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백제

12. 송나라를 세운 침류왕

오늘의 쉼터 2008. 9. 17. 11:10

 

 ◈ 송나라를 세운 침류왕(재위 383)

 

 

 

침류왕(枕流王363~422)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爾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이부인은 신공황후다.

부왕은 일본 응신천황으로 돌아가고 침류왕은 백제왕으로 왔다.

 이는 383년의 일이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83년 전진과 동진이 겨룬 비수대전에 백제군이 동진을 도와서 참전해 들어간 것이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라난타가 절을 세운 곳은 대동강 평양이다.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384년에 침류왕은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산동반도에 동청주를 세우고 요서에도 백제군을 세웠다.


 

 

 

삼한왕, 왜왕이던 침류왕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
夏)과 겨울(冬),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후쿠오카의 우미신궁과 신궁에 걸린 신공황후도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 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 357~386)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宍)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
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
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
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
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
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
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칠지도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
奇)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근초고왕의 한산시대 참조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

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禰)가 백동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男弟王)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 367~396,교정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
矢河枝比賣)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
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침류대왕 우치천황을 모시는 우치신사


여기서 우지노와케 석관에 기록된 367년에서 396년까지의 나이는 왜왕으로서의 재위 연대로 보면 맞는다.
성무천황이 천황위에서 쫓겨난 것이 362년이고 그후 1년 뒤에 신공황후 몸에서 태어났으면 363년이 적정하다.
363년에 태어나서 367년에 칠지도를 받아서 왜왕으로 즉위하고 383년에 근구수대왕과 왜왕위를 바꾼 것이다.

또한 383년 계미년에는 즉위 16년을 맞아서 우전팔번인물화상경에서 왕16년이라고 기록했다.

즉 367년에 즉위한 것이되는데, 칠지도에서 기(奇)를 왜왕으로 임명한 해가 태화 4년으로서 367년이었다.
383년 이때가 침류대왕의 나이로는 20세였으니 약관(
弱冠)의 나이를 맞아서 사마숙녜가 선물을 올린 것이다.

 혹은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대왕으로 부임하게 되는 장도(壯途)에 오를 때에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383년에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응신천황이 되고 그 아들 왜왕기는 백제의 침류대왕이 되었다.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에 인용된 탁순왕(卓淳王):(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발언이 중요하다.

“갑자년 364년에 백제대왕이 탁순국왕에게 백제 사신,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3인을 보내어 왜국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구저한(求氐韓), 막고성(莫古城), 미추성(彌鄒城) 등의 백제 지명이 [광개토호태왕 비문]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 기록의 구저, 미주, 막고 등 3인은 그 백제 삼성(三城)의 성주(城主)였을 것이며

그 위치는 현재 평양 이북이 되고, 각기 독자적인 가신(家臣) 군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간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대왕의 즉위전(369年) 기록 중에 고구려군을 격퇴시킨 근구수왕자의

측근 신하로서 막고해(莫古解)가 기록되어 있다.
탁순왕은 백제 사신 구저들을 억류하고, 신라로 압송하기까지 하였다.

신공황후의 신하 시마숙녜(斯麻宿禰)가 왜국으로부터 탁순국에 다다르니, 일이 그르쳐진 것을 알고,

시마숙녜는 그의 가신 니하야(爾波移)를 백제로 보내었고, 시마숙녜는 왜국으로 귀국하였다.
사마숙녜의 가신 니하야(
爾波移)는 백제 근초고대왕의 선물로서 왜기왕 침류대왕자의 복식을 위한

오색 비단과 무기의 재료인 철재(鐵才) 40괴를 받아 돌아갔다.
한편 신라에 억류되었던 백제 사신 구저들은 다음해에 왜국에 도달하였다.

[삼국사기/신라기]에서는 364년경에 왜국의 침략을 받는다.

 

이후 백제와 왜국은 366년경에 탁순국(卓淳國):진해(鎭海) 등 7국을 쳤다.

