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기후 객현한 객좌 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8. 00:27

춘추시대

 

기후 객현한 객좌 문화bc1112~bc194

 

 

중국 은나라 기자(箕子) 자서여(子胥餘)는 은나라 왕자로서 은나라 수도 은허의 동쪽 땅 기(箕)에 책봉된

제후였다.

그러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함락시키고 주나라를 세워서 본래의 기(箕) 땅에 주나라 왕실로서

새 제후 기자(箕子)를 세우니 기존의 은나라 왕자인 기자는 본래의 기 땅에서 도망나와서 북경(北京)까지

올라온다.

북경 유리묘(琉璃墓)에 기자(箕子)의 유물 흔적이 남아있고, 이후 기자는 요서(遼西)로 들어온다.

서우여 기자조선의 3세 솔귀 천왕은 45년에 은나라 망명객 기자와 그의 보좌인 강달, 궁흠 등 망명객이

요수로 들어오니, 요서(遼西)에 살도록 조치했다.

북부여는 “수유(須臾) 기자”라고 칭하였는데 요서의 기자가 살던 곳이 수유(須臾)다.

기자 자서여의 이름 서여(胥xu餘yu)가 수유(須xu臾yu)와 발음이 똑같으니,

자서여의 성이 수유성(須臾城)이라고 불린 것이 된다.

 


 

객좌현 동쪽 곤도영자가 수유성의 외곽이고 미안구는 그 서북인데 명이국 명성으로 고려된다.

북동촌은 청동기물 발굴지기자가 정착한 곳은 [주역(周易)]에서 명이(明夷)다.

산동반도와 일본까지 퍼진 명도전(明刀錢)은 전국시대 철로 만든 화폐인데 그 철화폐의 앞에는 명(明)이라는

국호를 새겨두었다.

 당시에 중국의 대읍(大邑)은 철로 된 화폐, 즉 철포를 만들었는데 명도전의 모양은 환수동도(環首銅刀)의

모습에서 발전된 환수철도(環首鐵刀)로서 동북지방에 독특한 것이다.

은나라가 망하기 직전 은나라 시대의 동물머리 북방 청동도가 나온 곳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흥성시 양하,

 법고시 만류가, 무순시 망화구 이렇게 네 곳이다.

그보다 이른 bc1400년의 철날의 청동도끼(鐵刃銅鉞)가 유주 계현의 평곡현에서 나왔는데

이는 서무산(徐無山)의 동쪽 골짜기다.

 

bc340년에 번한에는 수한(水韓)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연나라의 배도(倍道)가 안촌홀(安村忽)=(안덕향 추정)을 공략하고

뒤이어 험독(險瀆)=(서우여 기자의 험독성)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수유에 살던 기후(箕詡)가 군사를 일으켜 번한을 도왔다. 

bc323년 연나라의 해침을 받고 번한왕 수한이 죽으니 기후가 번한을 계승하여 기후(箕詡)는

대부여의 보을(普乙) 단군으로부터 번한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마침내 중국인 기자의 36세손 기후(箕詡)가, 

 41세 서우여 기자번한(奇子番韓)의 왕위에 올라서 자기 앞의 35명의 기씨 선조를 모두 왕으로 추존한다.

기씨의 유물이 많이 나온 백록산의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가 기후의 중심 지역으로 고려된다.

그로부터 난하, 백랑수 등을 영유하여서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의 고죽성(孤竹城)과 객좌현(喀左縣)의

백랑성(白浪城)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때 그들이 사용한 청동기물의 수준이나 제사지낼 때 복비의 수준은 매우 높았고 당시는 구리 돈(朋)을 

사용하였다. 

명도전은 후에 나온 것이다.  

 

기후라고 쓰인 방정

 

                                            기후국 객좌 출토 청동기

 

대릉하(大凌河) 서남 상류인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와 객좌현 15km 북쪽의 화상구(和尙溝),

객좌현 남쪽 평방자향(平房子鄕)의 북동(北洞)과 산만자(山灣子), 객좌현 동쪽의 노야묘(老爺墓),

객좌 서쪽의 곤도영자(坤都營子) 등지에서 대량의 상말주초상(商末周初)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화상구에는 22개의 묘좌가 있는데

A지점에서는 청동기 주전자, 향로, 귀걸이, 등이 나왔고 금팔찌도 나왔다.

