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지 [十勝之地] |
전쟁이나 천재(天災)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쟁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이러한 승지를 점상(占相)하는 풍수(風水) 또는 감여(堪輿 : 하늘과 땅)의 술(術)을 말하는 사람을 지사(地師)·
그가 말한 십승지는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안동의 내성(奈城), 보은 속리산 산록의 증항(蒸項) 근처,
운봉(雲峯) 두류산(頭流山) 산록의 동점촌(銅店村), 예천의 금당동(金堂洞) 북쪽, 공주의 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영월의 정동(正東) 상류, 무주의 무풍(茂豊) 북쪽의 덕유산(德裕山), 부안 변산의
그 분포를 보면 대체로 남한 지방에 한정되었고 도별로 보면 경상도 4개소, 전라도 3개소, 충청도 2개소,
강원도 1개소로서 대체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 소재지가 지금의 어디인가를 비정(比定)하기가 곤란한 곳도 적지 않다.
풍기의 금계촌은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속한다.
이곳은 소백산 아래에 위치하는데 예로부터 태백산·소백산 밑에서는 인재가 배출되는 복지(福地)라고
일컬어왔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말을 타고 가던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 즉시 말에서 내려 말하기를
“이 산들은 활인산(活人山)이고 피난처로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특히, 소백산 남록에 위치한 금계촌은 북천(北川 : 지금의 錦溪川)과 남천(南川)이 남류하여 서로 합친
풍수 지리적으로도 부산대수(負山帶水)를 이룬 전형적인 명당이라 하였다.
안동의 내성은 원래 안동대도호부의 속현으로서 부치(府治)에서 북쪽으로 90리 지점에 위치한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도 내성은 태백산 아래에 자리 잡아 춘성(春城)·소천(召川)·재산(才山)과
함께 피병·피세의 땅이라 하였다. 현재는 봉화군 내성면에 속한다.
보은의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는 전란 때 이곳에 몸을 숨기면 만인의 한 사람도 상하는 일이 없다(萬無一傷)고 한다. 그러나 대(代)를 물리어 몸을 보존할 곳은 되지 못한다고 부언하였다.
증항은 보은읍에서 상주·함창 방면으로 뻗은 가로를 약 40리쯤 지나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가 되는
시루봉(甑峯)아래의 안부(鞍部)를 말한다.
증항이라는 지명은 이 증봉에서 유래된 듯하다.
증항에서 서쪽 관기리(官基里) 사이는 군내에서 가장 기름진 평지가 전개된다.
그러므로 ≪택리지≫에서도 사람 살기에 가장 적당한 가거지로 들고 있다.
주민들은 농사 외에 대추로도 수익을 많이 올린다.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은, 두류산이 곧 지리산을 말하는데, 현재는 산청군과 함양군 경계에 있지만 전에는
남원·하동·함양·진주 등 10여개 시·군으로 둘러싸였고, 어떤 때는 운봉현 전체가 지리산 속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운봉 두류산이라 한 것 같다. 그만큼 지리산의 범위는 광대하다.
그런데 이 산에서 현재 동점촌이라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택리지≫에는 지리산 북쪽의 함양 땅에 영원동(靈源洞)·군자동(君子洞)·유점촌(鍮店村)을 들어 남사고의
복지라 지적하였고, ≪대동지지≫에는 벽암(碧巖)·추동(楸洞)·유점촌은 남사고의 복지라고 하였다.
이들 승지는 대부분이 지리산 북쪽 임천(臨川)유역에 위치하였다.
두 문헌에서 다같이 공통적으로 든 곳은 유점촌이지 남사고가 말하였다는 동점촌은 아니다.
혹 유(鍮)와 동(銅)의 글자가 비슷하여 혼용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정감록≫에는 운봉의 향촌(香村)이라고도 되어 있다.
예천의 금당동 북쪽은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금당실’로 비정된다.
동쪽에 옥녀봉(玉女峰), 서쪽에 멀리 국사봉(國士峰), 남쪽에 백마산(白馬山), 북쪽에 매봉으로 각각 둘러싸인
분지이다.
다만 동남쪽에 병암성에서 한천(漢川)의 침식으로 골짜기가 되어 이곳의 관문이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남사고는 병과(兵戈)가 미치지 않아 오래 살 곳이 된다고 한 것 같다.
