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斷脈풍수..후손발복 水露王陵 신작로 내 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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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곰의 후손이고 한반도는 토끼라던 조작극이 바로 식민사관이며 식민風水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생소한 소유권을 들먹이며 등기법으로
삼천리 강산을 강탈한 日帝였다.
미련한 곰들에게 법망을 이용하여 땅을 빼앗기로서니 힘없는 토끼 나라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되겠는가.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日帝였다.
1919년, 허약한 토끼가 아닌 호랑이의 포효는 삼천리 강산을 진동케 했다. 기미년 3.1 만세 운동. 1920년, 백두산 호랑이는 대한제국군 무장해제
13년만에무장을 갖춘다. 북로정서 독립군 무장병력 2천명.
일본군은 정예 5개사단에서 선발된 2만5천명으로 토끼몰이 하듯 독립군 2천명을 겹겹이 에워쌌다.
맞붙어보니 백두산 호랑이가 후지산 늑대를 사냥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상자 3천300명에 이르는 일본군의 대패배에 비해 우리측의 사망자는
고작 60명 뿐이었다.
이에 경악했던 일제의 식민정책은 교활한 여우처럼 둔갑을 했다. 조선인의 얼을 말살하라, 조선의 민족정기를 끊어버려라.
1922년 조선총독부는 시셋돈으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과 함께 `조선사'라는 식민사관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총독부 조사자료
제31집이 오늘날 우리 시중에 나돌고 있는 `조선의 風水'라는 책이다.
1931년 최초 발행한 `조선의 風水' 소화 6년판 원본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식민풍수로서 민족정기를 단맥(斷脈)질한 현장은 김해시에 있다.
단맥풍수의 현장을 검증키 위해 김해시청 문화공보실을 찾았던 그날은 무더운날씨가 오열하듯 비마저 뿌렸다.
문제의 14번 국도는 언제 가로질러 갔느냐는질문에 담당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경우에 필자에게는 확실한 효력이 준비되어 있다. 확실히 모르면 담당자도 사실을 모르고 있더라고 지면에 그대로 쓸 것이라는
발언 뒤에는 본연재 독자들의 이목은 태풍의 눈이라는 점.
한데 그날 담당자 중에는 필자와 동성동본인 장해수씨(60)가 있었다. 서로 본관이 통하자 갑자기 가까워졌고, 열성적인 협조로 모든 조사는
일사천리로 끝나버렸다.
우리 민족의 뿌리에는 본관(本貫)이라는 땅의 자리매김질이 있다. 서양인들은빵장사면 베이커, 돈놀이 출신이면 콜이란 직업에서 유래되었다.
하나 우리의성씨에는 김해 전주 안동 동래라는 뿌리를 내렸던 지명들이 꼭꼭 있다.
직업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투쟁했던 서양인들에 견주어 우리 민족은
조상의 제사와 시조묘(始祖墓) 명당에서 한솥밥처럼 잘 뭉쳤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의 제사와 조상신을 미신으로 매도하면서도 그들의 귀신인 신사참배는 강요하였다. 풍수발복을 혹세무민으로 매장하면서
도 김수로왕릉의 번창은 신작로 개설을 구실삼아 단맥시켰던 것이다.
1935년 사진이 보여주는 14번국도가 단맥풍수의 칼질이다.
조선팔도에서 후손발복 제1위인 김수로왕릉에 컴플렉스마저 있었던 일제였다. 김해의 토양에는 그들의 천왕족 뿌리가 연루되었던 역사가 그것이었다. 광개토왕비문 조작극은 식민사관이었고, 김수로왕릉의 단맥질은 식민풍수다. 보다 더 단맥질의 근본원인은 김수로왕릉의 풍수 형국에서 드러난다. 왕릉에다생기(生氣)를 넣어주는 공급선은 북쪽에 있는 구지봉(龜旨峰)이다.
고작 40m남짓의 동산이지만 거북구(龜)자 가리키듯 당당한 거북의 머리이다.
이러한 거북형(形)에 견주어 세(勢)는 거북이 등에서 잡혀온다.
뭉쳐있는 등 부위가 머리를 아래로 내리니 이는 하산(下山)으로 기세를 보여줌이다. 더군다나 구지봉은 삼국유사에서 보듯 영기(靈氣)가 서린 곳이다.
하여 김수로왕릉의 풍수형국은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다.
만약 이러한 세에 양쪽날개를 펼쳐주는 형을 갖춘다면 이는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
이곳 영구의 형국에는 왕릉이 두개가 있는데, 허황후릉과 김수로왕릉이다. 허황후릉은 거북 어깨 부위에 자릴 하는데 거북이 어깨는 700년 후 중국
풍수서에서 인용할 정도로 명당인 곳...
一龍住處 必成一形 如龜形穴 拒肩....
머리 앞전에 안장한 김수로왕릉의 경우는 왕기(王氣)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영구하산형이 선명히 드러나는 대목...
구지봉에 영령스러운기운이 돌자...
사람들은 구지가를 불렀다...
이윽고 하늘에서 왕들을 하강(下山)하여 주었다...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은 김(金)씨의 바다(海)를 이루듯 김해(金海)김씨 다산발복의 뿌리였다. 왕기(王氣) 역시 가락국이 멸망하였으나
후손 김유신은 후일신라의 흥무대왕으로 추숭되는 저력으로 이어졌다.
얼마 전 TV에 경주의 이상한 철도길이 전국에 방영되었다. 기차가 통과할 때마다 지기(地氣)를 흔들어서 김유신릉을 음해하려고 했던
일제의 계획적인 철도설계행정. 시조묘는 신작로 개설을 핑계로 단맥하고서
이어 후손인 김유신의왕기마저 두려워 철도로서 흔들어 놓았던 식민풍수의 만행이다.
일제가 이곳 왕릉에 대한 역사적 콤플렉스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설에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까지 김수로왕릉을 시조묘로 삼고 있다는 풍문과 함께
자기들의 천황족까지 연루되었던 이곳 김해.
이러한 왕기발복 풍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임나본부설(任那本府說)이라는 식민사관의 본전은 커녕 일제는 몽땅 후례자식에 덤바지 꼴이 되어버린다.
구지봉과 허황후릉 사이에 있는 영구의 목을 쳤다. 식민풍수가...머리 앞전의왕과 어깨 부위에 있는 왕비가 사후 생이별한 현장.
김해김씨 종친회가 주축이되어 1993년 거북이 목을 잇댔는데 사진에서 보듯
터널도 아니요, 육교도 아니다.
우리 전설에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상봉한다던가. 일제와 식민풍수는 오늘날에 있어 우리 강토에다 왕과 왕비가 상봉하는 `풍수 오작교'마저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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