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1.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05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왕[, ?~384]

 

 

 

근초고왕()의 아들로 후비()는 아이부인()이며,

 제15대 침류왕()은 아이부인의 아들이다.

이름은 《삼국사기》에 수(), 《성씨록》에는 귀수() 또는 근귀수(),

그리고 《속일본기()》에는 귀류() ·구소()로 되어 있다.

태자() 때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입을 받자 부왕의 명을 따라 반걸양(: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싸워 이들을 격퇴하고 추격해 수곡성(: )까지 영토를 넓혔다.

377년 10월 군사 3만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는 등 국력을 신장하였다.

그리고 중국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학자를 구하므로,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왕인()을

일본에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서기 日本書紀》에는 ‘귀수(貴須)’ 또는 ‘귀수(貴首)’로,

《신찬성씨록》에는 ‘근귀수(近貴首)’로 표기되어 있다.

태자 때부터 부왕을 도와 정복사업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369년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천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특히 371년의 평양성전투에서는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다시 귀순해온 사기(斯紀)의 군사기밀 제보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즉, 사기의 제보에 따라 고구려군의 허실을 파악한 뒤 고구려군 제일의 정예부대인 적기부대(赤旗部隊)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승세를 잡아,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진군한 뒤,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고서 회군하였다.

이때 더 북진하려 하자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도덕경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명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확립된 초고왕계의 왕위계승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장인인 진고도(眞高道)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남하하여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부친인 오키나가노숙녜(息長宿彌命.321~384)는 개화천황(開化天皇),

즉 왜여왕 일여(壹與)의 후손이다.

오키나가노숙녜의 딸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命), 신공황후(神功皇后)는 혈통적으로

여제사장이 될 자격을 타고났다.

그녀의 기도에 답하고 그녀를 수호한 것이 결국 응신천황(應神天皇),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신공여황 고분 내의 명문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조작된 [일본서기] 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아비인 오키나가노숙녜(321~384)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라 타당하지 않고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이나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보다도 30여세나 많아서

그들의 황후가 될 수 없다.

신공황후의 조작된 연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신공황후의 숨겨진 본신(本身)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

부인이 된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336~390)다.

 

[일본서기]에서는 궁주택원(宮主宅媛)이라고 하였다.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이고 오키나가씨(息長氏)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의 히코마쓰(日子坐王)으로서 똑같다.

궁주(宮主)는 본래 후비(后妃)를 의미하는 고어다.

이미 왕에게 시집간 여자다.

즉, 성무천황의 후비 신공황후에 해당한다.

 

야가하에(矢河枝)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근구수대왕비 아이부인(阿爾 夫人)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신공황후는 남장을 하고 활팔찌를 차고 다녔는데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가 신공황후다.

응신천황이 일본에 와서 그녀를 만나고 미모를 치하하는 노래를 남겼다.

그 노래 중에 그녀의 뒷모습은 방패(楯)와 같다고 하였다. [後姿は 小楯ろかも ]

신공황후 고분의 이름이 방패(楯)이 들어간 “순열릉(楯列陵)”이다.

또한 아이부인(阿爾夫人)은 야가하에의 족성인 와니씨(和邇氏)를 의미한다.

와니씨는 우리 발음으로 와이가 된다.


362년경에, 성무천황의 황후로 간택된 26살의 오키나가타라시히메는 결혼후에 시가국으로 물러난

성무천황과 떨어져서 오사카의 본가에 돌아와 있었고, 그후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

불린 것이다.

그녀는 성무천황의 대신이었던 타케우찌노숙녜(建內宿禰.266~371)를 만나서 속죄의 방법을 물었는데,

 362년에 근구수왕자(近仇首王子)가 일본으로 와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근구수왕자-응신천황은 신공황후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하여 부인으로 삼았고,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비이자 침류대왕 모후로서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백제기]에 모후가 기록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온조대왕의 모후 소서노(召西努)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그리고 아이부인 단 셋이다.

아이부인과 팔수부인은 일본 출신이라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는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를 만나서 따르게 된 것을 강신(降神)으로 기록해 놓았다.