C지점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 3건과 타격석(加重器)=(돌로 만든 단검 손잡이), 청동도 6건,

목걸이(銅項環), 동포식(銅泡飾)과 소, 양의 뼈가 희생되었다.

곤도영자에서는 청동 큰 솥이 나왔는데 은나라식 물건이다.

 

평방자향 산만자山灣子에서는 청동잔 어존(魚尊)=(魚 글자가 새겨진 尊), 청동시루 백구(伯矩)= 새겨진 甗),

청동제기 단백(亶伯)=(단자 아랫부분을 벌레 충자로 해석했다.) 수면문 청동제기, 경부무庚父戊 청동제기,

부을(父乙) 청동제기, 기타 글자를 해석하기 어려운 몇개의 청동제기와 소 무늬 술독, 소용돌이 무늬 술독 등이

발굴되었다.

역시 은대와 주초의 물건들이다.

그외 청동도끼 등이 부장되었다.

 

노야묘(老爺墓)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 1개와 구리 고리, 허리띠 걸쇠(帶鉤 )2건, 동과(銅戈) 1개,

동령(銅鈴) 2개가 출토되었다.

평방자향(平房子鄕) 북동(北洞)에서는 죽뢰(竹罍)=(술독)와 대형 방정(方鼎)=(사각 솥)이 발굴되었고

새겨진 금문을 미처 다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후己(其侯)”의 명문이 새겨 있다.

이 기후 기자(箕子)의 명문 청동솥은 북경시 서남방 교외의 유리하(琉璃河) 4묘좌에서도 발굴된 적이 있다.

즉 은나라 기후가 주(周)나라 성립으로 북경에 피하여 살다가 더 밀려나서 결국 객좌현(喀左縣)으로 이동한 것이다.  


[북부여기] 기록에 수유 사람들은 매우 풍족하였다고 한다.

객좌(喀左)에서 발굴된 명문 기록을 보면 은나라가 한번 점치는 비용(卜費)이 5,6 붕(朋)일 때에

이 기자족들은 200붕(朋)을 쾌척하였으니, 인플레가 아니면 꽤나 잘살았던 것이다.

붕(朋)은 쌍월식 동패식으로서 화폐다. (그림 35에 구리화폐 붕이 있다.)

기준은 대동강의 평양으로 옮겨서 마한(馬韓)을 빼앗고 마한왕이 된다.

그러나 9세 뒤에 백제 온조에게 병합당하고 이후 기씨 마한의 후예는 평양 오석산 황룡성의

선우(鮮于)씨와 경기도 행주(幸州)의 기(奇)씨, 청주(淸州) 한(韓)씨 등 3파로 갈라진다.

 

명문 청동기

 

이때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가 제작되어 만주로부터 연(燕), 제(齊), 조(趙) 나라까지 유행하였고

이는 수유기자문화의 부와 무역의 상징이다.

 명도전은 청동시대의 환수동도(環首銅刀)가 철기시대를 맞아 철도(鐵刀)로서 탈바꿈 한 것인데 실물

화폐로 이용되었다.  
명도전의 명(明)자에 대하여 구구한 해석이 많은데 중국식으로는 당연히 국가 이름,

또는 군의 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明)이라는 중국의 고대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주역(周易)]에서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에서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라고 했는데

해가 땅속에 떨어지니 기자가 명이로 갔다는 말이다.

즉 은나라를 잃으니 기자가 떠나서 명이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명이국은 중국 고대 기록의 밝조선(發朝鮮)이던 번한조선의 한 지역 이름이다.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상(卦像)은 땅속에 해가 감추어진(地火) 것인데

그들의 곤도(坤都)에 태양을 가져간 것이다.

