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왕 (재위 427~455)
비유왕(毗有王,412~465)은 전지왕의 아들이며 427년에 15세로 즉위하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말재주가 있어 사람들이 떠받들고 존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전지왕이 일본 포시산의 치은사로 물러나면서 백제왕위를 비유왕에게 넘겨준 것이다.
2년(428) 봄 2월에 왕이 4부(部)를 순행하여 위무하고, 가난한 자에게 곡식을 차등있게 주었다.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3년(429) 가을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상좌평 여신(餘信)이 죽자 해수(解須)를 상좌평으로 삼았다.
11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4년(430) 여름 4월에 송(宋)나라 문황제(文皇帝)는 왕이 다시 직공(職貢)을 닦았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
선왕(先王) 영(映)의 작호로 책봉해 주었다.
<전지왕 12년(416)에 동진이 전지왕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7년(433)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8년(434) 봄 2월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질 좋은 금良金과 명주(明珠)로써 답례하였다.
14년(440) 여름 4월 초하루 무오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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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1년(447) 여름 5월에 왕궁 남쪽 연못 가운데 불이 있었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으며,
밤이 새어서야 꺼졌다.
가을 7월에 가물어 곡식이 익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흘러 들어간 자가 많았다.
28년(454)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고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장(丈) 가량이었다.
가을 8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쳐 기근이 들었다.
29년(455) 봄 3월에 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에 검은 용이 한강(漢江)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해지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사실은 비유왕도 죽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비유대왕은 431년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백제왕 진동장군을 제수받았고 [송서] 450년조에는,
백제 비유왕(毗有王)의 신하로 서하태수(西河太守) 풍야부(馮野夫)가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던 기록이 있다.
서하태수의 서하군(西河郡)은 대동강 평양 서쪽 해안에 있던 군명(평안남도 증산현의 옛이름)이니
비유왕 때 백제의 국경이 최소한 청천강까지 올라간 것이며, 455년에는 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대동강 평양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한편 434년에 비유대왕은 신라에 사절을 보내어 말과 매를 선물로 보내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는 15년 뒤에 신라가 고구려를 배반하는 초석이 된다.
또한 비유대왕은 부왕의 복수를 위해서도 왜국에도 진출을 멈추지 않았으니
[신찬성씨록]에 비유대왕의 후손으로 불파련(不破連)이 있고, 비조호조(飛鳥戶造)가 있는데
비조호조는 비유대왕의 아들이자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의 후예이다.
438년 7월에 백제계 반정천황(反正天皇)이 교토 북쪽 미야쯔(宮津)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백제 비유대왕의 태자 개로왕자(蓋鹵王子)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개로대왕은 스스로 왜제왕(倭濟王)이라고 칭하면서 즉위하였다.
일본에서는 백제 비유대왕을 우비왕(宇斐王.412~465)으로 기록하였다.
비유왕을 뒤집은 것이다.
우비왕의 비문은 석절신사(石切神社)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그곳에서 비유대왕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생구산 석절신사
그러나 비유대왕의 능을 일본에 만들지는 않았으니,
개로대왕이 평양 지방에 거대한 비유왕릉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욱리하,
즉 위례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석곽(石槨)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당시에 석곽이 흔한 일이었다.
비유왕은 453년에 개로대왕에게 양위하였는데, 그후 비유대왕은 교토(京都)에 건너와서 몇 년간 살다가
돌아간 흔적으로서 교토 동북에 비예산(比叡山)이라는 산 이름이 남아있다.
즉, 개로대왕은 백제로 복귀하기 전에 동북 지방을 정벌했고 교토(京都)를 차지하였다.
다만 대화(大和)인 오사카는 아직도 신라인과 고구려인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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