박았던 가야인들이 협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왕(祖王)인 이중천황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487년에 현종천황은 고구려와 내통하였다.

임나의 기대반숙녜(紀大磐宿?)는 451년 개로대왕의 큐슈 정벌 때에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엇지만, 큐슈임나에서 제멋대로 하였고, 그가 큐슈임나에서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칭하고

독립을 꿈꾸면서 고구려와 통했다.

또 임나 대마도의 좌로(佐魯) 등을 이용해서 백제 장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고구려 땅에 유인하여

이림(爾林)에서 죽였다.

이림(爾林)은 대마도 북섬의 서북부 인전만(仁田灣) 인전천(仁田川) 부근으로 추정된다.

좌로(佐魯)는 대마도 북도의 좌호천(佐護川)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반숙녜(紀大磐宿~)는 큐슈 동쪽 좌백항(佐伯港)에 대산성(帶山城)을 쌓고 길을 막았다.

그래서 식량을 운반하는 항구가 끊겨 원정나간 군사들을 기아에 빠지게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 군사는 중국 산동반도를 공략중이었다.

백제대왕인 모도대왕이 대노하여 고이해(古爾解)와 막고해(莫古解)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기대반숙녜는 임나에서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백제국은 대마도 임나의 좌로(佐魯) 등 300명을 죽였다.


488년 모도대왕은 백제왕위를 손자인 모대왕(牟大王.?~503)에게 물려주고,

일본으로 달려가서 현종천황(顯宗天皇)을 죽였다.
모도대왕은 447년생으로서 479년이면 충분히 손자를 볼 수 있는데, 

어린 손자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난 것이된다. 

현종천황 고분은 고작 21m x 21m의 네모난 고분이고, 그 안에 석실이 있다.

평야총혈산고분(平野塚穴山古墳)이라고 한다.

당시 죄악으로 인하여 여느 천황처럼 크게 묘를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가장 묘가 작은 천황이다.

 

인현천황이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니 현종천황의 황후인 난파소야왕도 궁에서 축출되었다.

 

[일본서기/인현천황기]에 무령대왕의 신하인 평군지비와 현종천황의 난파왕 다툼으로 인하여

기구하게 살다가 한탄에 빠진 여자의 노래 가사로 난파소야왕의 운명이 기록되었다.


제목이 어머니모세(於慕尼慕是) 아레니모세(阿例尼慕是)라는 한탄의 노래다.

그 뜻은 어머니의 남편이 내 남편인데 떠났다는 슬픈 노래였다.

그 사연은 한백수랑한(韓白水郞~,:무령대왕)이라는 남자가 난파 즉어녀

(~魚女,: 난파소야왕)와 살다가 곡녀(哭女)를 낳고 떠났고,

산저(山杵):(현종천왕)라는 남자가 즉어녀(난파소야왕)와 살며 추촌(~寸)을 낳았다.

이후에 산저는 곡녀(哭女:무령대왕의 딸)마저도 통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이후 산저의 아들 추촌(무열천황)은 포전녀와 살았다.

그후 추촌은 고구려로 가는 사자 편에 고구려로 떠나버렸다.

난파왕이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이고, 추촌은 그 아들이기 때문에 고구려로 간 것이다.

 

488년, 현종천황이 고구려와 내통하여 형인 인현천황에게 제거당하자,

현종의 황비인 난파소야왕(461~498)은 자살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실제로 죽지 않았어도 죽은 것보다 비참하였다.


무령대왕의 딸인 곡녀 입장에서 산저
(현종천황)가 어머니에게도 남편, 나에게도 남편이었다.
포전녀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같은 추촌이 남편이었는데,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탄한 것이다.

 

498년까지 동성대왕 인현천황은 일본에서 고구려계를 제거하고 옛 충신인 좌백부(佐伯部)를 찾아서

큐슈 오오이타현(大分縣) 좌백항(佐伯港)에 보내어 큐슈도 안정시켰다. 

 

백제 수도 이름 중에 거발성이 있는데, 
인현천황의 이름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으며 이름자가 대각(大脚)이라고 하였다. 
대각은 큰 다리고 거발성과 뜻이 통한다.

또한 다른 이름은 대위(大爲)라고 하였다.
자는 도랑(島郞)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름에서 수안군의 각회산, 위라천이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안군의 거지산(擧肢山)도 큰 다리 거발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평군의 달보산성. 혹은 달해산성이라는 곳도 다리왕인 모도대왕이 쌓은 성으로 고려된다.

함흥 서쪽에 모도봉이 있다.

 

 

[2] 모대왕(재위488~501)

 

<삼국사기>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혹은 마모(摩牟)라고도 썼다.>이며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동성왕은 모도왕의 손자다.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481년에 신라 소지왕이 비열성(比列城; 안변읍)에 거둥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신라 군사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때 청령천황의 백제군은 함흥 북쪽에 있었다. 

