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 한사군과 졸본부여

오늘의 쉼터 2008. 9. 8. 00:49

◐ 한사군과 졸본부여bc108~bc58

 

 

1. 위만의 험독성과 우거의 조선성

2. 한사군의 위치

3. 한나라 현도군 압록강

4.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5. 졸본부여

 

....설명은 아래에

 

1. 위만의 험독성과 우거의 조선성

46세 번한왕 기준(箕準)은 bc221년에 즉위하여 서우여의 번한성(금주시 대집둔, 요동군 험독성)에 있다가

그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쳐들어와서 2000리까지나 땅을 뺏기고 요동군 패수(沛水)의 번한성

(태안현 손성자)으로 옮긴다.

이때 연나라의 요동군과 요서군이 설치되었고 이는 진나라에 승계되었다.

연의 요동군은 대릉하에 있었고, 요서군은 육주하 서편에 있었다.

전단군조선의 번한수도 탕지산 안덕향은 연나라 요서군 도하현이 된다.

연나라 요동군 위치는 위만의 수도였던 만번한에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로 통일되어 진시황의 만리장성 역사를 피해 번한으로 이주해 들어온 연(燕)

나라,제(齊)나라 사람들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에 들어와 살았다.

<사기>에서는 상하장(上下鄣)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단군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과 후단군 번한수도 대집둔을 각각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중에서 탕지산 안덕향에 연나라 유민들이 많이 살아서 뒷날 당나라 때에 연주(燕州)가 되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반면에 대집둔은 제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흥하여 요동군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다시 요동고색을 지었고, 패수로서 조선과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연나라에 속하였으나 연왕 노관이 반란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도 망명하여 천여인을 모아서

오랑캐복장을 하고 요동고색을 벗어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때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한고조 유방 때에 여황후의 전횡으로 인하여 유주자사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고,

그 부하인 위만은 요동고색을 지나 패수를 건너 요동군 험독성에 도망해 들어왔다.

이 패수는 낙랑군 패수가 아니다.

 

이 패수는 수중현의 구하(狗河), 별칭 구려하(句麗河), 또는 명수(明水)가 된다.

 

번한왕 기준은 위만(衛滿)에게 상하운장을 떼어주고 한나라를 막도록 하였다.

이때 위만은 험독성에서 조선왕이라 한 것이다.

 

bc194년에 위만은 기준을 배반하고, 상하 운장의 중국인 이주민들을 이용해서 기준을 속이고

쳐들어와서의무려산 동남쪽 태안의 번한현에서 축출하였다.

기준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 목지국마한으로 떠났고, 대장군 탁의 무리는 번한의 오가를 이끌고

월지국 마한으로 떠났다.

그후 위만은 연나라 요동군이 있던 왕만구에 옮겨서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전에 연나라가 세운 요동군 위치로 고려된다. 

또한 뒤에 만번한(滿番汗)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무제의 요동군 양평이 의무려산 동쪽에 설치되었을 때는 서부도위를 두었던 무려현으로 되었다. 

왕만구의 무엽산에서 무려현이 유래된 것이다. 반면에 대릉하 동쪽의 지금 의무려산은 

더 큰 무려산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도1

 

위만의 험독성. 이는 대릉하 하구 서안과 금주시 사이에 목엽산 기슭에 있으며 요동군이었다.

 이후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에게 전해졌다.

 이때 위만조선은 진번(서요하 천산)과 임둔(요동반도 서안)을 이미 복속하였다고 한다.

 

지도2

 

 낙랑군 조선성은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동남쪽 조양동산에 있다.

 bc108년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우거를 치는데 수륙양군이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우거에게 불만을 가진 조선의 제후들이 반란하여 한나라는 쉽게 우거를 제거하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된다.

 

2. 한사군의 위치

bc108년 한무제의 조선정벌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이 현재 중국과 우리 역사학계의 잘못된 견해다.

그 잘못된 주장에 의하면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은 요양시에 있었고,

요동군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한나라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시다.

 

보충하면 <후한서군국지>에서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우북평은 낙양에서 2300리다.

후한의 우북평은 난하의 노룡군이었다.

그러니까 난하에서 양평은 1300리가 된다,

낙랑은 낙양에서 5000리였으므로 양평에서 1400리이다.

 한편, <무릉서>에서 임둔은 장안에서 6130리였는데 이는 낙랑으로부터로 고치면 대략 230리가 된다.

진번은 장안 7640리...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당나라 때 평주가 후한의 우북평이므로 평주로부터 장안까지가 2650리. 낙양까지가 1900리를 참조하여서

750리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낙양 평주 거리 2300리다.

후한시대 2300리가 당나라 때 1900리로 줄어들면서 당나라 때 장안-낙양 차이 750리는 한나라 때 907리가 된다.

 이는 당나라 때 십리가 4km이고 후한시대 십리가 3km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시대를 기준으로 교정하면 임둔은 낙양에서 5230리, 낙랑에서 230리가 되고

진번은 낙양에서 6740리... 대략 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먼저 잘못된 중국 주장을 현재 지도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3

 

즉 한반도 전체가 한사군이었다는 주장이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현재 우리 국사의 토대이다.

여기에는 낙랑군 수성현에서 시작된 중국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현재 중국 역사책에서는 한강까지 중국 땅이라고 그려놓고 대동강에 낙랑군을

그리고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그려놓았다.

 


지도4

 

중국은 많이 양보해서 경상도의 진번군을 지웠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압록강 이남에는 중국식 고성터가 일체 없다.
대동강의 낙랑고성은 원형으로서 중국의 네모반듯한 평지성이 아니다.

즉 한사군은 압록강 이남에 없었다.

실제로 진번군은 고래로 서유하 북쪽 천산에 있었다.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라 저 북쪽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일어났는가?

이는 대동강의 고구려 평양이 낙랑군이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수도였다는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한다.

대동강은 고구려가 망국한 도성이지만 고구려 당시 평양이 아니라 한성이었다.

고구려의 삼경인 국내성, 평양성, 한성 중의 한성이었다.
이는 당나라에 항복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산의 낙양성 묘지에 나오는 글이고, 또한 대동강 평양성벽 각서에

고구려인이 기록한 한성이라는 기록을 무시한 것이다.

대동강 평양은 700년대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었던 고구려 왕손 고덕무가 독립하여 세운 

후고구려(ad700-820)의 새 수도로서 평양이었다. 

이미 앞에서 기자조선의 출발지는 대동강에서 천리밖인 대릉하 상류인 것을 기자의 유물로서 밝혔다.

대신에 대동강 평양에 대하여는 <원사지리지>에 그 올바른 설명이 있다.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잘못된 압록강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아주 상세하게 밝히고, 여기서는 한사군의 위치만 바로잡는다.

 

우선 낙양에서 2300리 우북평은

<후한서>에서 당시 토은현(土垠縣)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당산시(唐山市) 북쪽 풍윤(豊潤) 위치다.

산융족의 무종국은 남수(藍水)변인데 이는 옥전(玉田) 위치다.

후단군시대 남국의 위치다.

한편 3600리 요동군 치소인 양평성은 연나라 요동성(위만의 험독성), 본래의 요동군 무려현으로 고려되고, 
3300리 요서군 치소 양락성 위치는 흥성시(興成市)로 고려된다.

흥성시 북쪽 흥성하 발원처에 양가장자(楊家庄子)가 있고 흥성하 하류 서쪽에 양안성(羊安城)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양안성이 양락성의 후신일 것이다.

이때 3260리 거리의 요동속국 위치는 당시 천료(天遼) 또는 창료(昌遼)라고도 했는데 본래 요서군 부려현

(夫黎縣)이었다.

요서군 부려현, 뒤에 요동속국도위는 흥성시 서북쪽의 포도구(葡萄溝)로 고려된다.

이 요동속국에는요동군의 험독현(대집둔), 방현, 무려현, 그리고 요서군에 속했던 부려현, 빈도현, 도하현

등이 속했다.

후한시대 거리가 밝혀진 요동군과 요서군의 중요한 현의 위치는 대략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5

 

지도5에서 요동군 무려가 연나라, 진나라, 후한시대 요동군이고 한무제의 요동군만 전한 양평이며,

공손탁의 요동국 양평은 별도다.


<후한서>에서 요동군과 현도는 400리인데, 요동국과 현도는 200리였다.

양평은 무려 다섯군데를 옮겨다녔는데 이는 따로 다룬다.
요서군 유성은 두 곳인데, 하나는 산해관 동북으로서 전한시대 요서군 유성이고 삼류수가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수나라 유성군이 되었고 당나라 영주를 두었다가 평로군을 두었으며 평로성이 있었다.

요동 신성에서 거란군에게 망한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당나라 중기에 다시 세운 곳이다.

또하나의 유성은 공손탁이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유성인데 모용황이 전연국 수도를 세웠고

평주(平州) 황룡성이라고 하였다. 

북연의 수도였고 북위군에게 함락당했으며 평주 대신 영주(營州)를 두고 평주는 난하의 노룡현으로 옮겨졌다.

그후 조양시는 영주 유성현이라고 계속 불렀다.

그러나 수나라 건국 무렵에 북제 영주자사 고보녕이 점령하였고, 수나라가 설치한 요서군은 전한시대 유성현

위치였다.

