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0.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오늘의 쉼터 2008. 9. 17. 10:49

 

 

◈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346~375)(태화360~375)

 

 

근초고왕자의 일본 정벌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근초고대왕은 비류왕 시대에 일본에 가서 야마토타케루라고 하였다.

일본무존(日本武尊)이라는 뜻이다.

또는 왜국의 건국자로서 왜건명(倭建命)이라고도 했다.
근초고대왕이었던 일본무존의 빈 고분 기록에 의하면,

295년에 태어나서 333년에 일본을 떠났고, 374년까지 80세를 살았다.

일본무존의 고분은 일본무존이 백제로 떠난 뒤에 만들어진 빈 고분으로서 인덕천황기에도 확인된다.

 


오오사카 금탄원의 백조릉


일본 교토(京都) 대진시(大津市)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는 신사에 모시는 제신(祭神)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祭神四座 八姓の祖神である。
 第一 今木神 〔いまき・景行天皇の子〕  日本武尊 源氏の神

 第二 久度神 〔くど・日本武尊の子〕   仲哀天皇 平氏の神

 第三 古開神 〔ふるあき・応神天皇の子〕 仁德天皇 高階氏の神

 第四 比賣大神〔即ち〕          天照大神 大江氏の神

 第五 縣(あがた)社 天穂日命 中原・淸原・菅原・秋篠の四姓の祖神

즉,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1신은 금목신이자 일본무존이고,

제2신은 구도신久度神인데 일본무존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신은 일본무존의 아들인데다가,

 (구도신은 같은 일본무존의 아들인 중애천황과 별개 인물이다.)
또한 구도신
久度神은 백제 상고왕尙古王(=近尙古王) 즉, 근초고대왕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久度神は百濟の祖 尙古王の子仇首王(日本音くど)
여기서 상고왕尙古王은 조고왕照古王,

즉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따라서 구도신, 근구수대왕을 낳은 일본무존은 당연히 백제 근초고대왕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현재 이들 히라노
平野
신사의 4신을 모두 백제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日本京都にある "平野神社"は倭王が先祖たちのために祭祀をあげた所だ..

927年完成された日本古代王室文献"神名帳"を見れば李Hiranoジェントルマンに対して

"平野祭神は四座であり 四時祭式には 今木神, 仇度神, 古開神, 相展の 比賣神であり

4神が皆百濟王だ" やっぱり倭國は百濟王に祭祀を執り行なうので屬國イヨッネです~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교토 경행천황의 궁터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무존의 일본 정벌에 사용했던 주몽검(都牟劍)=(쿠사나기쯔루기)를 신으로 모신

아뜨다신사(熱田神宮) 기록에 의하면,

열전신궁의 말사인 소시모리사(末社曾志茂利社)에서는 거무리대신(居茂利大神)을 제사하는데,

이는 스사노오의 별명이라고 전한다.
단, 스사노오신, 즉 초고대왕은 그 바로 옆의 남궁신사(
南宮神社)에서 따로 모신다.

따라서 거무리대신은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의 별명이 아닐 것이다.

 

히라노신사의 금목신(今木神)과 아뜨다신사의 거무리(居茂利)대신은 그 표기가 유사한 것인데,

뒷부분 목과 무리(茂利)우리말 물, 강을 나타낸다.
앞부분
今(이제 금)居(있을 거)의 훈(訓)을 취하면 일본말 “이사”가 되고,

이는 우리말의 숫자 “하나”“一”를 의미한다.
따라서 합쳐서 “하나-물”을 우리말로 바꾸면 백제의 한수가 된다.

그래서 거무리대신과 금목신은 한산(漢山)으로 천도한 한성백제의 왕 근초고대왕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목木의 일본 발음 기(き)는 성(城)의 일본 발음 기이기도 하다.

즉 히라노신사의 제1신, 금목신은 백제 한성신(漢城神),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그가 바로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이고 근구수대왕의 부왕인 근초고대왕이다.
히라노 신사의 제 2신 구도신은 근초고대왕의 아들로서 근구수대왕(
近仇首大王)이자,

일본의 응신천황(應神天皇)이고, 오사카에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따로 있기도 하다.
제 3신 고개신(
古開神)은 후루아기(ふるあき)라고 하는데,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침류대왕(枕流大王)의 “류(流)”의 훈(訓) “흐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된다.