공주의 유마지방(維麻地方)은 지금의 공주시 유구면을 흐르는 유구천과 같은 군의 사곡면을 흐르는
마곡천과의 사이 100리를 말하며, 이 지역은 살육을 면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 한다.
이 지역은 차령산맥이 서남으로 뻗고 그 남부와 거의 병행하여 그 지맥의 광덕산(廣德山)·금계산(金鷄山) 등이
연이어 뻗어 그 사이가 좁고도 긴 유구천 계곡이 된다.
ㄷ자형 지형에서 열린 곳은 곧 금강(錦江)이 되니, 전술상 이런 계곡으로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6·25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이 계곡으로 모여들어 한때 대성황을 이루었다.
영월의 정동 상류는 강원도의 유일한 피난처로 되었다. 영월읍의 동편은 한강 상류가 남북으로 흐른다.
그런데 한강 동부의 만경대산(萬景垈山) 줄기가 동서로 뻗어 한강의 지류로서 북쪽의 함백천(咸白川)과
남쪽의 옥동천(玉洞川)의 분수령이 된다. 남사고는 옥동천을 피난처라고 한 듯하다.
특히, 한강과 옥동천이 합치는 부근은 ≪임원십육지≫에서도 대야평(大野坪)이라 하였으며 경작지가 넓게 발달하여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주민들이 양봉(養蜂)을 한다.
무주의 무풍 북동쪽에는 덕유산이 있는데 무풍은 무주부(茂朱府)의 별호도 되지만 지금은 행정상 무주군 무풍면이 되었다. 남사고가 말한 무풍 북쪽 덕유산은 현재 위치가 불분명하다.
지금의 덕유산은 훨씬 남쪽 장수군·거창군의 경계에 위치하므로 연구가 필요하다.
≪무주읍지 茂朱邑誌≫에도 덕유산은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고 하여 사실과 차이가 많다.
≪택리지≫에는 북쪽에 설천(雪川)·무풍이 있다고 하였는데 무풍은 남사고가 복지라고 한 곳이다.
부안 변산의 호암은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호암 아래 변산의 동쪽을 장신(藏身)의 최기(最奇)라 한 것인데
애매한 점이 많다.
호암의 호자(壺字)가 병호자이니 혹 여기에서 기인하여 변산이 되었는지도 모르나, 그 호암의 소재지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변산의 동쪽이라는 말도 애매하다. 따라서, 통설에 의하여 변산반도를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변산반도는 수목이 울창하고 인적이 없어 호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고, 고려·조선의 궁실에서 소용되는 재목을 이곳에서 공급하였다고 한다.
남사고는 이곳을 몸을 감추는 데 가장 묘한 곳이라 하고,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이곳도 장신처로서 불가하다고 부언하였다. 가야산의 만수동은 비정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첫째, 가야산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의 가야산과 충청남도 예산군과 서산시의 경계에 있는 가야산이 유명하다. 이 두 곳에는 만수동이라는 곳이 없다.
그런데 보통 만수동이라 하면 지리산 중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경상남도 함양군의 군계에 있는 곳을 말한다. ≪택리지≫에서도 구전(舊傳) 만수동·청학동(靑鶴洞)을 들고,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리(梅溪里)라 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가야산 만수동이라 함은 지리산의 만수동이 아닌가 한다.
이들 십승지들은 대부분 깊은 오지에 위치하므로 임진왜란이나 6·25 때도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곳이 많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회적 혼란기나 일제 강점기 및 6·25 이후에도 ≪정감록≫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이른바 정감록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촌락들은 오늘날 대부분 개방되어 그 특성이 없어졌지만, 풍기의 금계촌 경우 1970년대까지도 외부와 단절된 독립된 공동 생활체를 운영하였고 독특한 촌락경관과 생활양식을 견지하였다.
이곳은 6·25 때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나 전쟁을 피하여 찾아든 피난자들이 자기 출신 지역의 산업을 옮겨와 이식산업(移植産業)을 영위하고 있어, 다양한 생활 방식이 복합되어 있는 곳이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鄭鑑錄
≪참고문헌≫ 擇里志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참고문헌≫ 大東地志
≪참고문헌≫ 韓國의 風水思想(崔昌祚, 民音社, 1984)
≪참고문헌≫ 豊基邑의 鄭鑑錄村形成과 移植産業에 關한 硏究(吳世昌, 地理學과 地理敎育 9,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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