당나라 영주도 수나라 유성군, 즉 전한시대 유성현에 두었다.

이 당나라 영주에서 도하의 연군성을 지나 대릉하(당시 대요수)를 건너서 당나라 안동도호부 양평이 있던

적도 있는데, 이는 요동신성이며 공손탁의 요동국성 양평과 같다.

전한시대 유성현과 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는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6

 

수나라 유성군은 대루(大柳)에 전한 유성현은 삼산三山 남쪽 삼류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상류구(上柳溝)에

있었고 당나라 영주이자 안록산의 평로군절도사 치소인 평로성은 로두구(瀘豆溝=盧州城) 평천영(平川營)에

있었던 것이다. 

로두구와 평천영은 평로성의 성북과 성남이다.

당나라 영주와 요수(현재 대릉하), 그리고 요동신성 안동도호부의 새로운 비정은 압록강(현재 대요하)에

있던 발해 서경 압록부(졸본성)과 고구려 수도(환도성,구평양성 등)을 올바로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점

이다.

 이제까지는 공손탁의 요동국이 요동군을 갈라만든 요서군 유성, 즉 조양시를 기준점으로 하여서 많은 착오가

있었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대동강에 있었다는 거짓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한사군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7

 

낙랑군은 본래 개원시(開原市)였다고 <원사/지리지> 함평로(咸平路)에서 밝히고 있다. 

<후한서>에서 요동군으로부터의 낙랑군까지의 거리가 1400리인 점을 고려하면 전한시대 낙랑군 위치인

개원보다 먼 곳이다.

후한시대는 <삼국사기/고구려기> 기록에 광무제의 살수=심양시 운하(渾河) 이남 침략이 있었다.
<후한서>에만 등장하는 낙랑군 낙도현(樂都縣)을 이때 혼하 아래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고,

 이 낙도현까지 거리가 1400리로 추정된다.

명나라 때 금주시에서 북진시까지가 180리였고 북진시에서 요양시까지 360리였다.

합하면 540리가 된다.

 명나라와 한나라 때의 10리는 3 :5이므로 한나라 때의 금주-요양은 900리 거리다.

 

그러나 여기에 고대 해안선의 변수가 있다. 청나라 때도 대개 심양 동남이나 서북에서 대요하를 건넜는데 

이 대요하가 한나라 시대는 강이 아니고 바다의 열구였을 것으로 고려되므로, 한나라 시대는 요동군에서

낙랑군 조선현을 돌아서 심양 서북에서 강을 건너 요양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계산하면 금주시에서 북진까지 180리, 북진에서 양식목하 건너 거류하진까지 220리였다.

거류하진에서 조선성까지는 34km로서 70리에 해당하고 여기서 심양까지는 55km, 즉 110리에 해당한다.

심양서 요양까지는 120리다.

도합 700리다. 

이는 한나라 시대의 1170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230리를 더가면 요즘 거리로는 140리이므로 해성시에 이른다.

해성시에는 패수 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낙하(樂河)에서 유래된 말일 수가 있다.

 낙을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고 어를 역시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면 같아진다.

따라서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오늘날의 해성시로 추정된다.

동시에 위나라 명제가 237년에 공손탁의 요동군 몰래 바다를 건너 낙랑군과 대방군을 밀파하여 세웠는데,

그 낙랑군이 해성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대방군은 그 서남쪽 대석교시 부근이었을 것이다.

즉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요동군에서 1400리로서 해성시에 해당한다.

임둔군은 해성시로부터 230여리 즉 70km 남쪽 해안으로 잡으면 개주시 부근으로 고려된다. 

진번군은 낙랑군 조선현으로부터 고려해야 하는데 요동군이던 금주시에서 470리 정도다.

한나라식으로 780리다.

 진번군은 요동군에서 3140리 내외이므로 조선현으로부터 정가방에서부터 2360리를 더 가야하는데

동북 방향으로 약 700km다.

이는 흑룡강성 하얼빈을 넘어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낙랑군과 진번군이 이웃하였을 것이므로 당시 1000리인 300km이상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위치에서 북부여 수도인 천산진까지가 약 300k다.

 또한 천산진은 단군 시대 진번군이었다.

여기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해부루에 이르러 동부여로 이주한 것이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한사군의 점거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사군과 동이 제민족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8

 

3. 한나라 현도군 압록강

 

여기서 한사군의 현도군과 요동군을 지나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증거 24가지를 밝힌다.

 

1. 첫 번째 증거 [신당서-고구려전]

고구려의 강역을 기록한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麗傳)]의 앞머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는 부여별종으로서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 건너 영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접했다.

그 왕은 평양성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낙랑군지다. 당나라 장안에서 오천리다.
평양성은 산을 따라 굴곡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하고 왕은 패수 북쪽에 산다.
별도로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도 있다. 강물은 대요수,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 서쪽

남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새외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요수와 합친다.

마자수가 말갈 백산에서 나오는데 오리머리처럼 희어서 압록수라고 부르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

합치고 서남쪽으로 안시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에 있으며 강을 큰 배巨로 건너니 압록강은 믿을만한 방어선이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

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

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

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

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고구려 강역을 확정하기 위해 먼저 대요수(大遼水)를 찾는다.

[수경(水徑)]에서 백랑수(白浪水)와 요수(遼水)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안시(
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9

 

압록강은 구려하였고 대요수와 함께 안시 서쪽에서 바다로 나갔고 대요수는 백랑수와 하류에서 합쳤다.
백랑수(白浪水)는 현재의 대릉하(大凌河)이고, 과거 대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던 물길은 현재 고릉하(古凌河)라고 부른다.

그러면 고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는 곳을 고대의 요동군 방현(房縣)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구방자진(溝幇子鎭)이 그 흔적이다.

요동군 안시현(安市縣)은 그 하류 해안이므로 지금의 반산현(盤山縣) 위치다.

그런데 이 안시현, 오늘날의 반산을 통해서 고구려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나갔다.
즉 신의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조선의 압록강은 한사군의 요동군 압록강도, 고구려 압록강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대요하(遼河)가 고구려 압록강이었다.

 

[전한서]의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은 “현도군(玄菟郡)-서개마현”을 지나 국내성을 지나 염난수와 합치고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바다에 나왔는데 [신당서]에서는 더 남쪽의 “요동군 안시현(반산)”으로 나왔다.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온 열구(裂口)가 수백년의 퇴적작용으로 점점 메워진 것이다.

 

2. 두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그런데 앞의 [신당서]를 다시 보니까  마자수압록강이 말갈백산 “馬訾水 出靺鞨之白山”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백산은 당연히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냐 싶고, 또 대요수는 말갈 서남산 “大遼 出靺鞨西南山”에서 나왔는데 이 대요수의 발원지 말갈도 상식적으로 위치가 이상하다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청나라 강희제가 동쪽으로 순행했을 때 지금의 대요하(大遼河) 설명을 보면.

당시 기록인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이라는 책에 나온다.

강희제가 북경(北京)을 떠나와 요하(遼河)에 머물렀는데, 요하는 구려하라고도 부르고 요하의 서쪽은 요서(遼西), 요하의 동쪽은 요동(遼東)이며, 원래 말갈 북쪽의 여러 산에서 나오고 도산을 지나 홍주의 애두 우가장에서 양방구(梁房口):(지금의 태자하와 합치는 곳)를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駐蹕, 又名 句麗河 西爲 遼西 東爲 遼東 -句麗河-源出 靺鞨 北 諸山中 經 塗山 止洪州 崖頭 牛家莊 出梁房口 入海

 

즉 여기서 요즘의 대요하도 말갈(靺鞨) 북쪽의 여러 산에서 흘러나온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안시가 아니라 양방구로 바뀌었다.

한나라로부터 2000년이 지나니, 대릉하와 만나 삼각주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던 요하가 슬며시

물길을 바꾸어서 태자하와 만나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강 하구 삼각주의 서편에서 동편으로 옮겨간 것이다.

 

강희제때는 요하가 고구려의 구려하(句麗河)라고 했다.

고구려는 지금 대요하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도군 고구려현 옆인 서개마현에서 출발한 마자수압록강이 이렇게 구려하가 되어 흐르는데

마자수압록강이 지금의 대요하 가지가 아닐 수 없다. 

대요수도 압록강도 똑같이 말갈에서 나오고 대요하가 구려하였고 마자수압록강을 포함한다.

마자수 압록강이 발원하는 말갈 백산은 위에 실린 지도에서

현도군 북쪽의 산(현재 이름, 우란무두산(烏蘭木頭山)이고

대요수가 발원하는 말갈 서남산은 현도군 동남의 산=현재 이름, 차할산(察哈爾山)이다.

 

3. 세 번째 증거 [삼국유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

麗時都 安市城 在 遼水之北 遼水一名 鴨淥

 

요나라 요수가 고구려 압록강이고 본래 구려하이다....

고려승 일연이 고구려 압록강이 요나라 요하(遼河)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김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고구려 발생지를 지금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부근이라 한 것이다.


4. 네 번째 증거 [원사/지리지]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淥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5. 다섯 번째 증거 [자치통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당태종의 침공 때에 개전 초반에 장량(張亮)이 해군으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나 오직 서문으로 오를 수 있었는데

 

其城 四面懸絶...唯西門可上

 

정명진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가고, 왕대도가 먼저 올라서 5월 기사일에 함락시켰다.

