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구물 장당경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8. 00:33

부여시대

 

구물 장당경문화 bc425~bc238


44세 구물, 45세 여루, 46세 보을, 47세 고열가 단군

 

 

bc426년 43세 단군 물리(勿理)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낙랑(樂浪) 도성을 포위하니

겨울에 단군 물리는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여 죽었다.

bc425년 백민성의 욕살 상장 구물이 장당경에서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압록 18성의 원조로서

새 단군에 즉위하고 대부여를 세웠다.

백민성은 창도현(昌圖縣) 북쪽 팔면성(八面城)이다.

요나라 때 3차 한주(韓州)를 두었는데, 금나라 사람 왕적은 여기에 가서 단금상(檀金像)에 향을 올렸다.

단군 구물의 사당이 있었던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 황룡성 천부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藏-唐)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그러나 고주몽의 눌현 황룡성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다.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평양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 있었다.

뒤에 발해 서경압록부가 개원시에 있었고 고구려고국이라고 하였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穄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이다.

 

구물(丘勿) 단군은 해성에 이궁(離宮)을 지어 역시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는 3세 단군 가륵이 세웠던 평양과 가까운 곳으로서 단목국 수도가 있던 법고시에 세원진 평양으로 고려된다. 

 

46세 단군 보을은 장당경 도성에 불이 나서 해성의 이궁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단군왕검 고조선문화 참조)

 

사면성 서쪽 보력진(寶力鎭) 장발향(長發鄕)에서 청동기시대, 전국시대 고묘 등의 유적지가 발굴된다.

장발향에서 나온 3자루의 청동검은 여러 형식이다.

하나는 비파형 청동검에서 보는 “T”자형 청동손잡이를 달았지만 검날이 비파형이 아닌 북방식 세형동검이다.

이는 중군, 즉 서요하(西遼河) 상류 식이다.

또 하나는 공병식 청동검으로서 가운데에 나무 자루를 박아 넣는 원형 구멍이 있다.

이것도 중군 형식으로서 긴 창이 된다.

또하나는 검날이 육릉형이며 타격석을 끼우는 것이었다.

 

 

                                  

 

청동화살도 삼릉식다.

삼릉식 청동화살은 임호(林胡)의 근거였던 내몽고 양성현(凉城縣), 포두시(包頭市) 등에서도 나왔다.

그외 철제 기구가 많이 발굴된다.

이 장발향 청동검과 비교되는 것이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鄭家窪子)의 세 곳에서 발굴된 청동검인데,

청동제 가중기는 비슷하나 거기서는 세 자루의 검날이 모두 비파형이다.

 

팔면성의 어원은 그곳 성터에서 글을 판독할 수 없는 팔면능형(八面稜形)의 갈석(碣石)=石經幢이라고도 한다)의

발굴에 의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 동천왕 양위교서 갈석, 중천왕 즉위교서 갈석 등과 같은 팔면능형

갈석은 중요한 고대 유물로 추정된다. 

팔면성은 3차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3차 한주가 이수현으로 옮겨간 뒤에는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과 유하현(柳河縣)의 기물(器物)이 팔면성에서 발굴되었었다.

단,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遼河) 서쪽 창무시(彰武市) 1차 한주에서부터

옮겨온 것이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서 1190년에 이 팔면성에 단금상(檀金像)이 있어서 제사(妙香供旃檀金像)를 드렸다.

단금상은 단검상(檀檢像)의 기록으로 고려된다.

팔면성 아래 구가둔(丘家屯)을 보면 단군 구물(丘勿)이 본래 백민성 출신이라서 장당경에 도읍하고서

백민성 아래에 묻힌 것으로 고려된다.

 

대창홀아하(大創忽兒河)와 소창홀아하(小創忽兒河)가 발원하는 사평시(四平市) 동쪽 탑자산(塔子山)=(400m)

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구월산 장당경 탑이 여기도 있었는지 알 수 없다.

 

45세 단군 여루 때인 bc365년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쳐들어왔고 운장에서 막았다. 

이때 번조산, 막조선, 진(眞)조선이 합세하여 막는데 진조선은 낙랑이다.

 

46세 단군초에 번조선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죽고 기후국의 기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bc304년 장당경이 불타니 해성의 평양으로 도성을 옮겼다.

해성은 단군 물리가 와서 죽은 곳이다.


bc296년 한개(韓介)가 객좌에 있던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해성 평양을 침범하여 단군이 되려하니, 

해성에 있던 단군 물리의 현손이 고열가가 일어나 물리치고 47세 단군이 되었다. 

bc 239년 북부여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키더니

수유의 군대와 옛서울 백악산아사달(진한 소밀랑 대전자 문화 참조)을 차지하였다.

고열가 단군이 스스로 물러나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후에 영품리왕이라고도 하였으니 영고탑으로 피신한 것으로 고려된다.

고열가도 낮춘 이름 고리의 추장(고리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후손이 비류수에 다시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다.

 

 

'뿌리와 역사 > 고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사군과 졸본부여  (0) 2008.09.08
북부여 웅심산문화  (0) 2008.09.08
기후 객현한 객좌 문화  (0) 2008.09.08
서우여 기자 험독성 문화  (0) 2008.09.07
단군 오루문 낙랑 문화  (0) 2008.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