왜국장수와 백제장수 목라근자(木羅斤子), 사사노궤(沙沙奴跪) 등은 비자호(比自~):(창녕昌寧),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 록국(㖨國):거제도(巨濟島), 안라(安羅):함안(咸安), 다라(多羅):합천(陜川),

탁순(卓淳):진해(鎭海), 가라(加羅):고령(高靈) :대가야(大伽倻) 등 7국을 쳐서 백제 속국으로 하였다.

이후 백제군이 전라도의 비리(比利):완산(完山:比斯伐), 벽중(辟中):김제(金堤), 포미지(布彌支):보성(寶城),

반고(半古):반남(潘南), 침미다례(忱彌多禮):해남(海南):침명(浸溟)를 쳐서 백제 영토로 하였다.

   (윗 지도 참조)

 

탁순국(卓淳國)은 신라와 이웃에 붙어있었다.

탁순국은 임나연정에서 졸마국(卒磨國)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그 위치는 진해(鎭海)에 있었다.
탁卓의 고대발음이 타이여서 중모음 태로 바뀌어서 진해시의 태천만, 태동만, 왜성만으로 이름이 남았고,

현지에 태첩왜성도 남아있지만 그 북쪽 자마산 자마왜성도 탁순국의 근거지로 고려된다.

임나연정 10국에서 탁순국은 졸마국으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년 탁순국에 이른 백제인은 동해안의 함흥에서 동해 연안을 타고 배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서해안으로 일본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안라(安羅)는 아나(阿那; 安)가야라고 하였던 함안(咸安)이다.

다라(多羅)는 대가야(大伽倻)가 있던 합천이다.  

남가라(南加羅)는 김해(金海) 금관가야다. 

가라(加羅)는 불특정한 이름인데 위에서는 가야를 대표하는 고령(高靈)일 것이다. 

록국(~國)의 록은 구록(口彔)으로 파자(破字)하여 거제도(巨濟島)로 추정된다.

[위지왜인전]의 구사가야(拘邪伽倻)가 거제도인데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큐슈의 구사한국이 녹아도(鹿兒島)로 되었다.

 그 본국인 "구사가라"는 구록국(舊鹿國)이 될 것인데, 앞의 구(口)와 뒤의 록(彔)을 합쳐서

록국이라고 나라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이 시대의 또다른 상황 기록으로, [일본서기]에서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중요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오년, 382년에 신라가 왜국에 조공하지 않으니, 왜국왕이 왜국 장수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치라고 했는데, 왜국 장수가 신라의 향응을 받고 가락국을 쳤다.

 그러자 가락국왕이 왕자 등 가솔을 거느리고 백제로 망명하였고, 가락국의 공주는 백제로부터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사정하여, 왜왕은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다시 가락국에 파견하여 쫓겨났던 가락국왕을

복위시켰다.
백제에 속한 탁순국이 바로 금관가야 김해의 남쪽 진해이다.

금관가야는 항상 위태하였을 것이다.

진해에서 동쪽을 치면 신라 땅이 된다.
여기서 백제 장수인 목라근자를 왜국 땅에서 신하처럼 데리고 있다가 가락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왜왕은

바로 백제의 382년 당시 왜왕인 침류대왕인 것이다. 
임오년은 백제 근구수대왕의 치세인데 당시 수도가 대동강 평양이라서 군대를 동원하기가 멀고,

이미 367년부터 왜국왕이던 아들 침류대왕에게 가락공주를 선물하면서 해결을 맡긴 것이고,

침류대왕은 즉시로 사지비궤를 파직하고 가야를 다시 세웠다.

 

383년 평양 한성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침류대왕은 중국의 북조, 전진(前秦)으로부터 참전을 요청받는다.
침류대왕(363~383)은 동생인 아신대왕(
阿莘大王. 372~424)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국으로 떠나는데

당시 아신대왕은 12살, 침류대왕은 21살이었다.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 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

=(340~406)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현지에서는 갈성씨 고분으로 알려졌지만 아신대왕릉이다.