그러나 집안으로부터 내려온 고구려, 말갈군에게 함흥 남쪽을 돌파당한 것이다. 
그러나 덕지강 북쪽은 백제가 다시 찾고 덕지강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여 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4년(482) 봄 정월에 진로(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兵馬事)를 아울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00여 집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에 눈이 크게 내려 한 길(一丈) 남짓이나 쌓였다.

 

5년(483) 봄에 왕이 사냥을 나가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웅진(熊津)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6년(484)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484년 7월에 고구려가 신라 북쪽 변경에 침입하여 신라군은 백제와 함께

모산성(母山城)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신라 북쪽의 모산성은 강원도 금성현으로 고려된다.

모성군이라고 했었다. 

 

 

 

 

 

7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8년(486) 봄 2월에 백가(~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 겨울 10월에 궁궐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여기까지는 모도대왕 때의 일이다. 

이후에 일본으로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10년(488)에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이는 모도대왕의 손자인 모대왕 때의 일이다.

그후 490년 위나라와의 전쟁은 모대왕 때의 일이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 때인 488년 겨울에 북위국(北魏國) 산동반도의 백제를 쳤다.

산동반도의 백제군은 북위국의 수십만 대병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겨서 산동반도를 수호하였다.

모대대왕은 북위군(北魏軍)을 격파하고 나서 승전한 백제 장수들을 승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 10년 488년에 위(魏)나라가 백제를 치러오다가 패하였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제서(齊書)]에도 이 부분의 백제 기록이 파훼되었는데 남아있는 부분은 모대왕이 남제국(南齊國)올린

 국서 내용이다.

“노고에 보상하여 이름을 길이남긴다.

영삭장군신 저근(姐瑾) 등 4인이 충효를 다하여 국난을 막았다....

이 4인의 장수에 대하여 임시책명을 정식으로 황명을 내려 책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을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를,,,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餘歷)을,,,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餘固)를...건위장군, 불사후로 책명을 바랍니다.

이들 4명은 488년에,,,산동반도에 있다가 서북에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백제 장수들이었다.

 

490년에 모대대왕은 여기에 더하여 3장군을 산동반도에 보냈다.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신 고달(高達),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신 양무(楊茂)

행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송나라에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나의 신하로 봉사중이다.

 

比使宋朝,今任臣使

 

그러한 선례에 따라서 이 장군들에게 새로 제나라의 책명을 바란다. 

광양태수 고달(高達)은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조선태수 양무(楊茂)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참군 회매(會邁)는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남제 무황제(武皇帝)는 모대왕이 열거하고 원하는대로 백제의 세 장군들에게 군호를 내리고

중국의 태수로 임명하고, 모대대왕을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봉하였다.

 

詔可,竝賜軍號,除太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東大將軍.

 

그리고 사자를 백제에 파견하여 모대대왕에게 조부 모도대왕을 세습하여 백제왕이라는 책명을 주고

인장과 인수, 옥부, 동부, 호부, 죽부 등 여러가지 선물을 하였다.

 

 여기서 모도대왕은 망(亡)자가 없으니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는 일본에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한편 [남제서]에는 이때 490년에 다시 북위 수십만이 2차로 백제를 공략했으나

모대왕이 보낸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우나(木干那) 등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고 기록했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衆 襲擊虜軍,大破之.

 

495년에 모대대왕이 다시 보낸 국서에서는

“490년, 경오년에 북위 선비 오랑캐가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반격하게 하였다. 해일처럼 쓸어버리고 달려 추격하여 베어버리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

목우나(木干那)는 광위장군, 면중후


그리고 다시 파견한 장군은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신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신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겸 참군신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

등 4명인데 이들을 정식으로 책명해 달라는 모대대왕의 주청을 남제 명황제(明皇帝)는 다 들어주었다.


선비족 척발씨(拓跋氏)의 위나라(北魏)는 386년부터 534년까지 존재하였고,

439년 북조(北朝)를 통일하였는데 당시 척발씨 북위(北魏)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남제국(南齊國)의 [남제서(南濟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위와 같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중국에 생겨나고 최후에 사라진 백제 진평군(晉平郡)

하북성 형수지구(衡水地區)와 보정지구(保定地區)의 경계인 안평현(安平縣)이다.

서남쪽에 진현(晉縣)도 남아 있다. 

백제 요서군(遼西郡)은 하북성 노룡현 북쪽 천안현(遷安縣) 영지성(令支城)에 있었다.
백제 구이대왕(234~238)의 직함이 위영지령(
魏令支領)으로서 오래전부터 백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385년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취하였으나 그해 말에 후연(後燕)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개로대왕 때에 다시 요서를 찾은 것이다.

