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북부여 웅심산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8. 00:39

 

북부여 웅심산문화bc239~bc108

 

1. 전고구려 웅심산 난변 하얼투 고도성 문화

해모수(解慕漱)는 2333년 47세 단군 역사 시대를 종식시켰다.

bc239년, 해모수는 본래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서 군대를 일으켜서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하고, 웅심산(熊心山) 난변(蘭邊)에 궁실을 지었다.

또한 해모수가 태어난 곳이 고구려라고 하였다.

 

bc107년에 생긴 현도군이 bc86년에 구려로 이동하여 고구려현이라고 한다.


昭帝始元五年,罷臨屯、
真番,以并樂浪、玄菟.玄菟復徙 居句驪.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徙郡於高句驪西北

 

고구려 서북에서 고구려는 나라이고 구려는 그 서북의 요동군 북쪽의 땅이 되며

여기가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따라서 이 현도군 고구려현이 해모수의 고향인 고구려로 고려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소요수와 남소수가 나온다.
대요수는 [위토지기]를 인용한 [수경주]에서 백랑수의 하류이므로 지금의 대릉하다. 
[무경통요]에서도 대요수와 쇼요수가 만나는 요수현(遼隊縣)은 대릉하 의주시(義州市)에 있다.

소요수는 대요수와 합치므로 부신에서 내려가는 물이다.
즉 현도군은 부신시 동북방이 되며 남소수는 요양하(曉陽河, 조양하로도 읽는다.)가 된다.

현도군 서개마현을 지나는 고구려 마자수 압록강은 류하(柳河)가 된다.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는 요동군 서안평에 있었는데 서안평은 지금의 신민시(新民市)다. 

당시는 바다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에는 소수(少水)가 있어서 소수맥 구려가 있었는데,

바로 이 현도군의 고구려현 남소수에 사는 구려족을 말한다.

 

bc87년 졸본에서 즉위한 고두막한 동명왕이 구려하를 건너서 요동군 서안평을 수복하였다.

요나라 호주(壕州)가 있던 부신시 하얼투진 지역을 서안평이라고도 했다.
즉 요양하와 류하 사이가 서안평인 것이다.

요나라 호주는 원나라 때에 의주가 되는데 (대원일통지)

그 원나라 의주의 비문이 하얼투진 탑영자고성에서 발굴되었다.

 

bc86년에 고두막한의 수복전쟁으로 해서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었다.

임둔군은 낙랑군에 병합되고 진번군은 현도군에 병합되었다.

또한 현도군이 옥저 불내성(법고시 조양동산 남쪽)으로부터 부신시 동북의 현도군 고구려현으로

이동해서 설치되었다.

본래 옥저 불내성, 즉 환도성에 두었던 1차 현도군이 물러나면서 

고구려(구려) 서북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이 현도군 위치는 부신시 동북의 하얼투진(哈爾套鎭)이다.

하얼투진 동북에는 흑두산(黑頭山)이 있는데 이 흑두산에서 하얼투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요나라 때는 호주(壕州)가 그 아래에 있었고 원나라 때에 의주(懿州)가 설치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현도군 및 졸본부로 생각한 의주(醫州)가 또한 여기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는 호로토(胡土虎)라 불렀고 뜻은 혼강(渾江)이라고 하였다.

 

 

 

해모수가 고리국 웅심산 난변에 궁실을 지었다.

이는 하얼투진 동남쪽 영평부(永平府)이다.

고구려 천부궁이 있었다.

동쪽에 조양성(朝陽城)이 또 있다.

이는 수성왕 10년에 세운 고구려 국도로서 고도성(固都城)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유래하는 효양하(曉陽河)는 자오양하(朝陽河)라고도 발음한다.  

고대에는 남소수다.

 

유리왕이 고도성주 해명 왕자를 죽인 곳이 고도이고 해명왕자가 죽은 창원은 바로 동남쪽의 창토다. 

고구려 창암성이었다.

고국원왕 비문에서 고국원왕이 전연국과 혁현령에서 싸워 이겨서 이 천부궁을 다시 소유하므로

해서 영주자사(營州刺史)라 칭한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성도 역시 국내 고도성이다.

연남생이 국내 고도성(故都城)에서 당나라에 투항했을 때에 당나라에서 내려준 작호가 현도군

개국남(開國男)이었다.

고도성이 2차 현도성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왕 때 여러 비문을 보면 역대 고구려왕들은 국내 고도성의 보존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따라서 고도성이 2차 현도성으로 확실시되는 것이다.

