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8. 비류왕의 일본 재건

오늘의 쉼터 2008. 9. 17. 10:28

 

 

◈ 비류왕의 일본 재건(재위306~343)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은 166년부터 일본에서 활약하고 214년부터 백제왕으로 재위하여 234년에 죽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비류왕이 그 둘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비류왕이 166년에 태어났으면 180년을 산 것이 된다. 

따라서 구이왕의 아들이거나, 구수왕의 손자로 본다. 

일본에 진출한 것으로 보아서 구수왕의 손자로 고려된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였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民間)에 있었지만 명성은 널리 퍼졌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로써 비류가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5년(308) 봄 정월 초하루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월 31일인데 남반구 일식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06 Jan 31 02:46 T 84 -0.374 1.041 39.1S 147.9E 68 147 03m23s

 

9년(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 아이, 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 사람당 세 섬을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10년(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南郊)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왕이 제물로 쓸 짐승을 친히 베었다.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17년(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쏘는 돈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활쏘기를 익혔다.

 

18년(321) 봄 정월에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22년(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풍랑(風浪)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내신좌평 우복이 근거한 북한성이 대동강 평양성이니 비류왕의 수도가 요양시 비사성이었을 것이다.

 550년에 대동강 평양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어서 고구려 양강왕이 쫓겨간 곳이 비진류도(比津留都)라고 하였다.

 바로 요양시 태자하 비사성을 의미한다.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진의(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뢰가 쳤다.

 

32년(335)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으로 12월 31일인데 한반도는 밤중이라서 관측이 불가능하다. 

추산으로 기록한 일식으로 보인다. 0335 Dec 31 21:28 P 95 1.143 0.715 64.7N 164.9W 0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살별(彗星)이 규(奎) 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

41년(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근초고왕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써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

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비류왕의 후손이다.

비류왕 즉위초에 일본 재건을 위한 진출이 활발하였다.

 

 

선비족 전연국의 강성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314년에 대방, 315년에 현도를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318년 고구려의 전연 수도 대극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릉하의 양평과 요하 하구 서안의 평곽성 등 요동군은 전연국이 다시 가졌는데 그 선봉이 백제인 장통이었다.  
333년 전연의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승계하였다.

이때 작은아들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켜 평곽성에서 모용황과 대치하였다. 
336년 모용황은 창려로부터 얼어있는 바다를 도보로 건너서 평곽성으로 진군하여 모용인을 토벌하였다.

 

336년 6월에 단료(段遼)의 동생 단란(段蘭)이 곡수정에 주둔하여 전연의 유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모용황이 출병하니 단란은 후퇴한 후에 다시 유성으로 돌아오는데 전연군은 이에 대비하여 유성 부근에

매복(柳城左右設伏以待)했다가 치기로 하는데 매복한 곳이 마도산(馬兜山)이었다.

그리하여 전연군이 승리하였다.
전한시대 유성(柳城)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었다.

     馬首山在西南.
이는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었던 조양시가 아니다.

전한시대 유성은 북쪽에서 삼류수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해안이 가까운 곳이니(參柳水北入海)

 이는 조양시가 될 수 없다.
마수산과 마도산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마도산(馬都山) 전투는 734년 발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곳이며 이는 신당서 <오승체전烏承玼>에 나온다. 

<거란전>에서 732년 거란이 당나라를 칠 때는 유관도산(渝關-都山) 전투라고 하였으니 바로 임유관 앞이다. 
한편 [대진국본기]에는 요서의 대산(帶山)이라고 하였다.

이는 수나라가 유성(산해관)에 설치한 요서군의 대방산과 같은 것이다.


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따라서 모용황과 단란이 싸운 유성은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한나라 요서군 유성이었고

뒤에 당나라 유성, 평로성이었다.


338년 4월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수십만 대군으로 전연국 대극성을 치러왔는데 모용황은 이를 막아냈고 

석호에게 항복했던 연나라 장수들은 죽거나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이때 조군을 물리친 모용각이 341년에 평곽에 부임하여서 고구려, 백제를 막았다.

339년 모용황은 동진의 책명을 받아서 결호하였다.

342년 10월 모용황은 조양시 화룡성으로 천도하였다.

조나라가 바다로 침입해오기 때문이고 333년에는 모용인도 바다로 극성을 치려고 했었다.
342년 11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을 끌어왔다.

화룡성의 배후를 안정시킨 것이다.
345년 1월 연국왕 모용황은 용성에 끌어모은 타부족인 구려,
백제,우문부, 단부인들로 고민하여

이들을 서부로 옮긴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

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백제인들이 전연국 모용황에게 잡혀간 기록은 따로 없다.

그러나 313년에 고구려에 쫓겨서 모용외에게 투신한 낙랑태수 장통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345년 10월 모용각은 고구려 남소성을 빼앗았다.

    慕容恪攻高句麗南蘇,克之,置戍而還
346년 1월에는 모용준과 모용각이 부여를 쳐서 그 왕 여현(餘玄)을 사로잡고 5만여명을 끌어갔다. 
본래 부여는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에게 침략을 받아서 연나라 근처에 왔다고 하였다. 

    夫餘居於鹿山,爲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부여를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녹산은 발해 녹군현이었던 요나라 건주로서 보면 의무려산 남단이다.

의라왕이 이곳에 있다가 일본에 가서 숭신천황이 되었고, 백제 분서왕의 낙랑서현 공략 때에

이 곳의 부여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모용황이 친 부여는 곧 백제다. 
이때 끌려간 부여왕의 이름도 백제 왕자 이름으로 고려되는 여현(餘玄)이다. 

여현은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고 여현의 아들은 여울(餘蔚)인데 부여왕자라고 칭했으며, 

370년 부견이 전연국을 멸망시킬 때에 전연국 수도 업성 문을 열어 부견을 들어오게 하였고, 

 

384년 모용수가 후연국을 세우니 후연국의 재상까지 되었다. 
후연은 요하 하구 평곽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의 복주 부여성을 친 것으로 고려된다.
전연국으로 끌려간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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