일본의 오카누케후타마왕이 아신대왕인 것은 계체천황이 무령대왕의 서형(庶兄)으로 증명되면서,

즉 개로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개로대왕의 고조할아버지이자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아신대왕이

와카누케후타마왕이 된다.

《일본서기》에서 아신왕을 아가왕(阿花王)이라고도 기록했다.

 

383년 11월에 중국의 남북조가 충돌한 역사적인 비수대전(淝水大戰)이 있었다.
남북통일을 노린 전진(
前秦)의 부견황제(符堅皇帝)가 100만 대군으로 출병하였으나 비수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산동반도
쪽으로 상륙했던 백제군은 건절장군(建節將軍) 여암(餘巖) 형제가 인솔하였다.


비수대전 이후에 흩어지는 전진(前秦)의 부견황제로부터 슬며시 떨어져나와 독립하여 후연(後燕)

건국하려는 모용수(慕容垂)가 사방으로 군대를 모으니, 건절장군 여암 등이 백제 군대를 이끌고 자원하였다.


모용수는 고구려, 백제를 친 전연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며, 전연 말기에 전연을 배신하고 전진의

부견황제에게 귀의했고, 370년 전연국 수도 업성 함락으로 전연은 전진에게 몰락했다.
한편 모용수의 사위로 부여왕자 여울(
餘蔚)이 있었는데 그는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백제를 쳐서 끌어간 부여왕 여현(餘玄)의 아들이다.

여현은 비류왕의 아들로 추정된다. 

부여왕자 여울은 370년에 전진황제 부견에게 투항한 모용수를 도와서, 전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전연국

모용위의 수도 업성 성문을 몰래 열어서 전진국 군대를 업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전연국을 멸망시켰다.
부여왕 여현은 전연황제 모용황의 사위가 되었었고, 그의 아들 부여왕자 여울은 후연황제 모용수의

사위가 되어서 후연의 재상이 되었다.
백제군 여암 형제는 이 부여왕자 여울을 통하여 후연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384년에 고구려 고국양대왕(故國壤大王)이 전연(前燕)이 차지했던 대릉하(大凌河) 하구의

요동(遼東)공략하였다.
그러자 백제 건절장군 여암(
餘巖)의 군대는 385년에 무읍으로부터 거병하여서 후연(後燕)이 차지했던

유주(幽州):[북경시(北京市), 전연은 평주(平州)라고 불렀고 전연 시기에 3번째 수도였음]를 공략하여

탈취하고 이어서 난하에 있던 영지성(令支城): 하북성(河北省) 천안현(遷安縣)과 전연의 2번째 수도였던

대릉하의 황룡성(黃龍城): 요녕성(遼寧省) 조양시(朝陽市)를 차지한다. (윗지도 참조)


중국 사서에서 동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거해 자치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 385년 상황이다. 

 

晉世 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385년 후연황제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農)을 파견하여 백제가 빼앗은 영지성과 황룡성,

그리고 고구려가 점거했던 요동성을 수복한다.
그러나 북경은 389년에야 수복하는데, 이 4년동안 백제는 북경을 점거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

그 아래에 13군(郡) 태수(太守)를 두었었다.

그때 유주자사를 지냈던 백제인이 바로 평양 덕흥리고분 주인공 진(鎭)이다.

광개토왕 시대인 408년에 평양시 덕흥리에 묻힌 유주자사(幽州刺史) 진묘(鎭墓)가 있다.