신공황후는 성무천황이 가졌던 일본의 중심인 오사카(大阪) 대화(大和)의 영토를 다시 찾으려

하였으므로, 근구수왕자를 따라 백제로 가서 침류대왕(枕流大王.363~422)을 임신하였다.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夏)과 겨울(冬),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일본서기] 저자 사인친왕은 363년에 있었던 응신천황의 신라 침입을 신공황후의 정벌로 조작하기

위해서 무려 백년전에 있었던 249년 신라 각간 우로 살해 고사와, 신공황후 죽은 후에 있었던

401년 미사흔 왕자 인질 제공 이야기를 모두 신공황후의 공적으로 편입시키고 후세에 믿으라고

했는데 치졸한 편찬이었다.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왜왕의 수호신, 혹은 임명장으로서, 백제 근초고대왕이 367년에 하사한 칠지도(七枝刀)

일본에 남아있다.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년 [6]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六]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몇월인지가 정확히 판독되지 않았는데 고대 문귀 상식으로는 가장 화기(火氣)

극성한 5월 병오일이 맞다.

그러면 362년이 된다.

그러나, 태화 원년이 되는 359년은 백제가 태화로 개원할 명분이 적다.

그러나, 364년은 60년에 한번인 갑자년甲子年이라서 개원 원년의 명분이 된다.

이렇게 추정하면 367년 6월 15일이 백제 태화 4년 6월 병오일이 된다.

또한 갑자년 364년에 백제 사신이 탁순국(卓淳國)을 통해 왜국으로 오다가 억류되어

신라로 압송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그래서 수년 후에 백제와 왜국이 연합하여 탁순국을 비롯한 가야를 쳐서 복속시키고

새로운 교통길로 삼는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 식장천(息長川)

시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滋賀縣坂田郡天野川(息長川)流域

 

즉 백자국 위치는 시가현(滋賀縣)이 된다.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

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禰)가 백동 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男弟王)은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의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367~396, 교정 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矢河枝比賣)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지노와케 석관에 기록된 367년에서 396년까지의 나이는 왜왕으로서의 재위 연대로 보면 맞는다.

성무천황이 천황위에서 쫓겨난 것이 362년이고, 그후 1년 뒤에 신공황후 몸에서 태어났으면 363년이

적정하다.

363년에 태어나서 367년에 칠지도를 받아서 왜왕으로 즉위하고 383년에 근구수대왕과 왜왕위를 바꾼

것이다.


또한 383년 계미년에는 즉위 16년을 맞아서 우전팔번인물화상경에서 왕16년이라고 기록했다.

즉 367년에 즉위한 것이되는데, 칠지도에서 기(奇)를 왜왕으로 임명한 해가 태화 4년으로서 367년이었다.

383년 이때가 침류대왕의 나이로는 20세였으니 약관(弱冠)의 나이를 맞아서 사마숙녜가 선물을 올린

것이다.

혹은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대왕으로 부임하게 되는 장도(壯途)에 오를 때에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383년에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응신천황이 되고 그 아들 왜왕기는 백제의 침류대왕이 되었다.


(주) 화상경을 만들어 받친 사마가 응신천황의 신하였던 사마숙녜(斯摩宿禰)인데 백제의 사마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으로 착각하고, 남제왕을 506년 즉위한 계체천황(男大迹天皇)으로

곡해하고 보면, 계미년은 계체천황 즉위 3년전인 503년이라서 맞지 않다.

계체천황은 오로지 응신천황이었던 근구수대왕의 5대손일 뿐이다.


한편 신공황후였던 미야누시야가하에는 이로도야타노와키이라쯔메(妹八田若郞女.373~426)

메토이(女鳥王.376~411)을 낳았다.

370년에 성무천황이 죽었으므로, 이는 신공황후가 일본에 돌아간 이후로도 다시 백제를 왕래하였던

것이 된다.

응신천황은 미녀 카미나가히메(髪長比賣命.378~424)를 취하려다가 아들인 인덕천황에게 주었다.

카미나가히메를 취할 때의 여자 나이가 15세는 되어야하니 393년경이 되고 이때 근구수대왕은

73세 무렵이니 거의 죽을 때였다.  

 

 

 그림 :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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