 

程名振引兵夜至,副總管 王大度 先登, 5月己巳 拔之

 

총관 구효충에게 군사를 따로 주어서 압록수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했다.

 

分遣 總管丘孝忠 等 燿兵 於鴨淥水

 

비사성(卑沙城)이 대련(大連)의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고 1537년 [요동지(遼東志)]에서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면 비사성을 함락한 날 그 밤에 압록강에 불 밝힐 수 있겠는가?

 

아니다.

비사성은 대련반도가 절대 아니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강인가?

군신들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에게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수군 군대는 사성(沙城)에 있으니,

부르면 이틀밤信宿(兩夜)에 올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대요하 하구의 안시성에서부터 사성의 장량을 부르러 가고 응답하여서 군대가 정비하여 배타고 오는데

단 이틀이면 되는 압록강은 결코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없으니 응당 지금의 요하(遼河)다.


6. 여섯 번째 증거  "비사목장비"

청나라는 요양시(遼陽市)에 팔기목장(八旗牧場)을 두었다.

그 팔기목장 중 하나인 요양시 태자하구(太子河區).소기가공사(小祁家公社).방쌍수자(芳雙樹子).

하리하목장(蛤蜊河牧場)에서 3쾌석비三快石碑가 나왔고, 그중 제1쾌 목장비(弟1快 牧場碑)에서는

“비사목장 세세거민 영위자뢰(俾斯牧場 世世居民 永爲資賴)라고 했는데

이는 1775년에 기록된 것으로서 “비사목장은 백성들이 세세히 살아온 곳이지만...

이제 팔기목장 설치하니까 출입하지 마라”는 팔기목장 설치 포고문이었다.

 

요양시 서쪽 태자하 강안에 대대로 비사목장이 내려왔던 것이다.

비사성과 달리 고구려 사비성(沙卑城)은 옥저성이 있던 발해 남해부성이었다.

요나라는 해주(海州)라고 했고 심양시 동쪽 무순(撫順市)에 있었고,

해주가 관할하는 요주(耀州)가 해주 서남 200리에 있었는데, 이 사령 삼한고성의 남쪽에 요주성(耀州城)이

남아있다.

따라서 장량의 붉 밝히는 비사성의 요병(燿兵)에서 요나라 요주(耀州)가 비롯되는 것이다.

비사성의 비사가 빛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빛성이다.

사비성은 새비사성, 새빛성일 것이다.

사비성은 발해 옥주였고 요나라 해주가 되었다.

비사성은 발해 초주(椒州)였고 요나라 요주(耀州)가 되었고 지금의 요하(遼河)에 있었는데 그 요하를

당나라는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7. 일곱 번째 증거 / 요사[태조기/식화지]
915년 요나라 태조가 압록강에 가니 고려가 사자를 보내서 보검을 받쳤다.

915년 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新羅遣使貢方物,高麗遣使進寶劍,吳越王錢鏐遣滕彥休來貢。

현재의 압록강은 요나라 성종의 고려정벌 때에 처음 가서 지금 압록강에 개주를 설치한다.

 

요사 식화지 기록에 보면 916년에 요나라는 요하 동쪽의 발해 요양성을 차지한다.

 

神冊初,平渤海,得廣州,[三]本渤海鐵利府,改曰鐵利州,地亦多鐵.

東平縣本漢襄平縣故地,產鐵礦,置採煉者三百戶,隨賦供納.

 

그래서 광주를 얻는데 지금 요양의 서북방이다.

 태조는 철리주라고 했고 요나라 성종이 광주로 개명합니다.

동평현은 개원시 남쪽입니다.

요서의 양평현 대장장이들을 전쟁터로 데려간 것인데 그 위치가 개원이다.

(요사지리지 동주 진안군 동평현조 참조)

 

즉 916년에 현재의 요하를 건너오기 전에 915년의 압록강은 요양 서쪽입니다. 

요나라는 918년에 태조가 처음으로 요양고성에 가고 동평군성을 짓게 한다.

 

神策 三年 冬十二月庚子朔,幸遼陽故城

四年春正 二月丙寅,修遼陽故城,以漢民、渤海戶實之,改為東平郡,置防禦使。

夏五月庚辰,至自東平郡。

 

요양고성을 고치고 한인과 발해인을 살게 하면 동평군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뒤에 남경이라고 고치며

다시 동경이라 부른다.

 

8. 여덟 번째 증거[전요지]

요양시(遼陽市) 수산(手山) 남쪽 7리에 경관(京觀)이 있었다.

[전요지(全遼志)]의 4권 고적편에

이 경관(京觀)에 대하여 요동국을 토벌한 진나라 황제인 사마의(司馬懿)가 만들고 당나라가 훼손했다고 적었다.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도망치던 요동국왕 공손연을 목 베고 나서 요동성 안에 들어가서 성민 7천명을 학살하고 만든 시체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 사람이 훼손할 이유는 없고 그 시체탑을 당나라가 훼손했다는 기록도 없다.

수나라가 살수 대첩을 당하기 직전에,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이 바다로 들어와서 평양의 나곽(羅廓)

즉 외성(外城) 안까지 들어와 약탈하다가 결국 대오가 흩어져서 고구려 복병을 만나서 떼로 죽었다.

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고구려 전승비를 세웠던 것이 바로 요양시 수산(首山)의 경관(京觀)이고,

당나라 초에 고구려와 서로 화해하면서, 당나라 사자 장손사(長孫師)가 평양에 들어와 직접 경관을 허물고

수나라 전사자들을 제사 지내주고 돌아갔다.

역사 기록에 238년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요동성에 경관을 세웠고, 612년 이후에 고구려가 평양성에 경관을

세웠고, 그리고 당나라 장손사가 경관을 허문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요양시 수산 경관의 기록을 3세기 위나라

경관으로 보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고 7세기 고구려 경관으로 보아야 옳다.

 

9. 아홉 번째 증거[대원일통지]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에 의하면 요양시(遼陽市) 동쪽 30리에 명왕산(明王山)이 있고 거기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이 있었다.

 

[대원일통지]는 [거란지(契丹志)]를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의 묘가 있어서 명왕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왕 동명이라고도 부기했다.

30리 동쪽은 기반산(棋盤山)=270m 위치다.

지금 대동강大同江에 있는 동명왕릉만 오로지 동명왕릉인 줄 알고 있지만 요양시 동쪽 30리에도

동명왕릉이 있었다.

거기 요양시에 고구려 수도도 있었던 것이다.

 평원왕의 장안평양성이다.


10. 열 번째 증거 "강이식 장군 원수림"

심양시 동쪽 무순시(撫順市) 살수수(薩爾滸水) 부근에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강이식 원수림에 남아있던 고구려 석물

 

강이식장군은 수문제의 오만한 국서에 답하여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산동을 침공하여 수나라를 징벌했고,

수문제가 30만으로 쳐들어오니 이를 요서(遼西)에서 막아냈고, 그후 수양제가 다시 10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참모총장인 병마도원수를 맡아서 살수대첩을 치러냈으니 그의 휘하에 을지문덕 장군이 있었다.

원수림 역전(驛前)에 있던 강장군의 원수묘비 비석은 단재 신채호가 기록하였는데 문화혁명 때에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도 원수림에 가면 약간의 석물(石物)이 남아 있다.

신채호 선생이 보았던 대부분의 유물은 무순의 대형 댐으로 수몰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부 남아 있었다.  

병마도원수 강장군의 묘가 바로 살수(薩水) 즉, 혼하(渾河)를 굽어보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성은 살수로부터

멀지 않으니 요양성인 것이다.

고구려 압록수는 살수 서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혼하 서북의 대요하(大遼河)가 압록수였던 것이다.

 

11. 열한 번째 증거 [발해국기]

[발해국기(渤海國記)] 상편 국통 중 발해무황제 대무예 기록에서는 “시무왕 장서경(謚武王 葬西京)”이라하여

놀라게 한다.

해석하면 시호를 무왕이라 하고 서경에 장사를 치렀다는 기록이다.

이제까지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는데 어찌 대무예황제가 압록강 유역인 발해 서경압록부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발해 2대 황제 대무예(大武藝) 묘비가 1900년 무렵에 흥경(興京)에서 발굴되어 사람들이 모여 그의 묘비문을

탁본하여 읽어보니 그를 발해 서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었었다고 전한다.

흥경(興京)이었던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濱縣)은 발해 압록부(鴨淥府) 소속이었고 이는 압록강의 가지변이

되어야 맞는데, 지금의 대요하(遼河)로 들어가는 물이고 대요하가 발해 압록강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묘는 신빈현 노성(老城) 안쪽 홀한정(忽罕井) 옆 사당 부근일 수도 있다.

 

12. 열두 번째 증거[신당서-도리기]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道里記)] 발해 기록이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백여리를 올라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삼십리를 가면 박작구이고, 발해 국경이며,

여기서 오백리를 올라가면 구도현성이고 고려 때 왕도였다.

구도현성에서 다시 이백리를 가면 신주다.

신주에서 육로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이고 천보때 발해 수도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이다.”