그의 고분에는 아래와 같은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군 신도현 도향경 감리         ○○郡 信都縣 都鄕敬 甘里

  석가문불제자 ○○씨 진 사         釋加文佛弟子 ○○氏 鎭 仕

  위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位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용양장군 요동태수                    龍讓將軍 遼東太守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使 鎭

  연 칠십칠 훙 언이 영락 십팔년    年 七十七 薨 焉以 永樂 十八年 

  태세재 무신 십이월 신유삭        太歲 在 戊申 十二月 辛酉朔

  을유 성천 이옥궤 주공상지        乙酉 成遷 移玉櫃 周公相地

  공자택일 문제선시--이하 생략   孔子擇日 文帝選時------下略


묘주인공

 

“진”이 유주자사를 지낼 때에 연군태수, 범양내사,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령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 낙랑태수, 무명태수 등 13군태수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소재지까지 계현(薊縣)의 연국성(燕國城):(전연국 중기 수도)으로 벽화에 기록되었고,

벽화 행렬도에는 전통적으로 유주자사 치소인 계현의 현령(縣令)도 등장한다.

그의 관직 기록 중 최상위에 고구려 국소대형 좌장군이 있어서 그가 말년에 고구려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유주의 관리로서 장사(長史), 사마(司馬) 등을 임명하는 그림이 있는데, [양서(梁書)]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처음 장사(長史)를 두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진”이 죽은 408년까지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존재했어야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고구려 유주자사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광개토왕 시대 사건이라면 [광개토왕 비문]에 이 찬란한 업적이 반드시 기록되어야하는데,

고구려인이 적은 현실에는 비문에 그와 관련한 아무 기록이 없으므로 광개토왕 시대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둘째로 당시 중국의 사정을 보면 유주 북경(北京)에는 389년 4월 후연국의 모용성(盛)이 들어가

계성(薊城):(유주자사 치소, 한때 선비족 전연국의 수도였었으나 385년 2월 불탔다.)을 복원하고 지켰고

그후 유주는 401년경에 탁발씨의 북위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고구려와 별 인연이 없었다.

따라서 진이 유주자사를 지낸 것은 광개토왕 이전이고, 당시는 고구려인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고분 벽서에 감춰진 성은 백제 왕성인 부여씨가 된다.
그는 백제 장수였지만 말년에 대동강 평양에서 지내던 중 고구려가 백제의 평양을 함락하여

광개토호태왕의 신하가 되어 생을 마쳤다.

 

한편, 백제 본토에서는 384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신대왕을 폐위하고, 침류대왕의 서형(庶兄)

진사대왕(辰斯大王. 346~395)이 즉위하였다.


침류대왕은 이 당시에 지금의 산동반도 래주
萊州의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를 거쳐서,

지금의 청도시(靑島市)인 성양군(城陽郡),
즉 당시의 동청주(
東淸州):(훗날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로 책봉한 바가 있다.)에 진출했던 것이다.
한편 이 384년에, 중국 청주(
靑州)에는 근본을 알기 어려운 장수 벽려혼(辟閭渾)이 점거하여 16년간

산동반도를 전부 지배했는데, 벽려혼 역시 백제 장수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타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처럼 크고 부유한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고도 스스로

칭제건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벽려는 “비류”와 똑같은 발음이다.

[신찬성씨록]에 백제국 벽류왕이 기록되어 있고, 出自百濟國避流王也

그 후예는 광정련(廣井連)인데 벽려혼의 도읍이 바로 청주 광고성(廣固城)이었다.
따라서 청주자사 벽려혼은 (벽려혼은 동진으로부터는 유주자사로 책봉받았다.)

침류대왕의 신하 장수였던 것이다.


399년에 후연에서 갈라진 남연(南燕)이 청주 광고성의 벽려혼을 물리치고 청주를 점령하여

411년까지 고작 12년간 산동반도를 지배했는데, 남연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에 들어간다.


