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9. 걸왕의 일본 진출

오늘의 쉼터 2008. 9. 17. 10:36

 

 

◈ 걸왕의 일본 진출 (재위343-346)

 

 

 

걸왕(契王)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3년(346)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283년 왜여왕 일여(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사비왕의 아들이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

즉위하였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부여 의려왕(依慮王)이 백제 일본을 빼앗았다.

 의려왕은 효령천황(孝靈天皇. 261~316)이 되었다.

효안천황은 오오사카의 대화를 빼앗기고 미와산으로 피신하였다.
미와산(
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 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일본에 제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300~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 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요양시에 위치했던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 백제 사비왕의 아들)이

298년에 서거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大帶日子)가 되었다.

타라시(帶)는 대방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왕(責稽王)이 300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 의라왕이 숭신천황이 되어서 침탈하였으니,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복수하기 위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 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 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 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
若帶日子命. 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 295~333)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
五百木入日子命. 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品陀眞若. 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딸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 318~366).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 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 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
五百木入日子命. (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

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걸대왕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郎女命. 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 302~348)카무쿠시(神櫛王命. 308~350)가 경행천황이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碓命. 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 295~333) 

비류대왕(比流大王. 재위306~343)의 아들들이다.

 

 

일본에서 전사한 근초고왕의 형인 오호우스(大碓命. 295~318)묘와 그를 모시는 원투신사.

아이지현 도요다(豊田市)시에 있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
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백제 걸왕인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契), 걸(契)과 경(景)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白)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
斯呂)는 대(代)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계(契)를 일본에서는《게이》로도 읽지만《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
帶)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는 백제 대방 출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규슈를 탈환한 것이다.

또한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 295~384)이

일본 본토를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경행천황은 근초고왕자 형제들과 일본 정벌에 동참했다가 아이지현 풍전시에서 살았고,

근초고왕자가 333년에 백제로 돌아온 후에 일본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43년에 백제대왕으로 왔었고 3년만에 실각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교토에 살았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근초고왕의 직할로서 길비(吉備) 주재 대신인 주길대신이 오오사카를 다스렸다.

 

풍전시 경행천황 히시로궁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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