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사왕과 아신왕
[1].진사왕(재위384~391)
진사왕(辰斯王, 346~395)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2년(386) 봄에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3년(387) 봄 정월에 진가모(眞嘉謨)를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389) 가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6년(390) 가을 7월에 살별이 북하(北河)에 나타났다.
9월에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도곤성(都坤城)은 함경남도 덕성군의 압파천(押波川)으로 고려된다. 주변은 고대 철산지이다.
왕이 진가모(眞嘉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7년(391) 봄 정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으며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특이한 화초를 길렀다.
여름 4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赤峴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아 맞혔다.
8월에 또 횡악(橫岳)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8년(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6월 7일이다.
0392 Jun 07 05:55 A 82 0.082 0.987 27.8N 90.0E 85 45 01m26s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구원(狗原)의 행궁은 평안북도 개천군(价川郡)으로 고려된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391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에 잡혀갔던
본국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는 것은 <백제기>에서 석현성 등 10성이니 관미성은 그 남쪽이다.
석현성(石峴城)은 고이왕 때 중국 진출을 위해서 열병을 했던 석천(石川)과 관련된다.
즉 석천(石川)에 석현(石縣)이 있는 것이다.
신금시(新金市) 서남쪽에 석하진(石河鎭)이 있는데 석천으로 유력하다.
석하보성(石河堡城)이 있다.
그 석하(石河)를 따라 올라가면 온가구성(溫家溝城)이 나오는데
설인귀와 싸운 온사문의 석성(石城)으로 고려된다.
서북쪽에는 고대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는데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곳이 바로 횡산이고
온사문을 잡았다는 곳이 석성이다.
이 온가구 석성이 바로 백제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이 391년 석현등 10성의 공취는 미천왕 때 차지한 낙랑 땅인 요양시 패수로부터 남하하여서 신금시까지
요동반도 서해안을 거의 장악한 것이다.
관미성 공취는 석현성 공략 3개월 후에 이루어진다.
석현성등 5성을 탈환하기 위해 아신왕의 장수 진무가 관미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므로
관미성은 석현성의 남쪽이 된다.
또한 일곱길로 공격한 것은 석하보 서남쪽의 칠정산진(七頂山鎭) 칠정산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관미성은 바로 칠정산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사왕이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
[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
木?宿彌,?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王而歸
한편 윗글에
또한 그가 일본 땅에도 석천현(石川縣)을 건설했을 것이다.
아신왕의 즉위 직후 관미성 탈환 작전은 이들 왜군의 연합작전이었으나 실패한 것이다.
백제의 고구려 평양성 공략은 근초고왕 때에 요양시 패하(백제 북계)에서 매복 반격하고서
패수 평양성 공략으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바가 있다.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346~395)로 나온다.
대산수명이 곧 진사왕이라는 사실은 [고사기]에서 침류왕의 대산수명 살해장면 기록에서 나온다.
진사왕은 응신천황(=근구수대왕)이 그를 태자로 하지 않은 것에 항상 원망을 가졌고,
394년 응신천황 서거 이듬해에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을 죽이려고 준비했다가
미리 대비를 갖춘 침류대왕에게 죽는다.
침류대왕은 그와 물놀이하다가 배를 뒤집고 빠져나가서 진사대왕을 강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서 익사시킨다.
침류대왕은 일부러 대마로 된 가벼운 옷을 입었고 진사대왕은 무거운 갑옷을 숨기고 있었다.
대산수명이 죽어갈때 강에서 떠내려가며 이르른 곳이 가와라(詞和羅)였다.
강가에 올라갈 수 있게 제발 가라고 가라 가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가와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니 가와라로 인하여 그를 위한 가라신사(辛國神社)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가라신사에 진사대왕 후손의 족보가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능은 보잘 것 없이 초라하여 10m 내외의 봉분을 했으며 나라현에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침류대왕이 그를 죽인 곳이 고라(考羅)의 나루터였다.