남연에 비하여 벽려혼이 동진으로부터도 유주자사라는 책봉까지 받고, 산동반도를 완벽하게

16년간 다스렸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백제 침류대왕의

신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때 침류대왕이 당시 동청주(東靑州)인 산동반도 청도(靑島)에 백제대왕(百濟大王)으로서

출정 나와 있었기에, 백제 본토 내부에서 진사대왕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고,

또 391년 광개토왕자가 백제 본토를 침탈하는 빌미를 주었다.
본토 진사대왕의 반란은 백제군의 분열을 가져와 침류대왕에게 엄청난 타격이 된다.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자는 만주의 백제 영토를 다 빼앗고

압록강 하구까지 육박해 내려온다.

 

391년 진사대왕(辰斯大王. 346~395)은 광개토대왕에게 패전하고, 급히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했는데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은 백제에 구원병을 보낸 대신에, 진사대왕을 잡아 일본으로 보내고, 근구수대왕의

아들 아신대왕을 다시 백제대왕으로 세운다. 

 

[일본서기]에서 진사대왕이 왜군에게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

 

[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彌.

石川宿彌.木菟宿彌,嘖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為王而歸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 346~395)로 나온다.
대산수명이 곧 진사왕이라는 사실은 [고사기]에서 침류왕의 대산수명 살해장면 기록에서 나온다.
진사왕은 응신천황(근구수대왕)이 그를 태자로 하지 않은 것에 항상 원망을 가졌고, 394년 응신천황

서거 이듬해에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을 죽이려고 준비했다가 미리 대비를 갖춘 침류대왕에게 죽는다.
침류대왕은 그와 물놀이하다가 배를 뒤집고 빠져나가서 진사대왕을 강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서 익사시킨다.

침류대왕은 일부러 대마로 된 가벼운 옷을 입었고 진사대왕은 무거운 갑옷을 숨기고 있었다.
대산수명이 죽어갈때 강에서 떠내려가며 이르른 곳이 가와라(
詞和羅)였다.

강가에 올라갈 수 있게 제발 가라고 가라 가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가와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러니 가와라로 인하여 그를 위한 가라신사(
辛國神社)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가라신사에

진사대왕 후손의 족보가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능은 보잘 것 없이 초라하여 10m 내외의 봉분을 했으며 나라현에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침류대왕이 그를 죽인 곳이 고라(
考羅)의 나루터였다.

여기서는 진사왕을 참수하지 못하고 익사시킨 것에 대해 한탄하는 침류대왕의 노래가 적혀있고

이때 부왕을 생각하여 같은 부왕의 자식인 진사왕을 베지 못하여 이를 재궁단(梓弓檀)이라는

나무에 비유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이니 역시 가라로 읽었을 것이고 가라신사(辛國神社)의 유래가 된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岡原連; 出自百濟國辰斯王子知宗也


진사대왕 후예의 일본 계보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귀수왕의 아들 진사왕의 아들 태아랑군의 아들 해양군의 아들 오정군에서 3파로 갈라졌는데

모두 관야조신이 되었다.


百濟辰斯王後裔氏族の系譜
百濟貴須王→辰斯王(391년경 도래!)→太阿郎王→亥陽君→午定君より三腹に分枝
①味沙→白猪史→葛井連、宿禰→蕃良朝臣→菅野朝臣
②辰璽→船史→王後首→宮原宿禰、御船宿禰→菅野朝臣
③麻呂君→津史→津連→津宿禰、中科宿禰→菅野朝臣


이들이 모시는 신사가 하내국(河内國) 지기군(志紀郡) 후지이시(藤井寺市藤井寺)에 있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다.


394년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일본에서 서거하고 396년에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백제 본토를 쳐서

백제 한산 수도가 있던 대동강 이북을 점령한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다.

[만주지리풍속지] 기록에서 고구려 영락대왕이 이 396년 전쟁에서 처음 탈취한 일팔성이

압록강 북쪽 단동시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기록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이 백제로부터 뺏은 58성은 당시 백제를 알 수 있다.

이는 진사왕편에 나온다.