 

광릉태수(陵太守)의 광릉군은 산동성 아래 회하(淮河 )남쪽 회계산(淮稽山) 유역이다.

청하태수(淸河太守)의 청하군은 제나라가 있던 곳으로 하북성 형수시 남쪽 황하 주변의 청하성이다.

광양태수(廣陽太守)는 북경시였고 유주(幽州)에 속했다.

 

385년에 북경을 취하여 13군 태수를 두었었으나 389년에 후연에 빼앗겼었다. (유주자사 진묘)

성양태수(城陽太守)의 성양은 산동성 산동반도 남동해안 청도시(靑島市)에 있었다.
동청주(
東靑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했으니

백제가 오래도록 보전하였으며 백제왕이 있던 곳이다.

조선태수(朝鮮太守)는 하북성 진황도시 비여현(肥如縣)에 있었다.

하북성 노룡현의 30리 북쪽이다.

수나라 때 대방태수(帶方太守)는 산해관 부근에 있었다.

 

위에 적힌 9군, 진평군(晉平郡), 요서군(遼西郡), 광릉군(廣陵郡), 광양군(廣陽郡), 청하군(淸河郡),

낙랑군(樂浪郡), 성양군(城陽郡), 조선군(朝鮮郡),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의미를 타당하게 고려하건대

시간적인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 8명의 백제 태수가 가장 최전선이라고 보면 북청주(北靑州) 7현, 제남군(齊南郡) 5현, 낙안군(樂安郡) 3현,

 고밀군(高密郡) 6현, 평창군(平昌郡) 5현, 북해군(北海郡) 6현, 동래군(東萊郡) 7현, 동모군(東牟郡) 1현,

장광군(長廣郡) 4현 등 산동의 44현이 역시 백제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대대왕 때의 중국내 백제 자치군은 최소 15개군 이상이다.

대체로 회하(淮河)에서 제하(齊河)까지 태산(泰山) 이동의 산동반도를 소유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 많은 백제자치군이 중국 사서에 올바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북연왕 풍홍처럼 중국에 황제로서

자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백제로부터 통치를 받는 자치군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체적으로 25개군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송나라가 망하고 남제가 서는 변혁기에, 개로대왕이 11명의

장수를 서쪽으로 보낸 458년 이후로부터 백제 장수들이 활발한 대륙 경영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11년(489)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나라 남쪽 바닷가의 사람(海村人)이 이삭이 합쳐 있는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에 왕이 제단을 만들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11월에 남당(南堂)에서 여러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489년, 고구려는 신라를 침범하여 과현(戈峴)을 지나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490년 봄 2월에 신라는 비라성(鄙羅城)을 다시 쌓았다.

비라성은 문천군의 비라천일 것이다.

 

12년(490) 가을 7월에 북부(北部)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

두 성을 쌓았다.

나라 북부에 새로 쌓은 사현성은 곡산군 예성강 상류 사현리(沙峴里)에 있다.
사현성의 규모는 남변이 2000m인데 토성의 남벽이 남아있다.

궁암리라는 곳은 궁실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이산성(耳山城)은 황해도 해주의 우이산(牛耳山)을 고려하여 해주 수양산성으로 추정된다. 
수양산성의 어원도 우이, 즉 백이숙제였다. 
그러나 백이숙제가 해주에 온 일은 없었다.

중국에서 백제를 정벌할 때에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隅夷道)행군총관이라고도 했는데 


顯慶五年, 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熊津道>大總管, 統水陸十萬. 仍令<春秋>爲<隅夷道>行軍總管,


웅진도는 성왕의 수도 사비성으로 가는 길이고 우이도도 역시 서쪽 수도 해주로 가는 길로서 

백제의 동서 양성이라고 보여진다. 
백제 거발성에 해당한다.

부여풍장이 주류성을 나와서 수도로 삼았던 벽성과 같다.

부여풍장은 다시 주류성으로 퇴각했다.

 

예성강구 백천군 남쪽에 각산진이 있는데 신라와 치열하게 싸운 각산성으로 고려된다.
사현성은 원산시 남쪽 30km 지점의 사현 봉수 아래 강성리(江城里)로 고려된다.
9월에 왕은 나라 서쪽의 사비(泗~)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연돌(燕突)을 달솔(達率)로 삼았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13년(491) 여름 6월에 웅천(熊川)의 물이 넘쳐서 서울(王都)의 200여 집이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다.

웅천은 임진강이다.

가을 7월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600여 집이나 되었다.

14년(492) 봄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에 왕은 우명곡(牛鳴谷)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우명곡은 [대동여지도]로 보면 재령 서쪽 신천군의 마명천으로 추정된다. 

 

15년(493)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은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16년(4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고구려가 이를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어 주었다.


이는 고구려 문자왕 비문에도 나온다.