 

道里記/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 東北泝流 二百里 至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그동안 이 압록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해석해 왔고, 압록강 집안(集安)에서 육로로 400리를 가면

대충 길림(吉林) 화전현(樺甸縣) 소밀성(蘇密城)인데, 이 소밀성을 발해 초기 왕도인 현주(顯州)라고 왜곡해왔다.

 

지도10

 

[신당서-도리기]에 의한 발해 여행로, 개원 동북 현주, 요하투 북 현주 참조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녹주(淥州)로 바뀌었고,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인데

성둘레가 이십리라고 하였다.


淥州,鸭淥軍,節度。本高麗故国,渤海號 西京鸭淥府。城高三丈,廣輪二十里 石城 都督 神、桓、丰、正 四州

 

그런데 집안 근처에는 고작 7000m인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나마 환도성이란다.
아무튼 여기서부터 200리 물길 위에 임강(臨江)이라는 곳에 압록부 서경성, 광륜 20리 대성은 흔적도 없다.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고구려가 그 안에 마구 꾸겨져 넣어졌다.

그런 광륜 20리의 거대 석성이 지금 압록강 임강에 흔적도 없다는 사실이 바로 고구려, 발해 압록수가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 벽촌에 세워졌던 20리 거대 석성이 도시 개발도 없었는데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없다.

 

13. 열세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2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 즉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주를 차지했다 遂克 顯州“라고 기록하였다.

금나라 장수가 황룡부(黃龍府)성을 함락하고서 요나라 현주(顯州)를 함락시킨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따라서 위 문장의 현주는 요나라 현주가 아니라 발해 현주다.

현주(顯州)는 당나라 천보 때의 발해 왕도다.

 

열한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에 의하면 압록강 상류의 신주에서 육로로 400리다.

이제까지는 현재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성, 임강의 신주에서 북으로 400리의 화전현 소밀성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호종동순일록]에서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행적을 인용하여서 발해 현주가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 부근으로 기록된 것이다.

발해 현주성의 실상은 장춘시 장춘역 북쪽 관성구에 있는 관성자(寬城子)다.

 

14. 열네 번째 증거 [유변기략]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

“요하투는 개원의 서북에 있고 구현주의 남쪽에 있다.

 遼河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라고 하였다.

요하투(遼河套)는 요하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투套: 河流 或山脈 轉折 彎曲的地方。하투河套; 황하의 만곡부, 음산산맥 아래..).

요하투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開原)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동시에 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이다.

구현주는 발해 신주에서 400리 육로 거리로서 천보 때 발해 초기 왕도이기도 하다. 

 훗날의 발해 중경성은 장춘시 관성자로서 노주(盧州)로 고려되고 그 이전의 발해 중경성 현주는 별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장춘시는 송화강 아래에 있고 요하투 북쪽이라고 보기 어렵다.

 

15.  열다섯 번째 증거 [요기]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요기(遼紀)]에서 서기 1448년, 정통(正統)13년조에 개원(開原)에서

동북쪽으로 평정산(平頂山) 안中에 현주폐성(顯州廢城), 요나라 때 중경(中京)이 있다고 하였다.

 

開原 東北 平頂山中 有 顯州廢城者 遼時中京也..肥饒之地 不下萬頃...遼河套

 

개원의 동북방에 발해 현주성이 있었다.

노주 중경성이 세워지기 중경이기도 했다. 개원 동남방의 길림시 화전현 소밀성은 발해 중경이 절대 아니다.

요나라 중경은 적봉시(赤峯市) 녕성(寗城)이고, 또 현주(顯州)도 아니므로 여기서 말한 중경은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가 옳다.

 

16. 열여섯 번째 증거 [전요비고]

역시 청나라 때의 [전요비고全(遼備考)]에도 요하투에 관하여 같은 글이 있다.

요하투는 개원 서북에 있고 구 현주성 아래에 있으며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고 평야가 바다보다 작지 않다.

 

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水甘土厚 平地 不下萬頃...

 

앞에 12, 13, 14를 종합하면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는 영강주혼동군이었던 대파고성의 남쪽에 있고, 요하투의 북쪽에 있고, 

그리고 개원의 동북방에 있다.

발해 첫 번째 중경성, 옛 현주성은 동요하 요하투 유역이면서 평정산(平頂山) 안에 있다.

동요하 유역의 평정산을 고려하면 이는 공주령시 쌍성자진과 연화산진 사이에 있는 구릉산으로 고려된다.

 여기서 송화강의 가지와 동요하의 가지가 각각 발원한다.

쌍성자진 가까이에 대조양보(大朝陽堡)가 남아 있는데 이는 평정산중에 세워진 현주 홀한성에 연결된

마을로 고려된다.

대조영의 사후에 새로 지은 발해 중경성은 발해중경현덕부의 첫 번째 수주(首州)인 노주(盧州)로서

장춘시(長春市) 관성자(寬城子)다.

지금 장춘시 관성자역 북쪽에 있던 관성자성은 성둘레가 남북 4리, 동서 7리로 기록되었다.

성둘레가 무려 22리다.

요나라 상경임황부가 27리, 금나라 상경이 21.5리, 그리고 영안현 동경성의 성둘레가 28리다.

 

17. 열일곱 번째 증거 [금사-태조기]

[금사/태조기(太祖紀)]의 건국기를 보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처음 거병을 하였을 때, 영강주(寧江州)는 발해 대씨(大氏) 소유였는데,

영강주 사람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가 달로고부로 부터 아골타를 찾아와서 보고 말하기를

“요나라를 치려고 아골타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물으니

태조가 대답하기를 “내 군사가 비록 적지만 (발해) 구국 땅에서 우리 여진과 너희 발해족은 이웃이었다.

마땅히 나를 따르라. 만일 요나라를 따르면 내가 가서 영강주를 치겠다.”고 말했다.

 

寧江州渤海大家奴 於是達魯古部實裡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太祖曰 吾兵雖少 舊國也. 與汝鄰境 固當從我. 若畏遼人 自往就之.

 

이 직후에 발해 대가노는 아골타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영강주 성주 발해인 대약사노(大藥師奴)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골타는 한달만에 영강주를 쳐서 영강성주인 방어사(防禦使) 발해인 대약사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대약사노를 용서하고 풀어주면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발해와 여진족은 본동일가(本同一家)라

회유하고 여타의 발해인들도 회유하고 우대하였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모후가 발해인이었다.

 

[신당서-도리기]에서

발해 현주, 즉 공주령시 회덕진으로부터 600리 동북에 발해 상경이 있었고,

[신당서-발해전]에서는 발해 상경으로부터 300리 남쪽에 발해 구국이 있었다.

이때,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입으로 영강주寧江州가 발해 구국(舊國)이라고 말하고 기록된 것이다.

 

영강주는 [호종동순일록]에서

길림시(吉林市) 오라고성(烏拉古城)에서 80리 물길인데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진(大坡鎭)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발해 중경 노주와 발해 구국이 모두 장춘시에 있다.

숙신고지(肅愼故地)가 장춘시라고 장춘시는 주장한다.

발해 현주는 공주령시 연화산진 동북 산성이다.

고구려, 발해 압록수는 바로 그 남쪽에 있다.

 

발해 구국 터인 대파고성 부근에서는 돈화현의 육정산 고분보다 100년 빠른 발해 초기 고분이 대량 발굴되었다.

물론 전한시대 숙신(肅愼) 고분도 발견되었다.

발해고지가 숙신고지였으니 당연하다.

발해 중경을 길림 남쪽 소밀성으로 보고, 발해 구국을 길림 동남쪽 돈화현 오동성으로 규정한 발해사는 전부

헛것이다.

 

18. 열여덟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 2

 

지도11 

 

 당나라 해로도 및 압록강변 발해 주군현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遼河)였으면 현재 압록강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오골강(烏骨江)이라고 했다.

 

[신당서]에 실린 고탐(賈耽)의 <도리기>를 본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오백리를 가면 도리진(都里鎭)이고,

다시 동쪽으로 연안을 따라 800리를 가면 오골강이 나온다.”

 

登州, 東北海行 過 大謝島,龜歆島,淤島,烏湖島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鎭二百里.

東方海壖 過靑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 八百里

 

도리진은 대련(大蓮)이고 지금 압록강은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이었다.

그러나 오골강도 나중에 역시 압록강이라고도 했다.

서요하(西遼河) 압록수와 구별하여 동압록(東鴨淥)이라고도 칭했다. 

지금 중국에서 고구려 졸본성이라고 지정한 환인(桓仁)의 오녀산성(烏女山城)은

본래 오리고산(烏爾古山)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의 오골성(烏骨城)이었던 것이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이 오고성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19. 열아홉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였으면 현재 압록강 주변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지금 압록강 북쪽에는 개주(開州), 남쪽에는 염주(鹽州)를 두었다.

지금 단동(丹東)의 봉황성(鳳凰城)에 요나라는 개주(開州)와 개원현(開遠縣)을 두었는데,

발해의 동경용원부 경주(慶州)의 이름을 차용하려다가 개주로 고쳐 부른 것이며 경주 부속현이

용원현을 개주 개원현으로 고치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름만 빌린 것이다.

개주(開州)의 속주 3주를 보면 이름만 빌린 것이 확실하다.

개주의 속주는 염주(鹽州)와 목주(穆州), 하주(賀州) 셋이다.

 

[요사-지리지] 염주(鹽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이고 해양, 접해, 격천, 용하 4현이 있었는데 다 폐지하였고 개주와 140리다.