여기서는 진사왕을 참수하지 못하고 익사시킨 것에 대해 한탄하는 침류대왕의 노래가 적혀있고
이때 부왕을 생각하여 같은 부왕의 자식인 진사왕을 베지 못하여 이를 재궁단(梓弓檀)이라는
나무에 비유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이니 역시 가라로 읽었을 것이고 가라신사(辛國神社)의 유래가 된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 岡原連; 出自百濟國辰斯王子知宗也
귀수왕의 아들 진사왕의 아들 태아랑군의 아들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에서 3파로 갈라졌는데
모두 관야조신이 되었다.
百濟辰斯王後裔氏族の系譜
百濟貴須王→辰斯王(391년경 도래!)→太阿?王→亥陽君→午定君より三腹に分枝
①味沙→白猪史→葛井連、宿?→蕃良朝臣→菅野朝臣
②辰璽→船史→王後首→宮原宿?、御船宿?→菅野朝臣
③麻呂君→津史→津連→津宿?、中科宿?→菅野朝臣
이들이 모시는 신사가 하내국(河內國) 지기군(志紀郡) 후지이시(藤井寺市藤井寺)에 있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다.
등정사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
[2]. 아신왕(재위391~414)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 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 340~406)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
현지에서는 갈성씨 고분으로 알려졌지만 아신대왕릉이다.
일본의 오카누케후타마왕이 아신대왕인 것은 계체천황이 무령대왕의 서형(庶兄)으로 증명되면서,
즉 개로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개로대왕의 고조할아버지이자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아신대왕이 와카누케후타마왕이 된다.
[일본서기]에서 아신왕을 아가왕(
아신왕(阿莘王372~424)<혹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하였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漢城)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
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8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2년(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무(武)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전지(~支)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서제(庶弟) 홍(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함흥 남쪽 정평)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4년(395) 봄 2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진무(眞武) 등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는 [아리모려 묘지]에서도 보인다.
"광개토대왕은 때어나서 웅대하여 남벌백제하고 북벌거란하고 또한 왜구와 싸워 탕진시켜 대승을 거두고
귀환하였고 다시 패수에서 (백제를) 대패시켜 팔천을 사로잡고 돌아왔다."
廣開土地大王生而雄[偉] 南伐百殘 北伐契丹 又戰倭寇 蕩盡大勝而歸 又大戰 浿水大敗 賊虜獲八千餘級而還
위 묘지에서 남벌백제는 391년, 북벌거란은 395년, 왜구와의 싸움은 394년 동해안 함흥 정평에서 있었던
수곡성 싸움, 그리고 패수전은 395년 가을8월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평안북도 희천군) 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많이 얼어죽자 군(軍)을 돌려 한산성(漢山城; 평양시 왕성탄)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이 직후에 광개토왕이 쳐내려왔다.
이는 광태토왕비문의 396년 전쟁이다.
<광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 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58성을 빼앗았다.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 (지도는 아래 보충설명에 있습니다.)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팔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온조 한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백잔남거한성이라고도 한다.
이어지는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항복하고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이때 아신왕은 한산성에서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아신왕은 이후에 고구려와 새로운 국경이 된 한수, 즉 대동강을 맞대고 있는 한성에 도읍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다.
[일본서기]에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원이라고 한다.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의 여인이라는 뜻)은 일본에 가서 천황의 비가 되었다.
따라서 신제도(新濟都)는 백제의 새도읍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때 아신왕의 임시 수도는 황해도 토산군 북포리로 고려된다.
토산군도 본래 도산(都山)을 의미이고, 물건너 동쪽의 강원도 철원군 안협현이다.
안협현의 옛이름은 아진압현(阿珍押縣)이다.
이는 신라장수 아진함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진함은 672년 당나라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667년에 아진함성이 등장하므로 이때 신라가 진입했던 것이다.