주역은 주문공이 편수했을지 모르나 본래는 은나라로부터 내려오던 역을 재해석한 것이고

또 뒤에 덧붙인 것이므로 기자 이야기가 들어 있다.
따라서 기자의 후예는 명(明)이라는 국호를 새긴 명도전을 만들어 무역으로서 세력을 넓히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명도전은 한반도 구석까지도 나오는데 정치권보다 활발한 무역권의 영향일 것이다.

 

<---명도전


           명월전

 

기후(箕詡)가 41세 번한이 되어 처음으로 번한성(番韓城)에 살게 되었는데 전한서 요동군 패수(沛水)에

번한현(番汗縣)이 있었다.

그 위치는 태안현(台安縣) 손성자로 고려된다. 

이는 훗날의 고구려 건안성으로 고려된다.

현재 의무려산 동록의 북진시(北鎭市) 서쪽 교외에 기자묘(箕子廟)가 생긴 것은 이 때 번한성으로 옮긴

기후(箕詡)의 묘로 추정된다.

 

46세 번한 기준(箕準)은 bc221년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쳐들어와서 2000리까지나 땅을 뺏긴다.

진개의 침략으로 연나라가 만번한(滿番韓)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는 뒤에 위만의 번한 험독성을 의미한다.

금주시 동쪽에 있었다.

이때 진秦나라의 만리장성 역사의 동원을 피해 번한으로 이주해 들어온 연(燕), 제(齊) 사람들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에 살았고, 뒤이어 한나라에서 망명해 들어온 위만(衛滿)에게 상하운장을 떼어주고

한나라를 막도록 하였다.

[전한서]에서 운장(雲障)은 낙랑군에 속했다.

그러나 한무제의 낙랑군이 아니라 임둔군, 진번군을 폐하면서 물러난 전한시대 낙랑군에 운장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되고, 이는 한무제의 요동군 안쪽이다.

상하 운장은 앞에 서우여 기자의 번한성인 험독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은 기준을 배반하고 상하운장의 중국인 이주민들을 이용해서 기준을 속이고 쳐들어와서 축출하였다. 기준은 대동강 목지국마한으로 떠났고 번한의 오가를 이끌고 대장군 탁의 무리는 월지국 마한으로 떠났다.

그후 위만은 요동군 만번한성에서 조선이라 칭하고 새로운 수도를 사용한 것이다.

 

한편 위만에 밀려나서 대동강에 들어온 기준은 마한왕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세계>에 나온다.

 

마한세계
1世 무강왕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馬韓王位八世.
2世 강왕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3世 인왕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혜왕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명왕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효왕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양왕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원왕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甲子(B.C 57年)新羅王朴赫居世立國

      慶州 遂界辰韓二十二年 甲申(B.C 37年)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並二府 元稽之末有後孫三人一曰乎

      稱鮮于氏入黃龍國一曰諒稱韓氏一曰乎稱奇氏
9世 계왕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己丑(B.C 32年)立 鴻嘉四年甲辰(B.C 17年)爲百濟溫祚所奪在位十六年人只

      保圓山錦峴城 新莽己巳(A.D 9年)以二城降于百濟馬韓不祀 自康王戊申至稽王己巳爲二百二年


 

즉 bc194년에 평양으로 이주한 기준과 그 후예는 9대를 전하였고 백제 온조왕에게 망하였다.
이들이 백제 온조왕에게 평양에서 망한 것은 기씨 족보 등에서 알 수 있다.

위 마한은 셋으로 나뉘어졌는데  선우(鮮于)씨는 대동강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의 주인이

되었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1112년 요서로 들어온 기후국 중국 기자의 후손 세계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남아 있다.


1世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 商帝武乙次子 諱理子也 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 五十四祀周武王己卯痛深革殷志堅岡僕 遂東出朝鮮都平壤國號後朝鮮敎民八條 變夷爲夏周成王戊午 薨在位四十 祀壽九十三 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 俗稱兎山 三十六世 嘉德王追尊爲王


위 기록에서 36세 후손이 번한을 차지하여 자기 조상을 모두 왕으로 추증한 것을 알 수 있다. 