 

鹽州 本 渤海龍河郡, 故縣四 海洋, 接海, 格川, 龍河 皆廢 隸開州 相去 一百四十里

 

두만강가의 발해 염주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 등 4현이 있었는데, 요나라가 발해 염주

이름을 가져다가 압록강의 발해 용하군에 설치했는데, 발해 용하군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현이

있었지만 다 없앴다.

즉, 요나라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었으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이다.

용하군은 지금 북한의 용천군(龍川郡)이 되었는데 용천역에서 대폭발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 용천군 동남방에 염주(鹽州)가 남아있다.

 

다음 목주(穆州)의 설명을 본다.

요나라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며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발해 4현이 있었으나 모두 폐지하였다.

동북으로 개주까지 120리이며 회농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穆州,保和軍,刺史。本渤海會農郡,故縣四:會農、水歧、順化、美縣,

皆廢。户三百。隸開州。東北至開州一百二十里。統縣一:會農縣。

 

발해 회농군의 위치는 개주 서남 120리로서 단동시(丹東市) 동구현(東溝縣) 고산진(孤山鎭)으로 추정된다.

 

다음 하주(賀州)의 설명을 본다.

요나라 하주(賀州)는 본래 발해 길리군(吉理郡)이며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 등

4현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賀州,刺史。本渤海 吉理郡,故縣四:洪賀、送城、吉理、石山,皆廢。户三百。隸開州。

 

단,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에서는 하주가 아니라 길주(吉州)라고 표시하였고 압록강 남쪽이다.

평안북도 초산군 동남에 송성고성이 있었다.

 

단동시가 현재 사학계의 주장대로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이었다는 왜곡 역사 소설을

뒷받침 할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편 발해는 62주와 천정군(泉井郡)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더 많은 주와 군이 발견된다.
이는 발해 12대 대인수황제 때의 공적이다.

발해 남해부가 요양시(遼陽市) 북쪽까지 있었고, 요양시 동남쪽, 본계시 부근은 발해 삼로군(杉盧郡)이 있었다.

요나라 노주(盧州)는 발해 중경 노주의 이름만 빌려서, 발해 삼로군(杉盧郡) 위치에 두었고 삼로군에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 등이다.

요나라 노주는 재경 동쪽 130리에 있다.

이 발해 삼로군의 흔적이 본계시(本溪市) 삼송산성(杉松山城)이다.

본(本)을 한으로 읽는 것이 부여식 혹은 일본식이다.

(日本 ; 니혼!!!    본(本) → 한 (汗),    고구려 홀본 忽本 → 발해 홀한성 忽汗城)

그래서 본계(本溪)에 흐르는 강이 역시 한수여서 거기 삼로군에는 한양현이 있었다.

 

지금의 압록강 유역에는 발해 용하군, 길리군, 회농군 등이 있었다.

이는 818년 당나라에 조공한 고덕무의 [후고구려]가 본계시 부터 대동강 까지 자리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819년경에 대인수 황제가 이 고덕무 후고구려를 병탄하여 임진강까지 확보하고서, 그때 새로 발해 군현이

설치되는 것이다.

특히 단동 봉황성은 성둘레가 10000m에 달하는데, 만주에서 제일 큰 산성(山城)이다.

평지성까지 치면 5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성이 큰 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수도가 여기 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받아 자립하였던 고덕무의 후고구려(699~820년) 때에

도성으로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13년 당나라가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으로 인정한 고정전(高定傳)은 그 고덕무의 후예다.

당나라 사자 최흔은 대련 땅을 가졌던 고정전의 후고구려를 거쳐서 발해에 들어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간 것이 된다.  

 

20. 스무번째 증거 “관구검기공비”

지도12  

 

매구곡과 회발성, 관구검 기공비와 환도성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유주자사 관구검의 비장들이 환도성에서 동천왕을 쫓아 천리를 더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운 것이었다.

 

[삼국지-위지-관구검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45년 양구대전(大戰梁口) 신민시(新民市)에서 승리하여 동천왕 위궁이 패주하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환도산성에 올랐다.

수천명의 목을 쳤다.

동천왕 위궁은 홀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군사를 돌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천왕이 압록원(鴨淥原)으로 도주하였고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도륙하였고,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동천왕을 추격하니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했다.

246년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쳤다.

동천왕은 북옥저인 매구(買溝) 길림 매하구시(吉林 梅河口市)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추격시켜서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달하여

각석기공(刻石記功)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돌아와 又到丸都山 불내성名不耐之城이라고 새기고 돌아왔다.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동옥저전>에서는 숙신지계가 아니라 옥저동계라고 하였다.

 

<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양구에서 패한 동천왕은 압록원을 거쳐 옥저로 도망갔고, 양구에서 이긴 관구검은 환도산에 오르고 또 부하를

옥저로 보내 천리나 추격하게 하였고 부하들은 압록강 환도성 천리밖 숙신지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고

환도에 돌아와 불내성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저들의 옛말인 중국말을 바로 읽지 못해서 압록강 “환도성”에서 무려 천리나 추격하여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워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자

이를 천연덕스럽게 고구려 “환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나라 사학자들도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분명히 네 글자로 숙신지계(肅愼之界) 혹은 옥저지계(沃沮之界) 라고 적었는데

이것을 “환 도 성” 이렇게 세 글자로만 읽어대니 한심하다.

 

21. 스물한 번째 증거 [요사 / 아고지전]

[요사/아고지전(阿古只傳)]은 다음과 같다.

요나라 장수 아고지(阿古只)는 북부재상이었고, 요태조를 따라서 발해 함락전쟁에 참여하여서 발해 부여성을

함락하고, 발해 노상의 삼만 군대를 기병 오백으로 앞장서서 무찔렀고, 발해를 멸망시켜 동단국으로 바꾸고서

발해의 도적들이 일어나니, 아고지는 강묵기(康黙記)와 토벌에 나서서 발해 압록부에서 온 유민 기병대

칠천과 만나서 한번 대전에 무찌르고 이천의 수급을 벤 후에 추격하고 진군하여 회발성(回跋城)을 깨트렸다.

 

阿古只,以功拜北府宰相,攻渤海,破扶余城,独將騎兵五百,敗老相軍三万。

渤海既平,改東丹国。頃之,已降郡縣復叛,盗賊蜂起。阿古只与

康默記討之,所向披靡。会賊游騎七千自鸭淥府來援,勢張甚。阿古只師 魔下精銳,

直犯其鋒,一戰克之,斬馘二千余,遂進軍破回跋城。

 

회발성은 매하구시(梅河口市) 동쪽 휘남현(輝南縣)의 휘발성(輝發城)이 확증되어있다.

압록부 압록강에서 나와서 쫓긴 발해 기병대가 휘발성에 피신했다가 그나마 파해된 것이다.

압록부가 만일 집안이라면 휘남에서 거기 집안의 제 집까지 물러가 내려가서 숨고 방어할 일이다.

그러나 압록부가 요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밀려서 동쪽으로 피신한 발해 기병은 더 갈 곳이 없어서  

휘발성에서 싸우다 옥쇄한 것이다.

그래서 발해 압록부는 휘발성의 서쪽 지금의 요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영위지(營衛志)]에서 휘발성이 있던 회발부(回跋府)와 오고부(烏古府)=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烏女山城)와 장백산부(長白山府)는 회홀부(回鶻府)와 같이 “외십부(外十府)”로서

요나라 직할이 아닌 토착 수령들의 독립적인 부(府)가 되었다.

그런데 압록부 환주, 신주 성들은 요나라 직할이다.
즉 압록부가 환인현의 오고성이나 매하구시의 회홀성보다 요나라 내지에 가까운 서북쪽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동천왕이 도망친 매구여, 즉 매하구시는 대무신왕 때 복속했는데,

주몽에게 이미 망한 북옥저가 동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 동천왕이 압록원을 넘어 피신한 매구여와 발해 압록부 기병이 피신한 휘발성은 같은 경로다.

동천왕 때 압록원이 발해 압록부 신주성이 되었었다.

요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거란군은 신의주가 아니라 집안 가까운 곳에서 청천강을 타고

쳐내려온 기록이 있었다.

지금 압록강 북쪽의 진강진(振江鎭)이 금나라 파사부로서 고대로부터 도강의 거점이다.

625 때도 중국인민군이 집안에서 압록강을 넘어 남진해왔다.

역사는 그렇게 자꾸 반복되니 미리 제대로 역사를 알고 올바로 대처해서 침공 길목을 정확하게 막아서

우리 미래를 굳게 지켜야 한다.

 

22. 스물두 번째 증거 “평양성벽각서”

고구려 압록강이 대요하였고 고구려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면 대동강의 평양은 고구려 때 과연 무엇이었는가?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漢城)이었다.

 

“漢城下 後部小兄...”

 

여기서 “한성하(漢城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잠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백제 무녕왕(武寧王) 때다.

아니 본래는 백제 북한산성(北漢山城)이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이 빼앗았다.