안나함이라고도 하였다.
안협현은 궁악현이라고 하였는데 궁악(窮岳)은 궁산(宮山)을 의미한다.
토산군 북포리가 성터이다. 물이름은 동대천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대천의 서쪽이 주인 성이다.
안협 만경산성이 더 중요하면 동대천이 아니라 서대천이어야 한다.
본래 임진강인데 그 상류는 고미탄천이라고 하였다.
즉 고마성이 있던 곳이다. 아래 삭녕군의 물이름은 금강(錦江)이라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 거성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데 거발성과 관련될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반정천황의 부인이 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新濟都)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신제도가 고마성이다.
북포리의 고성터는 강물이 감아 도는데 중간에 강물을 잘라서 참호를 만들었다.
북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중간에 대로가 있다.
대로의 동서 길이는 2000m 정도이며 그 안에 평지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동성왕이 임류각에서 놀면서 성문을 닫아 버리는 일이 있는데 이는 남성을 닫아 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서쪽 기달산(=고애주산)에 북소궁(北蘇宮)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궁궐 유기가 있다고 하였다.
소부리성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되니 고마성시대 사비성이라고도 하며 동성왕이 사냥하던 곳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북소궁 위치를 고도(孤島)라고도 하였고 지금 지명은 왕당리, 성내리다.
서북쪽 수안군에 새로운 위례성이 생겨난다. 제2 위례성이다.
위라진이 남아있고 위라천은 위례성천의 전음이다.
훗날 성왕 시대에는 충청남도 직산에 위례성이 세번째로 생겨났다.
서쪽은 부여성(사정성)이 생겨난다.
토산군 우봉현 위치에 우두성이 생겨났다.
북쪽에 사현성을 지었다. 새로 지은 왕궁이 있었는지 궁암면이라고도 하였다.
남쪽은 태백산성(대곡성)이 생겨나서 호위하였다.
다지성이라고 하였고 일본 반정천황이 태어난 곳이다.
남쪽 태백산성, 충청남도 사비성인 부소산성과 배치가 매우 유사하다.
그외 서쪽의 오곡성이 오관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자비령 동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백제 아신왕이 임시로 후퇴한 수도 아신한성은 임진강에 있었고 예성강은 주요 방어선이었다.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琠支)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에 한수, 즉 대동강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397년에 백제는 다시 대동강 남쪽에서 영토 수복 전쟁을 시도하였다.
7년(398) 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沙豆)를 좌장(左將)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아신왕 7년(398년)에도 쌍현성을 쌓고, 개로왕 때에 쌍현성을 수리한 적이 있었다.
무령왕 때에는 한북의 주군민이 새로 쌓았으므로 한수, 즉 대동강 북쪽이다.
다루왕 4년에 횡악 아래서 쌍록을 잡은 일이 있다.
지금의 쌍아산(雙娥山)인데 백제 쌍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쌍아산이 있는 함종현은 아산현(牙山縣)이라고도 하였는데 쌍아산의 모양이 두 개의 상아,
혹은 두 개의 물고기가 뻗어나온 산의 모양이다.
쌍아산에는 남쪽의 내성과 북쪽의 산성이 보이는데 각각 책계왕이 쌓은 것과 무령왕이
쌓은 두 개의 쌍현성으로 고려된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곧 중지하였다.
9월에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쪽돈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8년(399)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은 전역(戰役)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니 호구가 줄었다.
이때 백제와 왜국 연합군은 신라 수도 금성을 포위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399년에 일이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동황성)에서 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 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
○○○○○○○○○○○○○○○○○○○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이때 광개토왕은 왕자 고진을 보내어 대마도를 거점으로 임나일본부까지 만들었다.
왕자 고진은 417년에 시코쿠에서 인덕천황을 죽이고 432년에 오사카로 들어가서 윤공천황으로 등극한다.