 

신라의 살수(薩水)는 강원도 영흥군의 전탄강이다.
살수에서 패하고 쫓겨간 신라군이 보전한 견아성(犬牙城)은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술(戌)은 견(犬)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이어지는 천앙봉天(仰峰) 또 북쪽의 왕장리(旺場里)도 개짖는 모습을 의미한다.

 

 

 

17년(495)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6월 8일이다.

 그런데 일몰 후라서 실제 관측되지 않으니 백제 시대의 일식 추산에 의한 것이다.

 Jun 08 17:23 P 103 1.090 0.851 64.7N 124.1E 0

 

가을 8월에 고구려가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해 오자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살수(전탄강) 위에 덕지강이 있다.

신라장수 이름을 딴 것이다.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삭주 평원군이었다.

이때 백제를 구원한 신라장수의 이름은 덕지(德智)인데

그의 이름을 붙인 덕지강(德池江)이 고원군(高原郡)을 가로지른다.
즉 덕지강과 금야강 하구까지가 5세기말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무렵 고구려가 다시 차지한 수곡성(水谷城)은 정평군(定平郡) 금진강 서남쪽 사수리 고성이다.

 

이 수곡성 건너편에 고구려는 석성을 쌓았으니 장곡성이다.

따라서 동해안에서는 금진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국경이 형성되었다.

금진강은 고구려, 덕지강은 신라, 백제는 요덕군까지이다.

무령대왕은 이때 청령천황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 함흥에 있었다.

고구려 문자왕에 의해서 백제 동부의 무령왕은 동성왕 백제와의 연결이 잘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하고는 연결이 있다.

 

19년(497) 여름 5월에 병관좌평(兵官佐平) 진로(眞老)가 죽자 달솔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여름 6월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20년(498)에 웅진교(熊津橋)를 가설하였다.
가을 7월에 사정성(沙井城)을 쌓아 한솔(~率) 비타(毗~)로 지키게 하였다.

사정성(沙井城)은 예성강 부여면의 사정리(沙井里)로 고려된다. 

 


 

 

 

8월에 왕은 탐라(耽羅)<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가 공물과 조세(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자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으므로 그만두었다.

탐모라(耽羅, 耽牟羅)는 제주도(濟州道)이고 무진주(武珍州)는 지금의 광주(光州)다.

 

21년(499)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여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한산(漢山) 사람으로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2천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2년(500)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었으며,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諫官)들이 반대하며 상소(上訴)하였으나 응답을 하지 않았고(不報),

또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궐 문을 닫아 버렸다.

고마성의 남성문을 닫아 버린 것으로 고려된다.

 

 


 

 

 

사론(史論):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로우며,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나 품행에는 이롭다.

이로 말미암아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자기를 겸허하게 하여 정사를 물었고, 얼굴을 부드럽게 하여 간언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간쟁할 수 있는 북(敢諫之鼓)을 달고,

비방하는 나무(誹謗之木)를 세우기를 마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牟大王)은 간하는 글이 올라와도 살펴보지 않았고, 또 궁궐 문을 닫고서 이를 막았다.

 장자(莊子)에 『허물을 보고도 고치지 않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모대왕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여름 4월에 우두성(牛頭城)에서 사냥하였는데 우박을 만나 그만두었다.

5월에 가물었다.

왕은 근신左右들과 더불어 임류각(臨流閣)에서 연회를 하였는데 밤새도록 환락을 다하였다.

 


 

 

 

23년(501) 봄 정월에 서울(王都)의 늙은 할멈이 여우가 되어 사라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남산(南山)에서 싸웠는데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고마성 동쪽 안협 아래에 돌로 쌓은 1950척 길이의 남산성이 있었다.

 

3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7월에 탄현(炭峴)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
8월에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加)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비(泗~)의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에 웅천(熊川)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백가로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다.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을 원망하였는데 이 때에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하였다.

가림성은 한강 하구 개풍군 궁천리에 가림동이 있는데 백마산에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의 가림성은 서림성이라고도 했고 새로 옮겨온 곳이라는 뜻이 된다.
성왕 대에 사비성이 옮겨가면서 가림성도 옮겨가고 그 뒤에 신라 덕물도(德物島) 진이 된 것이다.

도(島)가 꼭 바다의 섬이 아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남제(南齊) 건원(建元) 2년(480)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였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와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번국(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하노라.」

 

또 영명(永明) 8년(490)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렸다.

남제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를 책명(冊命)하여 돌아가신 조부 모도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아 말하였다.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받아 정성(精誠)이 먼 지역에서도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게 되어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었다.

 떳떳한 법전(彛典)에 따라 천명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往敬).

아름다운 위업을 받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않으랴.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을 삼는다.」』

 

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었다.

또 살펴보니 모대는 개로왕(蓋鹵王)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를 모도라고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실린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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