이 지역에 살던 백제인들이, 일본에 가서 백제촌을 짓고, 그들의 고분 속에 평양의 밤하늘,

평양의 별자리를 그려 넣었으니,

그것이 일본 나라현奈浪(樂浪의 차자다)의 기토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지금 대동강 평양 땅에 한수라고 하고 한성을 짓고 백제인들이 살았던 사실을 모르는 역사학자들이,

일본 백제촌에 고구려 간첩이 스며들어 감히 고분을 만들고 게다가 고구려 하늘 별자리를 그려넣었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마한의 평양 한성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 /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다.

그 남쪽에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漢山城)이 있었다.

[삼국사기-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 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나니,

공주로 천도한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예성강(禮成江)에 위례성(慰禮城)을 다시 만든다.

례성의 물이 위례성강이고 다시 간단히 줄여서 예성강이다.

예성강 상류는 부여면의 위라천(位羅川)이다.

부여면 위라천과 예성강을 합치면 위례성(慰禮城)이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이 그 위례성인데 충남 부여의 백제 왕궁인

부소산성夫(蘇山城)과 닮은 꼴로서 매우 유사하다.

또한 백제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묘(張撫夷墓)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발굴되었다.

이 대방태수묘는 무녕왕릉(武寧王陵)과 똑같은 벽돌묘로서 무녕왕릉의 모델이다.

따라서 백제는 서울 한성에 도읍한 사실(史實)이 없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대규모 백제 고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벽돌로 지은 고분이 하나도 없다. 물론 사신도 같은 벽화 고분도 없다.

무녕왕(武寧王) 때에 공주의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하여 평양과 백제 한성을 수복한다.

평양성벽각서에 의하면 한성을 쌓던 고구려가 놀라 도망간다.

백제는 이때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는데, 평양은 백제의 북한산성이었고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백제 한성은 성천의 홀골산성 즉 첫 번째 위례성(慰禮城)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평양은 백제고지(百濟故地)라고 나온다.

지금의 대동강, 즉 백제 한산성의 하늘도 물론 백제 고향 하늘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 이전에는,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더 많고 사회가 훨씬 발전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요양시, 평양시 벽화 고분을 보면 그렇다. 

백제 무녕왕 사후에 안장왕의 고구려 대군이 황해도 오곡(五谷),

즉 황해도 복판 서흥(瑞興)으로 쳐들어온 것은 황해도가 백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 성왕 때에 고구려 도살성(道薩城)=황해도 연산군(燕山郡) 도소면(道所面)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金峴城)=황해도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太白山城), 즉 2차 위례성(慰禮城)을

빼앗는 전투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신라 이사부(異史夫)가 둘 다 빼앗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금천군金(川郡과 니미방(尼彌方)이라면서 주석했는데
바로 그 위치다.

그리하여 진흥왕의 신라가 예성강(禮成江) 하구에서 중국과 교통하게 된다.

이후 백제 여창(餘昌) 왕자(=위덕왕)가 552년에 평양을 한번 더 침공하여 고구려군을 동성산으로 쫓는다.

 일본에서는 동성산을 대동강 평양의 대성산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 여창은 북제(北齊)에서 동청주자사(東淸州刺史)라고 하였다.

동청주는 중국 산동성의 청도시(淸島市)를 가리키는데 백제의 교두보였다. 

 백제가 진晉나라 이래로 송나라, 남제국, 양나라 시대까지 백제 해군력으로 양자강 북쪽, 산동성 일대를

장악했었다.

북위(北魏)는 이 백제 땅을 뺏으려고 489년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백제 동성왕 때에 이를 막아냈다.

고구려 고분이 압록강(鴨綠江) 집안에 수만 개가 있다.

신라 고분도 수만 개가 경주에 있다. 백제만 그 수만 개의 고분이 없다.

서울 송파에 몇 개...공주에 몇 개...이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역사가 왜곡 조작된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만 개의 백제 고분이 대부분 대동강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다.

지금까지 낙랑(樂浪) 고분으로 알려진 수만개의 고분들이 실상은 백제 고분이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평양성은 언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까?

지금 평양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외성은 기자정(箕子井) 제도로서 성안 거리가 세워졌고,

이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이 평양성은 당나라 장안성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만들어졌고 고구려 평원왕 때

만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이 당나라 장안성에 끌려갔다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 조선군왕으로 요동,

즉 고구려 텃밭에 복귀했었다.

그러나 곧 말갈과 내통한다는 반역의 의심을 받고 소환되어서 죽고 그 다음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요동에 오는데, 그는 소환당하지 않고 확실하게 독립해버렸다.

그가 당나라 장안에서 이 대동강 한성에 돌아와서 평양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당나라 장안을 본 따서

평양성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면 매우 타당하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699년에서 819년까지 무려 120년을 존속했다.

산동반도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제국(齊國)761~818년보다 오래다.

지금의 단동 봉황산성과 대동강 평양성은 이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의 작품이다.

평양 남쪽 정릉사 동명왕묘도 역시 고덕무의 후고구려 때에 지어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반면에 백제 시조 온조왕이 세운 백제 한수의 동명왕묘는 대동강 동북쪽 온조의 위례성이 있던

성천 홀골산성 부근에 세워졌다.


23. 스물세 번째 증거 “천남산 묘지”

천남산(泉男産)은 연개소문 차자로서, 형 천남생(泉男生)을 배반하여 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했는데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漢城)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즉, 고구려가 패망한 대동강의 마지막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역사 연구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의 기록과 바로 그 지역의 기록을 우선한다.

고구려의 땅, 그 중에서도 수도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 지역의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500년이나 지난 뒤에 고구려의 귀퉁이 끝에서 쓰여진 고려시대 김부식의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삼국사기 백제는 그래서 신빙성이 적은 것이다.

천남생, 천남산, 천헌성 묘지 등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쓰여졌고, [삼국사기]보다 무려 50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24. 스물네 번째 증거 “천남생 묘지”

“천남생 묘지(泉男生墓誌)”에서

천남생의 출생지를 요동군-평양성(遼東郡平壤城)이라 기록하였다.

이는 대동강의 임시 평양이 된 고구려 한성, 임시 평양과 확실하게 구별한 것이다.

게다가 장수왕이 도읍했던 낙랑군 평양성=요양시(遼陽市)과도 구별이 모호하다.

 당시 중국 기록에 요동군을 가진 고구려왕에 대하여 요동왕이라고도 했으니

낙랑군 평양성 고구려왕성이 요동군 평양성이라고 잘못 기록될 수도 있다.

본래 하평양성(下平壤)/廣開土王碑文 이나 남평양성(南平壤城)=(桓檀古記-高句麗)이라고도 부르던  

고구려 한성(漢城)인 대동강 평양성과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김유신(金庾信)은 황해도 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해 가는데

그 평양은 장새현(獐塞縣)이었던 수안(遂安)으로부터 거리 36000보步로서

그 기록은 분명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성에서 망했지만, 그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면,

언제부터 고구려왕이 대동강 한성에 피난하여 살게 되었을까?

당나라 태종의 645년 침입 이후, 소정방의 고구려 침략이 있던 660년 사이로 추정된다.

 

25. 스물다섯 번째 증거 [명나라 도서 그림]

명나라 초기 지도.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解宋寨界 單山縣界 桑島馬停寨界 龜島昌邑縣界 歆末島光界
都里鎭蒲臺界 靑島利津界 黃島州界 直沽口寶低縣界 塔山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中前所界  牛車島中後所界 孤山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金州衛界
石灘島左所界東雲島 黃駝島蓋州衛界 屛風山復州衛界 鳳凰山中左所界 女兒河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
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鎭遼所界
臨江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4.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고구려 요수가 현재의 대릉하라는 증거 6가지

1. 첫 번째 증거 [한서-지리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서 요동군 망평현에는 대요수가 새외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안시로 가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물길은 고작 1250리다.

 

望平; 大遼水 出塞外 南至 安市 入海 行 1250里

 

현재 중국의 10리는 5km지만 한나라 때는 약 3km였다.

당나라 때는 4km 정도 였고 현재 우리나라와 같다.

따라서 당시 대요수는 400km 길이다.

전한시대 대요수는 현도군-고구려현을 지나고 요동군-망평현, -양평현, -요대현, -안시현”을 차례로 지난다.

대요수는 말갈 서부 남산에서 나오고 [전한서]에서 물길이 1250리다. 

 반면에 오늘날의 대요하(遼河)는 물길만도 3000리 이상이니 절대로 전한시대 대요수가 아니다.

이는 지도9에 자세하다.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은 오늘날의 류하柳河 즉, 구려하(句麗河), 거류하(巨流河)며 또 구하(扣河)가 된다.

그중 염난수는 고륜기(庫倫旗)를 지나는 구하(扣河)의 북쪽 가지로 고려된다.

낙랑군(樂浪郡)의 물도, 전한시대의 패수(浿水)는 대요하(大遼河)이고,

후한시대 패수는 낙도현 아래 작은 물 어니수다.

전한시대 대수(帶水)는 시하(柴河), 열수(列水)는 범하(汎河)다.

열수(列水)는 분려산(分黎山)이라고 하던 청원현(淸原縣) 마리홍산(摩離紅山)=莫日紅山에서 비롯되어

북부의 진한과 남부의 마한을 나누는 경계였다.

살수(薩水), 기수(奇首)는 혼하(渾河)로 고려된다.

그리고 태자하는 혼하(渾河)의 남쪽 가지였으니 고대에는 한수(漢水)였을 것이다.