단 평양의 기자묘는 기준 때에 옮겨온 것이다.
2世 莊惠王 諱松       周成王34年己未立 在位25年 諱仲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3世 敬孝王 諱詢       康王22年甲申(B.C 1057)立   在位 27年
4世 恭貞王 諱伯       昭王23年辛亥(B.C 1030)立   在位 30年
5世 文武王 諱椿       穆王2年辛巳(B.C 1000)立     在位 28年
6世 太原王 諱禮       穆王30年己酉(B.C 972)立     在位  4年
7世 景昌王 諱莊       穆王35年癸丑(B.C 968)立     在位 11年
8世 興平王 諱捉       穆王45年甲子(B.C 957)立     在位 14年
9世 哲威王 諱調       共王4年戊寅(B.C 943)立      在位 18年
10世 宣惠王 諱索     懿王14年丙申(B.C 925)立     在位 29年
11世 誼襄王 諱師     孝王14年乙丑(B.C 896)立     在位 53年
12世 文惠王 諱炎     려王36年戊午(B.C 843)立     在位 50年
13世 盛德王 諱越     宣王35年戊申(B.C 793)立     在位 15年
14世 悼懷王 諱職     幽王4年癸亥(B.C 778)立      在位   2年
15世 文烈王 諱優     幽王6年乙丑(B.C 776)立      在位 15年
16世 昌國王 諱睦    平王10年庚辰(B.C 761)立     在位 13年
17世 武成王 諱平    平王23年癸巳(B.C 748)立     在位 26年
18世 貞敬王 諱闕    平王49年己未(B.C 722)立     在位 19年
19世 樂成王 諱懷     桓王17年戊寅(B.C 703)立     在位 28年
20世 孝宗王 諱存     惠王2年丙午(B.C 675)立      在位 17年
21世 天老王 諱孝     惠王19年癸亥(B.C 658)立    在位 24年
22世 修道王 諱立襄  惠王58年丁亥(B.C 634)立    在位 19年
23世 徽襄王 諱通     頃王4年丙午(B.C 615)立      在位 21年
24世 奉日王 諱參     定王13年丁卯(B.C 594)立    在位 16年
25世 德昌王 諱僅     簡王8年癸未(B.C 578)立      在位 18年
26世 壽聖王 諱翔     靈王12年辛丑(B.C 560)立    在位 41年
27世 英傑王 諱黎     敬王1年壬午(B.C 519)立      在位 16年
28世 逸民王 諱岡     敬王17年戊戌(B.C 503)立    在位 17年
29世 濟世王 諱混     敬王34年乙卯(B.C 486)立    在位 21年
30世 淸國王 諱璧     貞定王5年丙子(B.C 465)立  在位 33年
31世 導國王 諱澄     考王10年己酉(B.C 432)立    在位 19年
32世 赫聖王 諱준     威烈王13年戊辰(B.C 413)立 在位 28年
33世 和羅王 諱謂     安王17年丙申(B.C 385)立    在位 16年
34世 說文王 諱賀     烈王7年壬子(B.C 369)立      在位  8年
35世 慶順王 諱華     顯王8年庚申(B.C 361)立      在位 19年
36世 嘉德王 諱詡     顯王27年己卯(B.C 342)立     在位 27年
37世 三老王 諱娛     愼정王6年丙午(B.C 315)立   在位 25年
38世 顯文王 諱釋     赫王25年辛未(B.C 290)立    在位 39年
39世 章平王 諱潤    東周君5年庚戌(B.C 251)立    在位 19年
40世 宗統王 諱丕    初諱恤 秦王政15年己巳(B.C 232)立 在位 12年
41世 哀王    諱準    始皇二十七年申巳(B.C.221 ~ B.C.194 )立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率佐右宮人浮海南出立國金馬郡今益山改國號曰馬韓在平壤爲王二十七年自箕聖東渡己卯後凡四十一世歷年爲九百二十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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