 

 

bc 232년 옛도읍의 오가 공화정을 철폐하였는데 개원시에 있던 고열가의 해성 평양을 취합한 것이다.

이때 단군 고열가가 단군에서 물러나 해성 이궁 평양으로부터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고열가는 다시 아사달로 옮겼다.

이후에 영품리왕(寧稟離王)이라고도 하였다.

일부 기록에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 동명왕이 고열가의 후손, 또는 영품리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열가는 장당경으로부터 영주(寧州)인 옹우특기로 옮겨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동안 화근이었던 북막(北漠)이 쳐들어와서 영주(寧州)를 유린하고 순사 목원등을 죽인다.

영주는 영고탑이 있던 옹우특기다.

 

bc221년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쳐들어와서 만번한까지 차지하고 요동군을 설치한다.

대요수였던 대릉하에 연나라 요동군이 설치되어 연나라 땅이 되니

해모수는 더 이상 고구려 땅에 도읍할 수 없었다.

 

2. 흥안령 천산 북부여 문화

bc220년에 해모수는 북으로 천리나 먼 곳에 천도하여 시라무렌강 천산의 신시 아사달로 가서

새로운 천안궁을 지었다.

해모수가 옮겨가서 새로이 진한(眞韓)이 되고, 옮겨가기 전 땅은 진한(辰韓)이 된다.

이에 부여고도인 고구려현 지역은 취약해진다.

 

bc195년에 위만이 번한에 들어오고 해모수는 서거하고, 모수리 단군이 즉위한다.

위만이 번한을 찬탈하니 번조선의 준왕은 대동강 남쪽 금마마한 구월산으로 천도하고,

번조선의 탁 장군은 중마한 월지국으로 옮겨간다.

 

bc193년에 모수리 단군은 상장 연타발(延陀勃)을 보내 평양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

이때 부여 고도성을 위만에게 빼앗겼다.

모수리 단군은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都)에 속하게 하였다.

해모수의 차자인 고진(高辰)이 평양도를 다스리며 중부여라고도 하였다.

낙랑왕 최숭이 마한의 왕검성에 이주해 왔었는데, 이때 해성에 곡식을 바쳤다.

마한의 왕검성은 집주 험독현 비리군지라고 했던 철령시 최진보 산성이다.

bc128년에 모수리 단군이 직접 위만을 쳐서 남려성(南閭城)을 수복하였다. 

이는 의무려산 남쪽으로 고려된다.

 

bc120년에 즉위한 고우루 단군은 평양도사 고진을 고구려후로 삼고 서압록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서압록은 마자수 압록강이라고 했던 유하(柳河)이다.

고진의 고구려후 위치는 마자수 동쪽 비류수변의 요나라 고주(高州)로 고려된다.

후에 졸본부여라고도 했다.

그 위치는 창무시 동북방 사합성의 토성자 위치다.

 

해모수는 북으로 천도하여서 환웅의 신시 백악산 아사달에 도읍한다.

부여국이 현도 북 천리에 있었는데 바로 처음 북부여 위치이고 한무제 때는 진번국(眞番國)이다.

아로과이심기 천산이 바로 북부여 수도 천안궁이다.

 

그 서쪽에 천왕, 천산이라는 지명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달란화(達蘭花)라는 곳이 있다.

달란화는 대란하(大蘭河)와 같은 발음이다.

즉 새로운 난빈(蘭濱)의 새로운 웅심산 아사달은 이곳이다.

고대 조천지(朝天池)가 있던 하늘산(=사이한산)에서 내려오는 두 물 중에서 서쪽 물이 색불루 단군의 녹산

아사달을 지나는 자칸무렌강, 즉 흑수이고 동쪽으로 내려오는 물이 요나라 상경을 지나는 대란하였던 것이다.

그 대란하 하류에 신시 백악산 아사달이 있었고, 또 웅심산 천안궁도 있어서 동서로 마주본다.

아사달과 천안궁 북쪽에는 목엽산 천산진이 있어 요나라 황제가 신단수를 세워놓고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요나라 황제는 물론 사이한산 아래서도 제사를 올려서 그 터가 남아 있다.

아사달과 천안궁 사이로 흐르는 물은 달라이하(達拉爾河)와 합쳐지며 해하이하(海哈爾河)라고 하는데

각각 달물과 해물이었을 것이다.

웅심산이라고 했지만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활”의 의태어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즉 활활 타오르는 의미다.