발해 삼로군이 본계의 태자하변에 있었는데 거기에 한양현(漢陽縣)이 있었으니

태자하가 한때 한수(漢水)로 존재했었던 근거가 된다.

한편 비류수(沸流水)는 양식목하(養息沐河), 소수(小水)는 부신시 세하(細河)다.

소수맥(小水麥) 구려(句麗)가 거기 있었다.

 

지난 몇백년 동안 대요수를 지금의 대요하로 보아온 것은 지리상으로 엄청난 비약이었다.

 

백랑수(白浪水)였던 대릉하(大凌河)로부터 대요하(遼河) 사이에 있는 양랑하(楊郞河), 무량전수(無梁殿水),

요양하(繞陽河), 유하(柳河),

양식목하(養植沐河), 수수하(秀水河)가 모두 다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왜곡된 역사의 커다란 구멍이다.

 무려 500리 사이에 아무 물도 없는 것이 된다.

 

[한서-지리지] 기록 체제상에서 이런 허술한 기록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 

근세 역사가들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을 지금 압록강으로 보면 요동반도에 흐르는 수십개의 중간 물들이

또다시 몽땅 사라지고 만다.

 

[한서-지리지]의 왜곡된 해석은 만주지리를 한 점의 블랙홀 속으로 빠트린다.

 

[한서-지리지]에서 요동군 바로 앞의 요서군의 물은 48개다.

48개의 물을 모두 합치면 3000리가 넘는단다.

작은 물까지 무지무지 자세하다.

그런 요서군 물도 약간은 좀 이상하다.

그에 비하면 요동군, 현도군 기록은 그들이 요동군 물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하물며

낙랑군 물에 대한 기록에 과연 무슨 진실이 있고, 그 물 이름이 어찌 한반도까지 밀려 내려와

덮어질 수 있겠는가?

 

제 땅 요동의 물이름도 잘 모르면서 남의 땅 낙랑의 물이름을 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런데도 그들이 그때 이미 다 알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실상은 그들이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아래 책 [당회요]에서 증언해 주고 있다.

 

2. 두 번째 증거 [당회요]

한나라 때는 지금의 대요하(遼河)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642년 안시성 패전뒤 2년만에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644년 영주도營州道(=조양시朝陽市)를 지나서

고구려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을 침범했는데,

 

[당회요(唐會要)]에 의하면 이세적(李世勣)이 파리성(頗利城)을 지나, 백랑(白浪)과 황암(黃巖) 두 물을

건너고서 대요하가 발원하는 요원(遼源) 소재를 물었다.

그러자 지금 건너온 백랑, 황암 두 물이 더 가다가 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요수(遼水)가 된다고 대답했고

그 발원인 요원(遼源)은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세적 군대는 백랑수의 최남단인 고릉하(枯凌河)와 합치는 요수(遼水)를 건넌 것이고,

황암수는 고릉하와 합치기 전의 요수 이름이 된다.

북녕시(北寧市) 서남쪽 70리에 황암사(黃岩寺)가 있었다.

이 두 물, 백랑수(白浪水)와 대요수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만나 안시(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수경(水經)]에 기록되어 있다.

신성, 남소성은 백랑수, 즉 대릉하 북쪽에 있었다.  

중국은 고구려 신성(新城)이 무순(撫順)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남소(南蘇)는 혼하(渾河)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 남소 모두 조양시(朝陽市) 동북의 내몽고 지방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에 있었다.
파리성(頗利城)은 “발”성의 차자인데 발한성이 있던 적봉시 팔리한진(전한시대 우북평군 치소)로 고려된다.

 

3. 세 번째 증거 [문관사림]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을 시작한 통정진(通定鎭)은 어디인가?

 

[문관사림(文館詞林)]에서

수나라 군역(軍役) 기간의 차등 순서가 전방까지의 거리별로 단계적 차등을 두고 있는데

-탁군(涿郡) 2년

-임유관(臨楡關) 3년

-유성군(柳城郡) 4년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5년

-통정진(通定鎭) 7년

-도요서진(渡遼西鎭) 10년 이런 순서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노하, 회원 통정진 등은 모두 요서진(遼西鎭) 보다 서쪽이다.

도요서진(渡遼西鎭)은 마땅히 대릉하 지역이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탁군 2년 - 임유관 3년 - 유성 5년- 통정진 7년- 도요진(渡遼鎭) 10년 이다.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이 따로 없다.

이는 노하, 회원진이 유성과 가깝다는 반증이다.

 

 

수나라때 수양제와 백만병사가 요동성까지 진군한 행로를 표시하면 위와 같다.

윗 그림에서 파란색은 중국의 주장이며 틀린 것이다. 붉은색이 제대로 된 것이다

수나라 유성군은 푸른색의 유성(당나라 영주 유성현)이 아니라

붉은색의 유성(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 평로성)이 맞다.

 

노하(瀘河)는 금주시(錦州市) 소릉하(小凌河)다.

지금의 소릉하를 노하로 보는 것은 중국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중국은 노하현을 오늘날의 금주(錦州)로 보는데 그보다 훨씬 상류, 즉 서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때에 노하현(瀘河縣), 노하진(瀘河鎭)도 있었다.

회원진(懷遠鎭)은 금주 서북 50리의 당왕채산(唐王寨山)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양제가 살수대첩 후에 다시 또 쳐들어왔다가

양현감의 반란으로 군대를 되돌린 곳이라서 회원진(回遠鎭)이고

당왕채산이 수왕채산(隋王寨山)의 와전(訛傳)이라면 당왕채가 곧 회원진이 된다.

그 남쪽 고당산(褲襠山)은 당태종이 군량을 비축한 고량산(庫粱山)이 된다.

 

중국학자들은 항상 갑자기 비약하는데 문제가 있다.

노하, 회원진에서 노하는 소릉하라고, 하면서 회원진을 갑자기 물 건너 산 넘어 또 물 건너

심양시 요중현(遼中縣)이라고 주장한다.

대릉하(大凌河) 건너 의무려산(醫巫閭山) 넘어 요하(遼河) 건너...큰 두 물과 큰 산을 갑자기 넘는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서 금주 서쪽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에서부터

다음 통정진으로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탑(遼濱塔)으로 주장한다.

요나라 요주(遼州)의 요빈현(遼濱縣)이 있던 곳인데 그곳이 요수(遼水)를 건너는 곳이니

통정진은 응당 거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요빈탑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은 당시 대요수가 아니라 압록강이다.

[한서(漢書)]에 기록된 당시의 대요수는 길이가 고작 1250리, 즉 300km 남짓한 짧은 물이었고,

현재의 요하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서(漢書)의 마자수압록강은 2100리라고 했는데 지금 요하의 일부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시 요수가 대릉하였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유성에서 노하, 회원진이 150리 정도 되지만, 금주에서 요빈탑은 500리가 된다.

중국의 주장은 그 500리 중간에 도대체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왜곡된 역사의 전형적인 구멍이다.

 역사의 블랙홀인데 역사 왜곡을 위해 생략한 거대 공간이었다.

통정진보다 동쪽의 도요서진(渡遼西鎭), 혹은 도요진(渡遼鎭)이 최고 관건이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동쪽의 요서주(遼西州) 위치가 대릉하 지역이다.

 

4. 네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에서 금주시는 한나라 요동군(遼東郡) 무려현(無慮縣)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후한(後漢) 시대 무려현이다.

수나라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를 빼앗아 만든 요동군은 금주시(錦州市)였으니,

통정진(通定鎭)은 의현(義縣) 서남쪽 45리에 비정된다.

수양제는 10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에 쳐들어왔는데, 요동성에 진을 치고서,

그중 30만 대군이 압록강 넘어 평양성까지 갔다가

평양성밖 30리에서 회군하여서 을지문덕장군에세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당하는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2700명이라고 했다.

이후 수양제는 철군하면서 고구려 요동성은 그냥 두고, 요수 건너 편의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서

수나라의 요동군(隋-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다.

수나라 요동군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였으니, 금주시(錦州市) 대무보(大茂堡) 위치고,

통정진은 의현(義縣) 서남 40리 대정보(大定堡)로 고려되는 것이다.

 

통정진은 그 이름부터가 당시 안정현(安定縣)이었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通-安定)이라

통정진(通定鎭)이다.

그런데 요나라 때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은 의현(義縣) 동쪽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이었던 것이

[양원부인장씨묘비(梁援夫人張氏墓碑)]로 증명되었다.

이는 고구려 요동성 편에 자세하다.

 

5. 다섯 번째 증거 [책부원구(冊府元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당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백랑수(白浪水) = 대릉하(大凌河) 남쪽을 따라서 고구려 현도의 성에 갈 것이다.

 

”朕 然後 徑塗 白浪之右 親巡 玄菟之城

 

고구려 현도, 신성 등은 요수 건너에 있었는데, 당태종의 말처럼 백랑수를 건너가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즉 백랑수가 당시의 요수(遼水)다.

[수경(水經)]에 의하면 본래 백랑수와 대요수는

지금의 고릉하(枯凌河)를 통해서 방현(房縣)에서 만나 안시를 통해 바다로 나갔다.