고구려 임나일본부 지도
9년(400) 봄 2월에 살별이 규(奎)와 루(婁) 별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에 일식이 있었다.
나사NASA 추산에 의하면 양력 7월 8일이다.
0400 Jul 08 03:24 T 91 0.414 1.050 47.4N 130.1E 65 183 04m00s
11년(402)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서 말랐다.
왕이 친히 횡악(橫岳)에서 제사지냈더니 곧 비가 왔다.
399년의 백제 왜 연합 수복 전쟁에서 백제는 대동강 이북을 일부 회복하였던 것이다.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12년(403) 봄 2월에 왜국의 사신이 왔다.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404년에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 왕당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
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대방계가 요동반도 서남해안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적어도 압록강까지는 백제가 수복했다고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심양 서북쪽의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대를 많이 잃었고
패전 책임으로 아신왕은 다시 퇴위하고 일본으로 갔다.
14년(405) 봄 3월에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匹練)과 같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384년 진사왕의 반란 때에 퇴위하고 404년 패전으로 인하여
두 번째로 퇴위하고 일본으로 가서 424년에 죽었다.
옥부산(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곤은 관과 고대모음 "아래아"로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백제 팔곤성을 고구려에서는 곤팔성이라고 고쳐불렀는데 역시 백제 관방인 팔일성도 일팔성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관방이나 국경에 팔八자가 들어가는 일이 많다. 팔령, 팔령천 등이 그렇다.
따라서 일팔성은 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봉황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고향이라고도 전하는데 연개소문에 이르러 현재 규모로 커졌을 것이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岫巖縣) 동북쪽 황화전(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 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 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애하 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 둘레는 11600척(4000m)이고,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간궁산,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이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鳥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으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대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평안남도 성천 홀골성)을 수리하고,
사성(동해안 정평군 세류고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 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 둘레는 3만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 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운전군 목우산(牧牛山,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 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館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17번) 무명성(頁○○)은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어체에서 수(首)를 대신한다.
18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귀성군(龜城郡) 북쪽 굴룡산 산성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50척이었다.
19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귀성(龜城)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1만2335척이다.
20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고성(退羅山古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1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22번) 무명성(○○)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2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25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주둔한 마읍산(馬邑山)도 이곳이다.
고려 때에 안술진(安戌鎭), 혹은 안안진(安仁鎭)이라고 쌓은 해변토성(海邊土城)의 위치로 보며,
당시에 성 둘레가 2490척이다.
26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7번) 무명성(()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 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28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29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 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30번) 대산한성(大山韓城)은 백제 국성이었던 대동강의 북한산성 안학궁이다.
*31번 이하는 대산한성 안학궁이 함락되면서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서 항복해서 얻은 성들일 것이다.
31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 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32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대성산성 동북쪽 산사면에 대성산성과는 다른 토성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토성 둘레는 5160척이라고 하였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3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5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이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6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Km이다.
37번) 무명성(○婁城)은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38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9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40번) 우루성(于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于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于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1번) 소○성(蘇○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 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함종(咸從)은 비류의 백성들이 비류가 죽고 온조 땅에 건너올 때 낙종(樂從)했다는
백제 건국기의 기록과 관련될 것으로 본다.
42번) 연루성(燕婁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어을동토성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 둘레 6620m의 대성이다.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 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3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 둘레는 4630척이다.
44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5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6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7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0번) 취추성就鄒城은 알 수 없다.
51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2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알 수 없다.
53번) 윤노성閏奴城은 알 수 없다.
54번) 관노성貫奴城은 압록강 북쪽 관전현(寬甸縣)으로 추정된다.
55번) 삼양성三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동으로 추정된다.
56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 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
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래서 미성이었을 수 있다.
57번) 무명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고무주성(古撫州城)으로 추정된다.
토성으로 성둘레는 5947척이다.
영변군에는 단군시대 모한(慕韓)이 있었다.
58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 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 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대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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