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찬란한 광산 김문의 근원을 찾아서

오늘의 쉼터 2008. 6. 14. 18:12

 

 지난 회에는 말명당으로 소문난 김극뉵 묘를 소개하였으나 光山金門의 찬란함을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다.
대체적으로 묘의 발응이 동기감응 논리상 가까운 혈연인 高孫에게까지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을 때,

설사 김극뉵의 묘가 명당이라 할지라도 6대손 이후부터 대제학의 출현은 시기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처음부터 다시 光山金門의 묘소들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다. 

<1>, 사계선생의 7代祖母 : 양천허씨 할머니 (1377~1455), 坤坐




1:양천허씨, 2:김철산, 3:김철산 부인, 4:김겸광, 6:김공휘, 7:사계 김장생, 8:김선생 


광산김씨 문중을 중흥시킨 양천허씨 할머니의 부친은 조선조 태종때의
대사헌 허응(許應)이다.
남편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 검열을 지낸 김문(金問)이며, 시아버지는 관찰사를 지낸김약채

(金若采)이다.
열일곱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으니 친정부모께서 가엾이 여겨 개가(改嫁)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사코 마다하시며 유복자(遺腹子)를 가진 몸으로 몸종 하나를 데리고 개성에서

시댁이 있는 머나먼 충청도 논산시 연산(連山)면 까지 그것도 밤에만 걸어서 가는데 큰 호랑이가

계속해서 할머니를 호위 하였다고 한다.
갖은 구박과 고통을 감내하며 유복자인 철산(鐵山)을 낳았고 훗날 철산은 좌의정 김국광(金國光)과

참찬 김겸광(金謙光)등을 낳으니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국광의 5세손이 된다.

그 후 후손들이 현달하여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 외 김집, 김반 등 조선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게 되니 모두가 陽川許氏 할머니로부터 연유 함이다.
               광산김씨 홈페이지에서 발췌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손들을 훌륭하게 훈육하신 선조에 대한 공경심과 가문의 상징성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허씨 할머니 묘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묘소의 풍수적 평가에 다분히 감상적 요인과 선입견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멀리 떨어진 주산으로부터 아무런 변화 없이 무기력하게 오던 용은 사계선생의 묘 뒤에서 비로소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서, 맥은 김철산의 묘 방향 a로 진행하고 있다
이때 방향을 바꾸면서 발생한 지각이 b인데, 허씨 할머니의 묘와 사계선생의 묘는 a와 b의 사이에 위치한 것이다
즉 두 묘소는 산이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니, 실상은 얕은 골짜기인 셈이다

이러한 형태 때문에 혹자는 겸혈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겸혈이 되려면 a, b 두 가지의 길이가 비슷해서 서로를 마주보듯 오므려 주어야 하는데,

이곳은 길고 짧음이 많은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오히려 등지듯 V자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양천 허씨의 묘 앞에는 맥이 흘렀다는 징표인 餘氣 즉 전순을 형성해야 했으나,그러한 흔적이 전혀없다
결국 이러한 땅은 맥을 받지 못한 경사면이므로,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古云 : 鉗有落棗砂 
         (겸혈에는 두 지각 사이에 대추 같은 통통한 덩어리가 있어야 한다) 

허씨 부인은 아들 김철산이 먼저 죽은 뒤 5년 후에 이곳으로 오게 된다.
이때 아들의 묘 위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음에도 굳이 오목한 지형을 선택한 것은 김철산의 묘를 쓸 때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풍수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김철산의 묘 바로 위에는 김철산의 妻와 그의 6세손 金善生의 묘가 자리하게 된다. 



<2>, 사계선생의 6代祖 : 사헌부 감찰 김철산 (1393~1450), 庚坐
김철산은 그의 어머니 양천 허씨 보다 일찍 죽음으로서 이곳 고정리 묘역에서 최초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당시에 그 중 가장 나은 땅을 찾아 썼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묘소까지 오는 용세는 매우 느릿느릿 오다가 홀연히 잠을 깨듯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몸을 틀면서 완만하고

매우 편안한 능선을 형성하였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A가 본신이며 B는 가지인데, 바로 그 한마디의 변화로 死龍 中生龍이 되었다
만약 그 봉우리와 가지 b를 형성하지 못했다면 전혀 쓸모없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맥의 흐름을 탔으므로 허씨 할머니나 사계선생의 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곳이라 하겠다.

古云 : 地有吉氣 隨土以起 (땅에 좋은 기운이 있으면 起峰한다)

그러나 찬찬히 볼 것 같으면 몇 가지 미흡한 것이 보인다
제실 뒤로 보이는 청룡은 잘 감아 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작은 가지일 뿐,

본신은 앞을 향해 길게 빠져나가는 형세이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짧은 가지에 인위적으로 소나무를 심어 가지런한 숲을 조성하였다.

(아래사진 A)···이곳은 실제로 걸어 보아야 알 수 있다



김철산 묘

그렇게 하니 묘에서 볼 때 청룡의 飛走는 보이지 않고 완벽하게 돌아준 형상만 보인다
前回 김극뉵의 묘 좌측에 소나무를 심어서 청룡의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했던 방법과 동일한 형태의
裨補인데,

만약 소나무 숲을 조성하지 않았다면 물 빠짐 또한 길게 보였을 것이다.
한편 內백호도 뾰족한 모습이 되어 우측의 물과 함께 빠지는 형태가 되었으니, 退田筆이라 부른다.
이 퇴전필 또한 김철산의 묘 우측에 소나무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退田筆 : 끝이 뾰족하여 물과 함께 順水하는 산으로 재물의 손실을 초래한다.