 

大遼水注, 大遼水 自遼隊來 東南過 房縣西 又會白浪水 下入安市

 

역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안시성 전투를 한참 치르던 중에

당태종의 신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친히 요대에 오셨는데  今 陛下 親臨 遼隊...”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을 위해 주둔한 곳은, 전한(前漢)시대 요동군 양평(襄平)의 남쪽으로서 전한시대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이었다.

 

[수경(水經)]에서 대요수(大遼水)는 전한시대 망평(望平)에서 내려와 양평현(襄平縣),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방현(房縣)의 동남쪽에서 백랑수와 합쳐지고 안시현(安市縣)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망평현(望平縣)은 요나라 때 산동현(山東縣)이라고 했는데 북녕시(北寧市) 동쪽 150리였다.

지금의 유하(柳河)가 동남으로 향해 흘러내려오다가 서남으로 틀어지는 곳이라 무량전진(無梁殿鎭) 부근이다.

전한시대 양평현(襄平縣)은 그 서남이며 대요수와 소요수가 합쳐지는 곳의 동쪽이다.

즉 요양하(繞陽河)와 가 합쳐지는 곳인데,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야만 하지만 물길이 2000년이 지나서

현재는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는데 흑산현(黑山縣) 대호산(大虎山) 부근이다.

 

요대는 고구려 안시성 부근이 되고, 그래서 당태종이 요동군 요대(遼隊)에 왔었다는 것이 되고,

요동군 안시현은 본래 대릉하(大凌河), 즉 고릉하(古凌河)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므로

구방자진(溝幇子鎭)에 있던 방현(房縣)보다 남쪽이 된다.

지금의 대요하 건너 해성시(海城市) 앞에 요대사(遼隊寺)라는 절이 있다.

이는 요나라가 한인(漢人)과 발해인(渤海人)이 반란하지 않도록 발해인은 서쪽으로, 한인은 동쪽으로

옮겨서 섞어놓은 다음에 생긴 것이다.  

본래 요대현은 태안(台安)의 서북이다.

왜냐하면 태안에 건안성(建安城)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건안을 지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동에 많은 당태종 전설이 있지만 거의 가짜로 고려된다.

당태종은 지금의 요하를 건너보지 못했다.

만주에서 북으로는 심양 북쪽 철령시 당왕채 전설에도 당태종이 왔다고 하였고, 남으로는 단동시 봉성에도

당태종이 왔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다 사실이 아니다.

대개 이세적이나 안동도호부 도독 설인귀薛仁貴의 흔적이 와전된 것이다.

 

6. 여섯 번째 증거 [금주부지], [요동지]

[금주부지(錦州府志)]와 [광녕현지(廣寧縣志)]에서 본래 한나라 요서군치소(遼西郡治所)로서

요나라 요서진(遼西鎭)이 되었다고 비정된 곳은 의주(義州) 서(西) 40리다.

이는 의주 서남 40리에 위치한 대정보(大定堡)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한시대 공손탁의 요동국에서 본래 전한시대 요동군을 다시 나누어서 만든 요서군치소 요서진으로

고려되며 기왕의 전한시대 요서군은 아니다.

한편 [요동지], [전요지]에서는 요서진이 의주 동東 40리라고 [금주부지]와 동서를 반대로 말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릉하 동쪽 왕민둔(王民屯)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요나라가 설치한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 위치다.

요서주는 본래 한-요서군지(漢辽西郡地)로서 요나라 장녕궁과 현주에 속했다.


遼西州,阜城軍,中,刺史, 本漢遼西郡地,世宗置州,

 

이 요서주는 본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위치다.

고구려 요동성이던 첫 번째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이 폐지되어,

신민시 북쪽 두 번째 요주(遼州) 요빈현(遼濱縣)으로 옮겨간 뒤에,

바로 그 첫 번째 요주 자리 아래에 생겨난 것이 요나라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인 것이다.

한편 유성군(柳城郡)-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 통정진(通定鎭) - 도요서진(渡遼西鎭) 순서로 보아서

도요서진의 위치는 금주시 동쪽 대릉하성(大凌河城)으로 고려된다.

지금 금현(錦縣) 위치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곳은 요돈(遼頓)이라 했다.

현재 대릉하성(大凌河城)의 설치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수나라 도요진(渡遼鎭)이고,

당태종의 요돈(遼頓)이었다.

의주(義州)=현재 의현義縣) 서쪽 40리거나 의주 동쪽 40리거나, 요서진(遼西鎭)은 대릉하(大凌河)에 있었다.

그런데 대릉하 요서진보다 훨씬 후방 내지인 통정진만이 느닷없이, 500리 바깥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현(遼濱縣)이 될 수 없다.

회원진도 산넘어 물건너 요중현(遼中縣)까지 가지 말고 유성 부근의 노하(瀘河).

현재 소릉하(小凌河) 주변에 바로 있어야만 한다.

그게 사실(史實)이다.

 

5. 졸본부여bc108~bc

졸본부여(卒本夫餘)는 한사군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고두막한(高豆莫汗) 동명왕(東明王)이 세웠다.

요동군 서안평까지 수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낙랑군을 모두 수복한 것이다.
그래서 설치 20여년만인 한나라 소제 때, bc82년에는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하였고

중국의 낙랑군은 의무려산 서쪽으로 내려갔다.


고두막한은 bc238년에 해모수에게 단군조선을 빼앗겼던 고열가의 후손 영품리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졸본성은 고주몽의 2번째 도읍 눌현성(訥見城), 즉 황성(黃城)이었고, 고국천왕의 고국이었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었고, 발해 서경압록부 신주성이었는데 심양(審陽) 북쪽 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이다.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 골령의 황룡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이다.

 

 

졸본성은 주몽왕과 신대왕,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묻혔다.

고국원왕 때는 황성(黃城)이라고 했는데 고주몽 때에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黃)의 우리말에서 황성과 누루성이 비롯된다.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다.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天府)라고 불렀다.

 

 

천부(天府)가 신주(神州)를 거쳐 천두진(泉頭鎭)이 되었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서 고려고국(高麗故國)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綠州),

[신당서(新唐書)]에서 신주(神州)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이다.

그런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遼河)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서경성은 석성으로서 폭이 무려 20리(8km)였던 대성인데,

요나라 때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어서, 그 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금나라 때 [요동행부지]를 남긴 금나라 문사였던 왕적(王寂)이 심양시 북쪽 현재 개원시에 설치되었던

함평부에 가서, 하루는 부근에 굉장히 큰 성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니 입구 마을 사람이

고구려 폐성이라 했는데 직접 보니

성중에 함원전(含元殿)이 있고, (성을 세운 주몽이) 만세지계(萬世之計)을 세웠다가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강토를 도둑질 당하여 국파천년한(國破千年恨)을 왕적이 느낀 곳이었다.

금나라 왕적이 보았던 발해 신주, 고구려 천부였던 졸본성은 대체 개원시 어디에 있는가?

위성 사진으로 탐색한 결과 개원시 북쪽 창도현 천두진(泉頭鎭) 동쪽 소가둔(邵家屯)의 굉대한 성터였다.

 

 


 

 

 

지도상의 천두는 고구려 천부나 발해 신주가 변한 말이다.

“주”-“두”의 발음은 구개음화 이전인 고대에 혼용되었다.

황정자黃頂子는 황성자(黃城子)의 변음이고,

 

소가둔(邵家屯)은 [수서]에서 소열제(昭列帝)라고 불렀던 고국원왕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가남구(巢家南溝)도 역시 고국원왕 이름인 쇠(釗)의 남쪽성이란 뜻이다.

또한 초가구는 소수림왕이 세운 초문사(肖門寺)에서 비롯된다.

 

신주의 위치는 고구려, 발해의 압록강이었던 요하(遼河) 하구로부터

물길로 830리라고 [신당서]에 기록되었는데 천두진이 그 위치로서 대략 맞다.

일반 지도 상에는 천두진 동쪽에 소가둔이 표시되어있고,

그 남쪽에 황정자(黃頂子), 소가남구(巢家南溝)가 표현되어 있고,

그 남쪽에 초가구(肖家溝) 유원지가 있다.

이를 위성으로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고구려 졸본부 황성터가 보인다.

 

이중에서 묘구가 동명왕 고두막한의 성이고 고두막한의 고분이 있을 곳이고,

황성이 고주몽의 성, 소가남구가 고국원왕의 동황성으로 고려된다.  

두 성은 합쳐서 폭이 대략 8km다. 성둘레는 20km이상이다.

 

고주몽이 죽어, 용산에 묻혔는데,

그 동명묘가 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산 이름은 황룡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주몽의 장지인 용산인 것이다.

황성 동남쪽에는 유리왕이 골천에 세웠던 이궁인 위원보산성이 있다.

골천은 지금의 구하(寇河)다.

 

동명왕묘 남쪽의 류가구는 금나라 문사 왕적이 신도비를 보러 놀러갔던 당나라 장수 류인공 7세손의 집이다.

그 바로 곁에 동명왕묘가 있었건만, 당시 왕적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고구려 역사 유적이 요나라 이후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졸본부여는 고두막한이 세우고 bc59년에 서거했으며 그후 태자인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한다.

bc58년 고무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순시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고무서가 영고탑으로 천도한 것이다.
이후 영고탑도 부여라고 하는데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출신지로 고려된다.

훗날 태조대왕의 중국 침략을 방해하였던 부여는 이 영고탑 부여로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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