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청풍 김씨 오봉산 窩穴 해부

오늘의 쉼터 2008. 6. 14. 17:40

오봉산 窩穴 해부

우리 청풍 김씨는 朝鮮朝 후기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이 나왔으며,

“3대정승”과 “父子領相”을 배출하였다.
역사상 3대정승을 낸 집안은 청송 심씨와 달성 서씨 등 세 집 뿐으로, 청풍 김문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청풍김씨 사이트

김인백,안동권씨-김극형(현감)-김징(관찰사)-김구(우의정)-김재로(영의정)-김치인(영의정) 
                                                              김유(대제학)-김상로(영의정)
                                                                                 김약로(좌의정)


또 다른 청풍김씨
김식(대사성 1580~1658)-김덕수-김비-김흥우-육(영의정)-좌명(판서)-석주(우의정)-우명(청풍부원군)-현종妃

[1], 김인백 묘소 (1561-1617)···의왕시 왕림동, 甲坐
증손자 김유묘 200m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이 갈라지는 지점에 오직 청룡·백호의 국세만 보고 정하였다.

그러나 청룡·백호 또한 온전한 상태가 아니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이니, 전형적인 오목풍수의 작품이다
김인백의 次子 극부는 이곳에 父의 묘를 쓰고 7년 후 30의 젊은 나이로 죽는데, 혹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2], 안동권씨 묘소 (1564-1632)·····의왕시 고천동, 酉坐

오봉산을 바라보는 땅에 숱한 전설과 함께 와혈의 교과서이며 조선8대 명당 중 하나라고

극찬을 하는 곳인데, 풍수인들 뿐 아니라 청풍김씨 후손들 또한 이곳이 천하명당이어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이다.

傳說
1, 五峯山 (or 五鳳山)의 다섯 봉우리는 5정승을 암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6봉우리이기 때문에 여섯 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2, 원래는 집터였는데 터가 좋아 솔잎을 땅에 묻어 시험해 보았더니, 1년 후 누렇게

   황금 빛으로 변하였다. 이에 김극형이 비싸게 사서 집을 헐고 어머니를 장사지냈다
3, 누명을 쓰고 조선으로 피신 온 중국지관이 굶어 죽게 된 것을 보살펴 주었더니,

   그 은혜로 이 터를 잡아 주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묘의 관리가 매우 정갈하며 국세가 훌륭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묘에서 바라보이는 형상만 갖고서 판단하려는데,

좀 더 진지한 발품과 고뇌하는모습이 필요하다 하겠다.

아울러 터를 분석할 때는 후손들의 귀납적 결과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自然地理的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땅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정확하게 살필 수 있는

안목을 키운다면 의외로 만족스런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이 묘소는 橫龍結穴이라 말을 한다
그러나 위 사진에서 보듯이 묘소의 뒤편에는 최소한의 봉우리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즉 혈의 생성에 가장 중요한 玄武頂이 없다는 말인데, 그 말은 묘소 쪽으로는 정상적인

맥이 흐르지 못했다는것이고 단순히 흘러가는 능선의 옆구리에 쓰여 졌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약 100m 떨어진 곳의 과협과 용세가 훌륭하다 말하지만, 정작 穴後一節의 상태는

간과하고 있음이다

古云 : 龍不起頂 龍不眞, 穴不起頂 穴不眞
        (용이 봉우리를 일으키지 못했으면 용이 참됨이 아니고,

          혈이 봉우리를 만들지 못했으면 혈이 참됨이 아니다)

한편 묘소 뒤편에는 작은 암석이 박혀 있어 이를 後掌 또는 鬼星이라 말한다.
기맥이 90도로 방향전환을 하려면
그 힘을 받쳐줄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한데,

그 바위가 지지대 즉 귀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암석은 땅속에 뿌리를 굳게 내리지 못한 뜬 돌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돌일 뿐이다
평범한 바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돌을 좋아하는 풍수들의 耳懸鈴鼻懸鈴이 아닐 수 없다 



또 한가지 이곳은 좌우의 능선이 감아준 형상 때문에 소쿠리와 같은 와혈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모습에 흥분하여 대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차분히 살펴보면, 이곳 묘 터는 右水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B의 역할이 중요한데, 실제로는 아래그림에서 보듯이 밖으로 휘어지고 있다
능선의 빠짐을 나무를 심어 절묘하게 가려놓았기 때문인데, 한번만 걸어보면 쉽게 확인할

있는 것을 엉뚱한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음이다
즉 이 묘소는 아래 그림과 같이 청룡 백호가 벌어져 와혈의 구성에 전혀 맞지 않는 땅이다 






이쯤에서 돌이켜 보면 이곳은 7년 전에 쓴 지아비 김인백의 묘소와 거의 흡사한 지형이다
후룡도 없는 오목한 지세에 나무를 심어 조성한 것 까지 동일한 풍수의 작품이 틀림없다
만약 이곳이 명당이라면 권씨 할머니의 5손자·16명 증손자들 중에서 정승 판서가 골고루

배출되어야 하는데,오직 한 손자의 후손에서만 6政丞이 밀집되고 있음은 청풍김씨의 번영은

이 묘소와는 전혀 무관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

결국 이곳은 治山明堂 이상의 의미가 없는 곳이다 .....

다음의 글은 이곳에 관하여 모 풍수카페에 올라온 글인데, 소개해본다.


이 자리는 입수룡이 절손하니

묘를 용사하고 당대에 장자가 절손이 되는 흠이 있고 차손 막내가 발복하는 차손 발복지지가 된다.

그 이유는 건. 곤. 간. 손.(乾坤艮巽)룡은 장자룡이기 때문이다.
확인하여보니 당대에 장자와 중손이 모두 절손하였다.
파구(破口)을 측정하니 을(乙)파구로 입수룡과 비교하면 해통을(亥通乙) 천덕으로 과갑이 나오는

최고의 파구다.
옛날에는 과거급제하고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고시에 합격자가 나오는 000에서 최고로 좋은 파구다.
·····
이 자리를 관산하면서 입수1절에서 6정승을 알 수 있었고 입수룡을 보고 장손 절손지 임을 알았으며

현무 봉에 오르면서 룡절을 측정한 후 자세한 계산은하지 않고 대강 추산하니 32대 발복할 것으로

보였으나. 집에 돌아와 자세히 추산해 다음과 같은 발복 추산이 나옴으로 관산기에 수록하며

산천지리의 강령에 무서움을 다시 한 번 통감하게 된다.

본인과는 전혀 상반된 평가인데, 묘를 쓰고 나면 비록 장자가 절손되지만 大地라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족보를 확인해 보면 김인백의 장자 익려는 1608년 24세로 卒하며,

차자 극부는 1624년 30세의 나이에 卒한다.
하지만 이곳은 1632년에 묘를 쓰니, 장자와 차자의 죽음은 이곳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현학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려 했으나, 무성의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글을 쓰려면 좀 더 명확한 근거를 갖고 하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