 

이때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이 서거한 394년부터 396년까지 일본은 3년간 천황 자리가 비어있었다.
명목상 우치천황, 즉 중국에 출정나간 침류대왕의 통치 시기다.
그는 장례식에 돌아와 우치천황으로서 3년상을 치르고 그동안에 진사대왕을 죽이고 다시 떠난 것이다.

396년 침류대왕은 응신천황의 장자이자, 침류대왕의 형왕인 인덕천황(
仁德天皇. 337~419)에게

천황자리를 승계토록 조치한다.
인덕천황은 백제와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지원으로 피폐해진 일본 국민들에게 3년간 과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한편 침류대왕(枕流大王)은 396년 고구려의 백제 침략에 보복하기 위하여,

왜군을 총동원하여 399년에 신라를 쳤다.  [광개토호태왕비문 9년]
이들 왜군 병사들은 이듬해 400년에야 고구려 군대에 쫓기게 되니

399년 내내 신라 도성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399년 7월에, 중국 산동반도에서는 선비족 남연(南燕) 황제 모용덕의 침략을 받아서

산동반도를 선비족에게 다 빼앗기고, 산동반도 청주를 지키던 백제장수 벽려혼은 외롭게 전사하였다.
애석하게도 침류대왕은 북경에 보냈던 건절장군 여암 형제의 백제 군대와 유주자사 부여진의 요서

백제 병력, 그리고 벽려혼의 산동 백제 병사를 거의  다 잃었다.


침류대왕은 산동의 벽려혼과 백제군을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399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이듬해 400년, 신라 땅에서는 인덕천황의 지휘로 신라에 나가 있던 왜군 병사들도

고구려군에게 궤멸된다.

그리하여 광개토호태왕의 고구려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399년 가을 침류대왕은 중국 땅에 다시 들어가서 침류소석(枕流漱石)=

(枕石漱流 개울물에 씻기는 돌을 베고 자는 은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 진출의 원대한 꿈이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조국 백제가 만주와 대동강 이북을 잃고서

백제 본토가 반 토막이 나버린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떠돌지 않았으니 100일도 지나지 않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5년만에 성공한다.

그해 399년 11월에 마침 오두미교주(
五斗米敎主) 손은(孫恩)의 해적(海賊)들이 동진(東晋) 동해안을

왜구질하므로 동진은 황명으로 해적 토벌을 명령하였고, 12월에 동진(東晋)의 장수 유뢰지(劉牢之)

손은을 토벌하기 위해 지원병을 모았다.

 

침류대왕은 그 유뢰지의 휘하에 응모(應募)하여, 참군사(參軍事)가 되는데, 유우(劉裕)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당시 참군사는 의병대장 같은 격이라서 정규 병력을 내주지 않았고, 그 휘하에 그를 따르던 수십명 가신,

친위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수십인을 가진 유유(
劉裕)는 해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정찰 명령을 받고서 수행하다가

수천명의 손은(孫恩) 군대를 맞닥뜨렸는데 그대로 돌진하여 부수어버렸다.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는 363년생으로

칠지도에 나타난 왜왕기(倭王奇)와 같은 인물이었다.

유유의 아명은 바로 기노(寄奴)였다.

 

[송서 본기]에는 유유(劉裕)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후손이라고 줄줄이 족보를 엮어서 기록했는데,

이는 조작이거나 남의 족보를 빌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동시대 북조(北朝)의 정사(正史)

 

[위서(魏書)]에는 섬오랑캐(島夷) 유유(劉裕)의 출신 근본을 모른다고 기록했다.
유유는 본래 성(
姓)이 다른데 유(劉)씨로 개성(改姓)했다고까지 명확하게 기록하였다.

본래 유(劉)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서(魏書)》에서 유유의 수식어가 섬오랑캐 도이(島夷) 유유(劉裕)다.

