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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의 세로 현판

오늘의 쉼터 2008. 2. 14. 19:42

 

* 숭례문의 세로 현판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은 여느 대문의 그것과 다르다.
서울 사대문가운데  유일하게 가로가 아닌 세로로 쓰인 것이다.
이는 오행(五行)에서 유래됐다. '숭례'의 '례(禮)'는 오행에서 말하는 화(火),
오방(五方)에서 일컫는 남방(南方)에 해당한다.

이런 현판을 내건 데는 한강 너머 남쪽에서 경복궁 쪽을 건너다 보는 관악산과 관련이 있다. 풍수적으로 화기(火氣)가 가득한 관악산을 누르기 위한 방책이다.
불로써 불을 제압하는 이화제화(以火制火)라고 할까?

현판을 세로로 세운 것은 일어나는 불꽃 형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란다.
활활 기세 좋게 타오르는 모습을 하게 함으로써 악산(惡山)인 관악의 화기를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숭례문은 610년 동안 화재 한 번 만나지 않고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과 같은 크고 작은 전란들이 수차례 한반도를 훑고 지나갔으나 용케 그 화를 피한 것이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와 규모만큼 풍채가 우람하고 아름다웠다.
서울을 감싸는 네 개의 산을 하나로 잇는 도성 진입의 상징적 관문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장수한 탓에 숭례문은 우리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이 대문을 통과해 조선의 심장부를 완전히 접수했다. 경복궁이 불탄 것도 이때였다.

그로부터 300여년 뒤에도 일본군이 다시 이 문으로 들어와 대한제국을 집어 삼켰다. 양 날개처럼 펼치고 있던 주변 성벽이 철거된 1907년에 다이쇼(大正) 황태자가
숭례문을 통과하지 않겠다고 해 성벽을 부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날개를 잃은 이때부터 숭례문은 더이상 성곽의 대문 구실을 하지 못했다.
대문 양쪽으로 길이 나면서 거리의 섬이 돼버린 것이다. 경복궁 남동쪽에 있는
동십자각이 지금 딱 그 신세다.

오래 사는 것도 간혹 죄가 되는 것 같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천수를 누린 노인네처럼 말이다. 숭례문에는 언제부턴가 식민잔재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조선 고적(古蹟) 제1호로 지정해서인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보로 편입하면서 역시 1호 명칭을 붙여줬다.

하지만 숭례문에겐 아무 죄가 없다. 있다면 조선왕조의 전말을 지켜보고 일제시대를 통과했으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증언한 것이라고나 할까? 빼어난 건축미를 간직하며 상징적 문화재가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불길한 전조라고 해야겠다. 몇 해 전부터 국보 1호로서 숭례문이 적합지 않다는 여론이 일었다. 급기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문화재 등급과 분류체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난달에 밝혀 숭례문의 '1호' 지위상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터에 발생한 대참사여서 더욱 안타깝다. 국토를 초토화시킨 전란들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은 숭례문이 전시도 아닌 평시에, 수십 만 외군도 아닌 단 한 명의 민간인에 의해 불타 사라졌다니 통탄스럽다.

사실 숭례문의 세로 편액에는 화재를 방비하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마음만큼 실제로도 화마를 조심했다는 얘기다. 그 효험을 톡톡히 봐서인지 600여년 동안 별 탈없이 서울의 상징 관문으로서 변함없이 사랑받아왔다.

이번 화재는 관심과 방비가 얼마나 느슨해졌나를 잘 말해준다. 도심의 섬이었던 숭례문을 민간에 개방한 것까진 좋았으나 만일의 상황을 위한 대비책이 너무 소홀해 결국 화를 불렀다. 외환(外患)은 용케 견뎌냈으나 내우(內憂)에 그만 무너진 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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