또한 홀승홀이나 홀한강처럼 크다는 의미가 있다. 대웅이 곧 한웅(桓熊)인 것이다.

천안궁 남쪽 지명은 바라치루도(巴拉奇如德)이니 대웅도(大熊都)라는 뜻이 된다. 

즉 웅심산 수도다.

부여족은 계속 수도에 난하(蘭河)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부루의 동부여가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옮겨간 곳에도 나린하와 난릉이 있다.

 


 

 

천산진 남쪽 천산구진과 천왕 이라는 곳에 있던 북부여 웅심산 천안궁, 건너편은 환웅의 백악산아사달이다.

해모수 말기인 bc201년에 동호(東胡)가 흉노왕 묵돌가한에게 멸망하였다.

 

34세 오루문 단군 이후 중국과의 교류는 37세 마물 단군 때 주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은 일이 있다.

bc635년경의 일이다.

당시 <사기> 기록에는 적족(翟族)의 장수가 딸을 주나라 양왕의 비로 주었고

양왕은 적족의 힘으로영토를 지켰다.

그러나 주양왕은 적비를 몰아내려 하였고 결과는 적족의 장수가 궁내로 들어와 주양왕을 축출하고 

적비의 아들을 주나라 천자로 세웠다. 

그러나 4년후 다시 주양왕이 돌아오고 적족은 물러났다. 

이후 진晉의 문공(文公)이 백적과 적적을 낙양의 북쪽에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진(晉)의 북쪽에는 임호와 서융인 누번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한편 이후로 산서성의 북쪽인 양성에 임호(林胡)가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이 bc305년경에 하북성에 있던 중산국과 임호, 누번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와서 동호를 물리쳤다.

이는 적봉시 남쪽 영성현의 낙랑홀이 함락당한 것이다.

bc221년이다.

 

bc220년에 해모수는 백악산아사달에 제사지내고 천안궁을 다시 지었다.

한편 bc201년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는 어디인가?

동호가 멸망후에 오환과 선비가 되는데 당시 오환산이 지금의 서한산, 즉 천산인 것이니

그 서쪽이 동호의 위치다.

 

<규원사화>에서 40세 단군 달음 기록에 당시 알유(오르도스)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부여인을 맥인(貊人)이라고 했다.

즉 호맥은 부여인이다.

이를 예인 들과 합쳐서 예맥이라고도 한 것이다.

동호는 선비와 오환으로 갈라졌는데 흥안령 산맥의 서북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때 선비는 흑룡강성 눈강의 실위 지역까지 쫓겨 올라가고,

오환은 오환산에 있었는데 색불루가 있던 녹산 아사달이었다.
실위로 도망간 선비족이 바로 중산국을 만들었던 백적족(白翟族)으로 고려된다.

실위는 시로위로 읽으면 일본말로 백색인데 후에 탁발선비라고도 하였다.

반면에 오환이 임호라고도 하던 적적족(赤翟族)이다. 

 따라서 동호의 망국 위치는 달라이호수 변이 된다.

bc195년에는 적봉시 영성현 노로아호하 상류에 있던 낙랑이 배를 타고 개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로서 북부여의 서부는 매우 취약해진다.

 

북부여 시기 유물은 파림좌기(巴林左旗) 북쪽 30km 지점인 남양가영자(南楊家營子) 유지가 있다.

그 북쪽에는 세석기시대 부하문화(富河文化)가 있었다.

파림좌기는 거란국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거란족 선조와 차이가 크다.

거란은 보통 시체를 숲에 두었다가 3년 뒤에 뼈를 수습하여 화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1차장이고 화장한 흔적이 전혀 없다.

 또한 부장품은 동물을 희생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순장(殉葬)하기도 했는데 순장은 부여의 풍속이었다.

남양가영자 유지에서는 20개의 묘기가 있고, 주로 철기와 동기 제품,

그리고 옥석장식은 다량으로 나오는데 시기는 육가자 유적지와 같고 다만 구리만 있고 금은(金銀) 제품이

전혀 없으니 왕릉급이 아닌 것이다.

부여의 제천행사가 영고(迎鼓)였고, 도성은 영고탑(寧古塔)이라는 말을 이미 썼는데,

영고탑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육가자(六家子)이다.

흥안력(興安嶺) 산맥 동남쪽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유적지가 북부여 시대 주요 왕족릉으로 고려된다.