제한된 땅에서 불리함과 부족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엿보이는 곳으로, 가문의 풍수에 관한 수준과 믿음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


<3>, 사계선생의 5代祖 : 좌의정 김국광 (1415~1480), 亥坐
조선왕릉의 기세와 흡사하게 생긴 곳이니, 한양 근처에 위치하였다면 왕릉으로 쓰여 졌음직한 곳이다.

그러나 과협처가 펑퍼짐하고 밋밋하여 생동감이 없다 .
그나마 국세가 잘 짜여 지고 수구가 긴밀한 곳으로 가문과 후손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곳이니,

큰 욕심 없는 곳이라 할 수 있다







<4>, 사계선생의 高祖父 : 대사간 김극뉵 (1436~1496), 乾坐
이미 지난 회에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사계선생과 200년 후 7명의 대제학을 품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하였다. 






<5>, 사계선생의 曾祖父 : 군수 김종윤 (1472~1559), 辛坐

 

주산과 청룡·백호 명당 등이 잘 어우러져 편안한 곳이다
하지만 正龍이 아닌 旁龍으로서 기맥이 다소 산만한 곳이니, 흔히 말하는 무해무덕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旁龍인지는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 가족묘지로서는 훌륭하다 하겠다. 



<6>, 사계선생의 祖父 : 현감 金 鎬(1505~1561), 亥坐







주산에서 이어지는 용세는 묵직하게 흐르다가 큰 결정체를 이루며 후부하게 좌정하였다
고정리의 모든 능선은 청룡이 되어 겹겹으로 환포해 주고 있으며 앞쪽의 명당과 水勢, 朝山까지도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니, 花心穴의 형태이다
이곳 묘역은 김 호의 조모 의령남씨부터 쓰기 시작했으므로 오랜 세월 감춰진 땅이라 볼 수 있는데,

어느 明師에 의해 비로소 쓰여 지니 사계선생과 신독재 두 분의 문묘배향을 이끈 축복의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본인이 강조하는 혈의 구조와 구성에 거의 근접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우측선익은 뚜렷하게 보이지만 좌측선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左旋龍의 용세에서는 좌측선익이 없을 수가 없으니, 아마도 오랜 세월 묘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훼손 되었을 것이다.





묘소 아래 전순부분에는 김은휘 묘소가 있는데, 그는 김호의 둘째아들로서 종가댁에 양자로
출계한다 







<7>, 사계선생의 父 : 대사헌 김계휘 (1526~1582), 酉坐


자신의 조부인 김종윤 묘 바로 위에 있다
김종윤 묘소에서 설명했듯이 능선이 길게 빠지는 곳으로, 그저 평범한 곳이라 하겠다.





이곳은 손자가 할아버지 묘소 위에 있는 것이니 소위 말하는 逆葬인 셈이다
그런데 이곳 뿐 아니라 사계선생도 逆葬의 형태로 모셔져 있으며, 이곳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의령남씨 할머니는(순창 김극뉵의 둘째부인) 묘역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
이와 비슷한 경우가 율곡선생의 묘역으로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 신사임당 묘소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당시 의례에 엄격한 유학의 대학자들조차 逆葬이란 개념은 전혀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는데, 요즈음 들어 유난히 따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다 .


<8>, 沙溪 김장생 (1548~1631) : 坤坐 (족보에 표기)



사계선생 묘는 허씨 할머니 묘소의 약 10m 위쪽에 있다 .

따라서 좌향·파구·청룡·백호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할 수뿐이 없다 .
그렇다면 두 묘는 좋든 나쁘든 같은 해석이 되어야 한다 .
그러나 “사계 묘소가 정혈이다”는 측과 “허씨 할머니의 묘가 정혈”이라는

부류로 양분되어 서로의 말이 옳다며 고집하고 있다
물론 객관적 근거와 논리적 설명이 있을 수 없으니,

자신만이 아는 궁색한 말로 얼버무릴 뿐이다.


한편 이곳 불변의 지형에서 패철조차 다르게 측정하고 있다.
1, 곤좌간향, 右水, 계축파····· 자생향(吉)
2, 미좌축향, 左水, 간인파····· 정묘향(吉)


패철과 좌향이 명당을 만드는 것은 아니건만·····
오직 후손들이 번성하였다는 선입견에 我田引水 풀이하고 있다
사계선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의 묘소도 이곳과 흡사한 지형이니,

아마도 당시에는 이러한 지세를 선호하였던 모양이다 .......



우암 송시열 선생 묘소

일단 이곳까지를 정리해 보면 無脈地에 쓰여진 7代祖母 묘소와 사계선생의 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다.

김철산 묘의 안정감과 세심한 裨補, 김국광 묘소의 물샐 틈 없는 긴밀함,
순창 김극뉵의 당당함,김종윤 묘소의 편안함이 더해져,김 호의 묘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오랜 세월 조상에 대한 지극한 공력과 풍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조선 최고의 명문가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古云 : 衆墳合力 却成大, 人說小地生公侯
        (여러 묘가 합력하면 오히려 대지를 이룰 수 있으니, 사람들이 말하는 작은 자리도 公侯를 생함이다)

특히 김 호의 묘는 광산김씨 논산 묘역에서 최고의 땅이며, 명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이곳은 사계선생의 인품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될 정도로 기품이 서린 땅이니,
우리의 조상들이 어째서 그토록 묘 자리에 집착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 호의 묘가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그의 5代孫 이하 7명의 대제학을
설명 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김 호에게는 4아들, 12손자, 35증손자를 두어 매우 번성하지만, 7명의 대제학은 35의 증손자중 유독

한 집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

만약 金 鎬 묘의 바람이라면 여러 집에서 골고루 분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광산김문의 대제학을 잉태하는 또 다른 요인이 분명 있을 것이므로, 다음회에 계속
추적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