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전설속의 명당 元天錫 先生 묘

오늘의 쉼터 2008. 6. 6. 23:46

<전설속의 명당 元天錫 先生 묘>


* 元天錫[1330 ~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문인.
묘소 : 원주시 행구동 산 37





 

耘谷 원천석은 고려말에 이성계가 득세하자 고향인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과 문장이 당대에 유명하여 방원(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방원이 즉위하여 여러 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피신하여 끝내 임금을 만나지 않았다
임금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원천석의 아들 형(泂)을 풍기현감에 제수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1422년)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묘소는 치악산 밑 석경촌 기슭에 있으니 卯龍 乙坐辛向이다
생존시 무학대사가 말하기를 위 지점은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고,

아래 지점은 백대 자손이 번성할 곳이라 하였다
耘谷선생은 부귀영화를 택하지 않고 후손이 많은 蜂腰穴로 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蜂腰穴 : 벌의 허리 같이 가늘고 잘록한 형태를 말함






위 글과 그림은 족보에 기록된 내용으로 묘는 乙坐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辰坐로 되어 있다
백이·숙제와도 같은 선생의 고결한 성품을 생각하면 이름 없는 풍수 주제에 묘소를 논한다는

자체가 불경스럽지만, 많은 풍수인들에게 騎龍穴의 실체를 알린다는 심정으로 살펴보겠다.

(1), 과협처
축 늘어져서 힘없이 기어오르는 모습이다

(2), 來龍
묘소 바로 뒤편의 용세가 우측은 급경사이고 좌측은 완만하니, 심한 偏龍의 상태이다
그 점이 보기 흉했던지 묘소 뒤편에 많은 흙을 져다 부어 補土를 하였다
그 흔적은 누구라도 보면 알 수가 있다
오히려 B로 흐르는 맥은 좌우 균형이 맞아 안정감이 있으며 생동하고 있다 








 



(3), 당판
만약 기가 멈추게 되면 농축되는 것이므로 그 지점이 통통하게 될 것인데,

그곳은 단순히 흘러내리는 過龍으로 아무런 穴證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그 어떠한 괴혈도 당판에서의 기맥은 급하지 않으며 중후하게 좌정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혈은 그 산의 至尊이기 때문이다

(4), 다시 묘소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어 30m 가량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선생의 묘소는 氣止者를 못한 것이므로 혈이 될 수 없다
혹자는 그곳이 내 몸에 붙은 案山이라 말하지만, 그럴 경우 양팔을 벌려 묘를 감싸주는

형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솟아오른 지점에는 좌우로 가지를 형성하거나 통통한 흔적이 없고 오히려 수척한 모습이다
즉 팔다리가 없는 것이니, 비정상적인 病龍이다





(5), 그곳 앞에는 선생의 부인이라 여겨지는 묘가 있고,

 산의 꼬리는 右旋龍(시계반대 방향)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성에 의해 능선의 우측이 厚富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측이 虛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偏龍의 현상이다 





      뒤에서 바라본 부인의 묘소 


잔디가 살지 못하는 것은 소나무 그늘 밑에 있어서 송진의 영향 때문이다



(6), 주변砂格
일단 청룡·백호의 환포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청룡의 허리는 푹 주저앉았으며, 백호에는 窺峰이 엿보고 있다.
전면에는 단정한 형태의 문필봉이 있으니 묘소는 그것과 일직선으로 마주보는 형태이다 

 

 





 

즉 전형적인 前貪後失의 묘소로 過龍이고 病龍이며 偏龍일 뿐이다.
따라서 이곳 능선 어디에도 혈이 생길 수는 없다
한편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태종이 왕위를 물려준 시점까지 사셨다면

선생의 나이는 90이 넘게 되므로 묘의 영향은 曾孫이하가 될 것인데,

후손들은 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듯하다

古云 : 堂處騎龍泄氣 子孫出於貧寒
(묘를 쓴 곳이 말 달리는 것처럼 설기하면, 자손들이 貧寒하게 된다)

특히 宗家집은 아래의 도표에서는 미처 표기하지 못했으나 원천석의 8세손에 이르러

孫이 끊기게 되는데, 당시 사회에서 宗家집 長孫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따라서 자손이 번성할 자리라는 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무학대사가 묘를 잡아주었다는 말에 냉정한 판단을 머뭇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騎龍의 怪穴이라는 말로 자신과 후학들을 호도하고 있다


·····


이곳에서의 무학대사는 이미 족보에서 밝혔듯이 전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