 

육가자에는 약 30개의 묘좌가 있는데 야수문(野獸文)의 금속 부장품이 많이 나왔다.

 머리는 서북을 향하였다.

육가자의 묘제는 부여식으로서 유곽무관(有槨無棺)이다.

 부여는 옥관을 빌려서 운구하더라도 옥관은 묻지 않았다.

부장품을 보면 금은 세공이 발달하여 금마식패(金馬飾牌), 쌍금마식패,

그외 수형금패(獸形金牌)가 2건이고, 금팔찌 7건, 금비녀 2건, 금반지 3건, 금정침 1건, 기타 금장식 13건에

은비녀 16건, 기타 은장식 7건, 동경 3건, 구리 허리띠 장식 1건,

도금한 구리허리띠 1건 도은한 구리허리띠 1건, 기타 여러건의 구리 장식과 도금한 철제 장식이 23건이다.

그뿐아니라 옥玉과 유리(琉璃)로 된 장식도 30점이 나왔다.

호박(琥珀), 마노(瑪瑙), 녹옥석(綠玉石)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하한(下限)이 동한 시대며 대략 bc2세기까지로 본다.

금은은 부여, 고구려의 장식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흉노도 유명하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 육가자의 북부여 금은 유물(혹은 갈사국 유물)

 

이 흉노와 부여, 고구려의 금은 장식은 소위 스키타이, 야수문 양식으로 같다.

단 그리스의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서요하(西遼河)에서 시작되어 오르도스 고원에서

부여족에 의해 꽃을 피우고 그리스 스키타이까지 전해진 것이다.

 

거란족은 동호의 후예로서, 흉노에 망하여서 선비산에 살다가 적봉으로 내려왔으나

위나라 조조에게 망하고 다시 요택에 살았다. 요택은 시라무렌강 상류의 부여성이다.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 때에 적봉시의 송막(松漠)에 내려와 살다가, 수나라에 이르러 8부족 형성

초기에 거란족 시조인 대하씨(大賀氏)가 일어나 부여(夫餘), 실위(室位)를 합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至唐 大賀氏蠶食扶余, 室韋, 奚, 靺鞨之區,地方二千餘里。<요사 상경도>

 

실위는 당시에 하이라얼(海拉爾), 눈강(嫩江) 부근이었을 것으로 고려되고,

부여는 옹고트 송막으로부터 하이라얼 실위로 이르는 도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부여 영역은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서요하(西遼河)가 될 것이다.

 

북부여 2세 모수리는 위만조선에 대비하여 bc193년 상장 연타발(延佗勃)을 시켜 평양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

평양은 환도성이 있던 법고시 한대산이다.

 이듬해 해성을 평양도사(平壤道史)에 속하게 하고, 해모수의 차자 고진(高辰)으로 지키게 하였다.

도사(道史), 순사(巡使), 욕살(褥薩) 등은 관직 이름이다.

 

그후 4세 단군 고우루 단군 때에 다시 고진을 발탁하여 bc120년에 고구려후(高句麗侯),

또는 고리군왕(藁離郡王)으로 삼았는데, 이 고리군 위치는 서압록하(지금의 柳河)로서 창무시였다.

그러나 모수리 단군 때에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에게 해성 이북 50리까지 침략을 당하여,

다시 고우루 단군이 해성에서 우거군을 격파하고 살수까지 추격하여서 구려하 동쪽을 수복하였다.

구려하는 역시 마자수압록강이었던 유하(柳河)다.

 

<참고>

진나라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호맥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여와 예맥이다.

부여를 예라고도 할 수 있으니 부여를 hui로 예를 역시 hui로 발음한다.
즉 조선말로는 "예"가 부여말로는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즉 호맥과 예맥은 같은 말이다.


先秦時期北方民族。貊字古多作「貉」。往往與「胡」連稱「胡貊」,泛指貊和北方民族。

《山海經》有貊國,近燕。《周禮》有「九貉」。可見其族類之多。西周時,貊為北國之一,

周宣王命韓侯為方伯以柔撫之。《詩經‧大雅‧韓奕》言:「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

即詠其事。此所謂「追」,學者們以為即「濊」(或作穢、薉),與貊同類,因有濊貊之稱。戰國時期,

貉人猶有留居趙北者。史載:趙襄子「逾句注而破並代以臨胡貉」,趙武靈王西北有林胡地至休溷之貉,

甚至秦國之北也還有「胡貉」。漢代的夫餘、沃沮等族,當時人仍以貉人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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