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머리풍수

오늘의 쉼터 2008. 2. 1. 21:58

 

* 머리풍수

현장 답사를 할 때는 가끔 닮은꼴 풍수를 발견하게 된다. 가령 눈설미 있는 독자가 지도를 펼칠 때 부산과 馬山의 도시 모양이 닮은 꼴임을 한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같다.

釜馬항쟁을 일컬어 양산(山)자 지명들이 양김(金)씨처럼 시끄러울 때에 전국이 뒤집힌다는 지적처럼, 둘은 드센 텃자리로도 닮은꼴이다. 닮은꼴의 두 도시는서로 풍수의 위세를 주고받았던 역사상 전래마저 있었다.

고려 충렬왕 6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이 馬山에 설치된다. 대륙의 동(東)편 섬나라 일본을 정(征)벌하기 위한 출행(行)군 사령부(省)가 마산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문패다.

그로부터 7세기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정복을 위한 거점 확보의 첫 번지수를 부산에다 잡았다. 마산은 대륙이 섬나라를 겨눈 칼자루였고, 부산은 섬나라가 대륙을 겨냥한 총구의 방아쇠였다.

이러한 풍수역학 관계에서 日帝는 쇠말뚝으로 칼자루의 힘점(鎭山)인 무학산의 정수리를 찔러버렸다. 1986년 8월15일 그 쇠말뚝은 마산 산악인들에 의해 제거된다.

한편 일제는 `총구의 번지수'인 부산에는 어떠한 식민풍수를 자행해 놓았을까.

이는 `風水의 현장' 연재의 정곡이기도 하다. 닮은꼴 풍수는 부산에도 존재하는데,
식민풍수의 독소를 풀 때 해독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東萊府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弄主山...府主山爲盤龍之形故名基案爲弄主云...'(농주산...동래부의 주산(마안산)이 앉아있는 용의 형상(盤龍之形)인지라 그 앞에 있는 산을 농주(여의주)라 일렀다....)이와같은 대목에서 동래의 풍수형국이 반룡지형(盤龍之形)임을알 수가 있다.

동래는 민족풍수로 닦았던 텃자리임에 견주어 그 당시 일제가 식민풍수의 방아쇠로 삼았던 중심지는 남쪽에 있던 용두산이다. 용두(龍頭)와 반룡(盤龍), 여기서 우리는 민족의 터와 식민지의 텃자리 풍수형이 용(龍)이라는 닮은꼴임을선뜻 알 수가 있다.
모든 동물에는 머리가 있으면 꼬리가 있듯 풍수의 형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용두산을 머리로 한 이곳 용의 꼬리는 어디 쯤 될까.

이를 섣불리 풀 적에는 덜컥 식민풍수의 덫에 걸려버리는데, 오늘날 부산시청의 자리에 있었던 용미산(龍尾山)이 그 미끼이다.식민부청을 닦을 즈음(1934년경)에 깡그리 밀어버린 용미(龍尾)라는 산명이 용의 꼬리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용두산은 용의 머리이며, 용미산은 용의 꼬리라는 식으로 풍수형국을 단정한다면 이는 배꼽 잡고 웃길 앉은뱅이 방안풍수 꼴이 되어버린다.

지형상 용미산은 바닷가에 인접하고 용두산은 내륙쪽에 있다. 그래서 그놈의용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한 용이 된다. 또한 일제가 바다에서 부산으로 침략진출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식민풍수의 독소조항이 된다.더구나 조선의 선조들이 정감록적 예언처럼 일제의 식민 진출을 부산에다 용두와 용미로써 예시한것이 아니냐는 어거지와 함께 말이다.

부산의 맥(脈)을 해독시키는 식민풍수의 독소를 해독시켜 보기로 하자.
풍수에서 용의 머리를 용수(龍首)라 하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감추어진 명당의 혈(穴; 吉氣의 원천)을 찾는 원리를 용수지장(龍首之藏)이라 한다.

풍수 원전인 장경(葬經)의 핵심이론이기도한 용수지장을 터득한 풍수사일 경우에는 용미산 쯤이야 단번에 용의 꼬리가 아닌 다른 부위로 판정해준다..장경산세편의 대목이다. `...산세진이거자위미(山勢盡而擧者爲尾) 이점수유의(而占首有疑)...'. 이를 방안풍수가 해석한다면, `산세가 다할 때 쯤에 속은 것이꼬리니, 머리에서 혈을 찾을 때 유의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용수지장을 터득하고서 실무에 구사할 줄 아는 풍수사는 다음과 같은풍수문리(風水文理)로서 정곡을 잡아준다.

산줄기(山勢;구봉보수산복병산용두산) 끝에 다시 솟은(동산) 것을 미(尾;용미산이라는 단순 명칭)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용의 어떤 부위인가는 용수지장으로 검증(有疑)하라고.머리를 꼬리로 보고 꼬리를 머리로 잡지말라는 풍수 격언이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용미산은 용수지장의 법칙에서 어떤 부위가 될까. 이를 용수지장으로 나열하자면 풍수전문지에나 실릴 정도로 본지 독자들에겐 설명이 더 복잡해져버릴 것이다.

이때 보다 쉬운 이해가 바로 닮은꼴 풍수다. 동래의 반룡(盤龍) 앞에 놓인 여의주(농주산)의 닮은꼴, 부산의 용머리(龍頭;龍首) 앞에 놓인 여의주(용미산).

이로써 용미산이 용의 여의주임이 드러나는데, 기실 식민풍수의 독소적 행위에서 알리바이는 성립된다.

日帝는 1915년과 1932년에 농주산과 용미산을 각각 밀어 부산의 민족정기를 용이 아닌 이무기로 만들었다. 용은 여의주가 있어야 조화를 부릴 수 있다.
이는오키스트라와 지휘자라는 자리매김과도 같다.동래의 지휘석(농주산 자리)에다식민경찰터를, 부산의 지휘석(용미산 자리)에다 식민부청을 앉혔던 것이다.
더불어 지휘자의 식민악보를 후지산과 東京 본영에서 가져왔는데, 이는 현 부산시청 본관의 모양과 입지방향에서 밝혀진다.

시청 본관 옥상에 大자형의 골이 파져 있다는 문화재 관계자의 증언과 필자가느꼈던 본관건물 새 모양의 형을 합하면 이는 대조(大鳥)가 된다.
대조는 봉황(鳳凰) 중의 황(皇)새에 견줄 수 있다.
일본 천황의 조상신이 바로 황새라는암컷의 대조이다.
대조의 건물은 정동쪽에서 날아오는 모양으로 앉아있는데,같은 북위 35도10분의 출발선상에는 후지산과 東京이 버티고 있다.

 이러한 식민풍수 만행은 더욱 이 땅의 뿌리마저 끊어놓은 현장이 있어 발걸음은 자연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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