 

《위서열전도이전(魏書列傳島夷傳)》이 바로 송나라 고조 유유를 위한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해외 만황의 오랑캐 종족(海外蠻荒的種族)을 의미한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송나라 때 도이(島夷)에 대해서

백제에 속한 왜인으로 설명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왜국은 측천무후 때에 일본국으로 개명했다.

백제 남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산다.

백여 소국인데 이들이 양주(揚州):(동진의 수도)의 동쪽으로서 도이(島夷)라고 한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又倭國,武皇后改曰日本國,在百濟南,隔海依島而居,凡百餘小國.

此皆揚州之東島夷也.按:東南之夷草服葛越,焦竹之屬,越即苧祁也.


도이(島夷)로 기록된 인물은 유유(劉裕) 외에 환현(桓玄.369~404)과 남제(南齊)를 세운

소도성(蕭道成) 등이 있다.

[구당서/천문지]에서 남쪽으로 월(越)을 지나면 도이만맥인(島夷蠻貊之人)이 산다고 했는데

도이(島夷)를 남만(蠻)과 예맥(貊)인들로 기록한 것이다.

[원사/본기]에서 세조(世祖) 황제는 말하기를 일본은 멀리 고립된 도이(島夷)라고 했다.

 

帝以日本孤遠島夷.

 

그후 일본을 계속 도이(島夷)라고 불렀다.

 

북조의 정사인 《위서》에 의하면 유유는 36세까지 미투리, 즉 짚신을 만들어 팔 정도로 가난했고,

그런데 짚신장수 격에 맞지 않게 도박을 좋아하여 무려 3만전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399년 11월 동군장수 유뢰지가 손은(孫恩) 등의 해적들을 소탕할 병사를 모집할 때에, 유유가 찾아가서

자원하여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동해안의 해염(海鹽)에서 손은의 군대에게 대승하여 그날로 황당하게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승진하고, 겸하여 하비태수(下邳太守)가 되었다.

태수는 지방왕에 해당한다.

 

[북위서]에 나타난대로 363년부터 399년 12월까지, 태어나서 무려 36년 동안 오로지 중국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짚신을 만들어 팔고, 말도 안되게 3만전이나 빚을 진 거액 도박이나 하던 건달이었다면, 36세에

느닷없이 수십명의 정병(精兵)을 데리고 전장에 나타나서 일당천의 괴력적 무용을 선보이고, 수천명의

적을 물리치고 게다가 높은 학식이 필요한 하비군 태수(왕)까지 399년 12월 전투 한번으로 곧바로

임명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후로 단 5년만에 동진(東晋)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도 없다.
오로지 유유(
劉裕)의 근본이 백제 침류대왕 왜기왕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유는 수십인을 데리고 정찰하다가 수천인의 적군을 만나 즉시로 공격하니, 따르던 부하들은 다 죽고

유유는 절벽으로 떨어졌고 적들이 절벽 위에서 죽이려고 하였지만 유유는 분투하여 장검을 휘둘러서

몇명을 죽이고 다시 기어올라와서 고함치며 추격하니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유는 쫓아가서 계속 적들을 많이 죽였는데 본부의 유경선이 유유가 돌아오지 않으니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나서서, 유유가 수천인의 적을 홀로 추격하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여 부대로서 적들을 쳐서 대파하여

수천명의 적을 베었다.

 

使將數十人覘賊。遇賊數千人,即迎擊之,從者皆死,裕墜岸下。賊臨岸欲下,裕奮長刀仰斫殺數人,

乃得登岸,仍大呼逐之,賊皆走,裕所殺傷甚眾。劉敬宣怪裕久不返,引兵尋之,見裕獨驅數千人,

鹹共歎息。因進擊賊,大破之,斬獲千餘人”

 

침류대왕은 남연국 선비족의 땅이 된 산동반도에 급히 왔다가 선비군에 밀려서 동진 땅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침류대왕은 이름도 유유로 바꾸고, 방탕하다가 동진 장수 유뢰지의 진영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침류대왕은 중국식 이름인 유유(
劉裕)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하여, 399년 12월 그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지 단 5년 2개월만에, 405년 1월, 동진의 수도를 강탈했던 환현(桓玄)의 난을 제압하였다.