후루는 강(降)의 발음이기도 한데 흘러내려왔다는 말이다.

즉 신공황후인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통해 강신(降神)하였으므로 후루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제 4신 히메(
比賣)신은 환무천황(桓武天皇)=(737~806)의 어머니의 조상이다.

그런데 백제계 도래인 화씨(和氏)의 후예라고 한다.

 

桓武天皇とその生母の高野新笠が祀っていた神樣であった。高野新笠は和氏(やまとし)出身で、この

和氏が百濟系渡來氏族であった。したがってこれら神樣は桓武天皇の母系に繫がっている。


이 히메(
比賣)신은 응신천황의 부인이 되고 침류왕을 낳았던 신공황후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의미한다.
근초고대왕(재위 346~374)
은 일본무존으로서 333년에 39세로 죽었다고 금탄원(琴彈原)의 백조릉에

기록되었는데, 이 333년은 근초고대왕이 39세로 일본 정벌 후에 백제로 돌아간 해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일본무존은 갑자기 병이 들어 백조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였고 그래서 백조릉이란

곳이 일본의 여러 곳에 생겨났다.

 물론 한반도를 바라보는 큐슈 서북 해안에도 있는데 그가 떠나간 마지막 장소에 세워진 고분이다.
근초고대왕의 일본 후비들 중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후타지노이리히메(
布多遅能伊理毘賣)=(297~363)

있어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을 낳았다.

근초고대왕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4~343)의 차자이고,

걸대왕의 부왕은 백제 분서대왕(298~304)이었다.
근초고대왕, 일본무존은 태자도 아닌 세째 왕자로서 298년 숭신천황에게 죽임을 당한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왕자가 일본 탈환 공격에 나서니 함께 참여하여 큐슈를 먼저 공략한다.
큐슈는 이미 먼저 온 경행천황이 일부 점거하고 있었지만 큐슈를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초고대왕의 형이라는 오호우스(大碓命)
은 295년에 쌍동이로 태어나 318년에 24세로 죽었는데

숭신천황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직접 큐슈 정벌을 완성하고, 당시 재왕(
齋王)이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야먀토히메(倭比賣)=(277~366)를 만나서 히미코 이래로 여제사장이  보관하던 주몽검을 건네받고

큐슈 정벌에 도움을 받는다.
부여계인 숭신천황에 대항하여 가야계와 백제계가 연합했던 것이다.
근초고대왕이 일본 본토 이즈모를 공략하고 다시 나라현을 공략하고 도꾜(
東京)를 공략할 때에

야마토히메가 준 쿠사나기쯔루기(草雉儉)를 사용하였다.

이후에 일본 동경은 근초고대왕의 장자인 호무야와케(品夜和氣命)=(311~374)가 물려받았다.
일본의 히라노신사(
平野神社)는 백제 근초고대왕과 근구수대왕, 침류대왕, 그리고 근구수대왕비

신공황후를 모시는 백제인들의 신사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구도신사(
久度神社)는 구도(久度)대신과 팔번(八幡)대신을 모시는데

지금 구도대신의 신분을 감추었지만 역시 근구수대왕이고, 팔번대신은 그 아들 침류왕이 가장 유력하다.

근초고왕이 백제에서 일본을 통치하던 성무천황 때에 일본 땅의 분봉(分封)이 많았는데

성무천황도 분봉을 받은 일본의 지방왕이었을 것이다.
그의 영역은 경행천황에게 물려받은 시가
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 있던 오호쯔시(大津市)다.
근초고대왕의 장남인 호무야화기(
品夜和氣命)=(311~374)은 도쿄(東京) 부분에 분봉받고,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에 분봉받은 것이 된다.

 

동경(東京) 신내천(神奈川)의 한천(寒川)에 위치한  대신총(大神塚)에는 응신천황의 형이라는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묻혀있다. 

그는 311년에 태어나 64세로 374년에 죽었는데 근초고대왕의 장자다.


그리고 왜국 중심인 오사카(
大阪)는 경행천황 때에 근초고대왕이 둔가(屯家)를 두어서 백제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 곳은 주길대신(住吉大神) 3명이 함께 관리하였던 것으로 고려된다.

관리는 근초고왕의 아들인 중애천황이 하였다.
백제가 왜국을 나누어 국군(
國郡)에 군장(君長)을 두고, 현읍(縣邑)에 수거(首渠)를 두었는데,

이때 여러 백제 왕자들에게 일본 땅을 분봉하였던 것이다.

수거(首渠)는 마한(馬韓)의 제도인 읍장 거수(渠帥)를 뒤집은 말이다.

 

 

근초고대왕은 346년 모용황의 부여성 침략으로 5만명이 끌려간 후에 걸대왕을 폐위하고

백제 대왕으로 즉위하였다.


2년(347) 봄 정월에 천신(天神)과 지신地祇에게 제사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21년(366) 봄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23년(368) 봄 3월 초하루 정사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4월 4일 아침 7시 59분에 있었다.

0368 Apr 03 22:59 A 93 0.887 0.998 55.6N 147.2E 27 17 00m09s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良馬) 두 필을 보냈다.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치양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쟁탈지인데 신라 장수 덕지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동해안의 패하인 금야강의 평주성으로 고려된다.

 당시에는 비류수라고 불렀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 데 깃발은 모두 누른 색(黃色)을 사용하였다.

이는 대동강 한수로의 천도를 준비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라, 가야에 대한 전쟁이기도 하다.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요양시 태자하가 고대의 패하다.

온조왕 때 백제의 북계였다.

 

370년 전연국이 전진국에게 멸망할 때 고구려 백제의 강역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고구려 평양성은 패수에 있던 구도 평양성이다.

서울(都)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삼국유사]에서는 북포산(北浦山)으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사기]에서는 북한산군이라고 하였고

고구려 평양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안학궁을 의미한다.

태화궁이라고도 했는데 근초고왕의 연호가 태화이니 태화연간(364~375)에 지어서 천도한 것이다.

 


 

 

 

27년(372) 봄 정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8년(373) 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근초고대왕은 연호를 세웠는데 태화(泰和)라고 하였다.
근초고대왕이 오사카에 두었던 아들 중애천황이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공격을 당하여

355년에 규슈로 쫓겨났다.
그러자 백제 근구수왕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362년이다.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을 살려주고 그의 후비인 신공황후를 취하여 백제로 데려왔는데 백제에서는

아이부인이라고 불렀고 그녀의 아들이 침류왕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왜왕으로 임명하면서 태화 연호가 새겨진 칠지도를

주었는데 침류왕에게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왜왕의 수호신, 혹은 임명장으로서, 백제 근초고대왕이 367년에 하사한 칠지도(七枝刀)가 일본에 남아있다.

 

 


칠지도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
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칠지도의 명문이 몇월인지가 정확히 판독되지 않았는데 고대 문귀 상식으로는

가장 화기(火氣)가 극성한 5월 병오일이 맞다.

그러면 362년이 된다.
그러나, 태화 원년이 되는 359년은 백제가 태화로 개원할 명분이 적다.

그러나, 364년은 60년에 한번인 갑자년(甲子年)이라서 개원 원년의 명분이 된다.

이렇게 추정하면 367년 6월 15일이 백제 태화 4년 6월 병오일이 된다.
또한 갑자년 364년에 백제 사신이 탁순국(
卓淳國)을 통해 왜국으로 오다가 억류되어 신라로 압송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그래서 수년 후에 백제와 왜국이 연합하여 탁순국을 비롯한 가야를 쳐서 복속시키고 새로운 교통길로 삼는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
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
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비파호 서안에 있는 시로히게신사(白鬚神社大鳥居と琵琶湖)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

식장천息長川은 시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滋賀縣坂田郡天野川(息長川)流域.

즉 백자국 위치는 성무천황이 있던 시가현(滋賀縣)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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