유뢰지는 이미 환현에게 죽었고 도성에서 쫓겨났던 동진황제를 수도 건강(建康)에 복귀시키면서 동진의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겸 9주제군사(九州諸軍事) 겸 2주자사(二州刺史)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5년후, 선비족 남연국을 멸망시켜 청주를 되찾고 벽려혼의 복수를 한다.

또한 몇년후에는 후진(
後秦)의 장안성도 함락시키고 동진의 강역을 역사상 최대로 넓힌다.
결국, 동진(
東晋) 황제 공제(恭帝)의 딸을 부인으로 얻은 후에, 공제의 양위를 받아서 유유(劉裕)

420년에 송나라를 개국하여 고조무황제(高祖武皇帝)가 된다.

아쉽게도 3년만인 422년에 60세로서 붕어하였다.

 

송고조 유유의 뒤를 이은 18세의 소제(少帝)는 장부인(張夫人)의 소생이었다.
황태후가 된 장부인은 이름을 궐(
闕)이라 하였지만

[송서(宋書)]에서 조차도 장부인의 출생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비록 노비 출신이어도 중국 출신이면 기록에 남는데 장부인은 백제 여자라서 기록이 없는 것이다.

 
2대 황제인 소제(
少帝)가 사치하여 궁궐에 호수를 만들고 배를 띄어서 그 안에서 향락을 즐길 때

성정이 지나치게 포악하다고 즉위 3년만인 424년에 신하들이 폐위하여 내쫓고 동진 황제 공제의

딸이 유유에게 시집와서 낳은 문제(文帝)를 즉위시킨다.
외척이 전혀 없는 송나라 소제가 외척이 많은 송나라 문제에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때 황태후 장부인은 황제 소제를 폐하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문제를 황제로 세운 대궐안의

권력자였지만 스스로 궁궐을 나가버려서 동해안 오군(吳郡)으로 갔다가 2년후 사라진다. 

백제, 혹은 왜국으로 건너가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426년에 죽었다는 그녀의 나이조차 기록이 없고, 능도 만든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으니 죽은 나이를 기록할 수 없고 능도 만들 수 없었고 문제는 찾지 않았다.

 

송나라에 유유가 등장한 이후로 왜국은 갑자기 중국과 끊어졌던 교류를 되살려나가니

이때 중국 역사에 왜국이 다시 상세하게 등장한다.

이때, 왜국의 왜5왕이 교류한 중국 땅은 [일본서기]에서 항상 오(吳)나라였다.

즉 장부인이 머물던 오군(吳郡)이 강좌(江左)의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왜5왕(倭五王)은 왜찬왕(倭讚王), 왜진왕(倭珍王), 왜제왕(倭濟王), 왜흥왕(倭興王), 왜무왕(倭武王) 이다.

또한 백제는 송나라 문제의 원가력(元嘉曆)을 받아들여 사용한다.

백제가 송나라 원가력을 받아들인 것은 송나라의 연방 국가가 되는 것이다.

 

전후좌우 정황은 송나라 고조가 왜기왕이고 우치천황이고 백제 침류대왕인데, 백제 장수 벽려혼이

중국 산동 청주에서 제왕이 되었어도 실패한 것이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지,

혹은 왜구질을 싫어하는 중국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어서인지 침류대왕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족보로

혈통을 꾸며서 중국을 통치하고, 스스로 백제왕이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송나라를 자신의 후예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에 송나라와 맞서던 북위(
北魏)에서는 그를 성(姓)을 바꾼 섬오랑캐 도이(島夷)라고

기록하여 진실을 실마리를 전해주니 침류대왕은 백제가 낳은 또 하나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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