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한족(漢族)과 동이족(東夷族)의 시조

오늘의 쉼터 2008. 5. 15. 22:19
 

치우(蚩尤)와 황제(皇帝)

 중국인들에게 역사의 시작은 삼황(三皇)시대이다.

                          

                            ▲ 염, 황의 돌 조각상(중국)

 

삼황은 수인(燧人)씨, 복희(伏犧)씨, 신농(神農)씨인데 각각 인황(人皇), 지황(地皇), 천황(天皇)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은 삼황을 신화로 단정해 '사기(史記)' 에 싣지 않았다.

 

현재 '사기' 에 수록된 삼황본기는 사마천이 아니라 당나라 때 사마정(史馬貞)이 가필한 것이다.

 

타인의 저서에 아음대로 가필한 사료 조작의 한 예이다.

 

사마천은 1대 황제(黃帝). 2대 전욱(?頊). 3대 제곡(帝?). 4대 요(堯), 5대 순(舜)으로 이어지는

오제(五帝)부터 역사적 사실로 보았다.

 

그래서 '사기' 는 황제족과 치우족의 대결로 시작하는데 황제는 현 한족(漢族)의 시조이고,

치우는 동이족(東夷族)의 일파인 구려족(九黎族)의 시족이다.

▶ 구리(九黎)→구이(九夷)→구한(九韓)→배달국

 

 ▲ 탁록 대전

 

'사기' 주석서인 '사기정의(史記正義)' 는 '구려족의 임금 칭호가 치우이다(九黎君號蚩尤)' 라는 공안국(孔安國) 의 주석을 싣고 있는데, 구려족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선. 하북성에 거주해 동이족의 거주지역과 일치한다.

 

황제족과 치우족이 싸웠던 곳이 북경 서북쪽 120㎞ 지점의 탁록(??)이란 지역인데, 현재황제성(皇帝城)과

치우선(蚩尤城) 유적이 남아 있다.

 

                       

                               ▲ 탁록 삼조당에 모셔져 있는 치우천왕

 

황제성이 있던 지역에 중국인들은 중화삼조(中華三祖)를 모시는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문제는 중화삼조에 원래 한족(漢族)의 조상이었던 신농씨와 황제 외에 동이족의 조상인 치우까지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 치우천왕 상

 

중국이 삼조당을 세운 것이 동북. 서북. 서남공정을 준비. 진행하던 1995년 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치우를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편입 시켜야 동북. 서북. 서남공정의 논리가 완성된다고 보고

환부역조(換父易祖)를 단행한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중국사라는 동북공정 논리의 뿌리를 캐보면 치우 문제에 가 닿게 된다.

 

                                            ▲ 귀면상(창덕궁)

 

그러나 남의 조상을 자신의 족보에 기재한다고 어찌 자신의 조상이 되겠는가?

 

이런 역사 왜곡은 사마천의 ‘사기’ 첫머리에 의해 부정된다.

 

황제족과 치우족의 싸움으로 시작하는 ‘사기’ 는 중국사와 한국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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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은 누구인가?

그러면 우리가 추종하는 치우천왕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의『환단고기(桓檀古記)』와 중국의 여러 고서 등에 등장하는 전설적 인물이다.

 

흔히 군신(軍神)·병주(兵主) 등 ‘전쟁의 신’으로 통한다.

 

치우천왕·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자오지천황·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치우가 기록돼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헌은 1675년(숙종 1)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상권)와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에 편찬한『환단고기』이다. 

 

이들 문헌에서는 치우를 우리 민족 최고의 '전쟁 신'으로 받들고 있다.

 

하지만 치우의 강인한 인상과 믿음이 해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도깨비처럼 전하게 됐다.

 

따라서 고대 왕릉, 기와, 민담 등에 나타나는 도깨비 문양은 귀신인 도깨비가 아니라

용감하고 매서운 인상을 지닌 '치우' 환웅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은 그들의 입장에서 조명, 우리와 다르다.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는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이 패공(沛公)으로

칭한 뒤 곧바로 치우에게 제사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치우는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黃帝)와 싸우다 응룡(應龍)에게 죽었다고 한다.

 

우리의『환단고기』에서 특히 주목한 인물은 바로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이다.

 

이 책에 의하면 치우천왕은 BC 2706년(42세) 환웅의 자리에 올라 BC 2598년(151세)까지

재위 109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다.

 

그는 10년 동안 중국의 황제 헌원(BC 2692~BC 2592)과 73번 싸워 모두 이겼다.

 

헌원은 중국 하나라 이전 삼황오제의 삼황(三皇) 중 태호복희에 이은 2번째 황제다.

 

삼황 다음은 오제(五帝, 요순 임금 등)가 이어지고 이어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그리고 은(殷)나라,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현재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그 이전은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도 은허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2년전 중국에서 하나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수레와 투석기(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전쟁에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는 치우천왕이 탁록(오늘날 하북성) 벌판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다르다.

 

“제후가 모두 다 와서 (치우에게) 복종해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했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사기』에 의하면 치우는 중국 산동성(산둥반도 지역)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麗, 동이족의 나라)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중국 조상인 신농이 다스리던 영역 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다.

 

치우는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신농의 후계자인 유망(楡罔)을 무찌른다.

 

그러자 유망이 황제 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중원을 놓고 헌원과 치우가 대결전을 벌인다.

 

고대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리고 치우는 전군을 동원해 헌원과 10번을 싸워 9번을 모두 이긴다.

 

여기까지는 우리 역사서와 같다.

 

헌원은 폭풍우 속에서 치우에게 쫓기다 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회복해 용맹하던 치우의 형제 81명이 하나씩 하나씩 쓰러지고 마지막 탁록 대전에서

치우는 종국에는 혼자 남아 싸우다 헌원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려 처형된다.

 

이후 동이족은 중원에서 밀려나 중국 동쪽(요동과 만주)으로 옮겨갔다.

 

이 땅을 이어 받은 것이 부여-고구려-발해이다. 

 

중국 역사에서 치우는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머리가 구리와 쇠로 돼 있고(아마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치우가 휘두르는 강력한

청동 신병기에 놀란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치우가 그렇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폭풍우를 뿌리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었던 것으로 『한서지리지』에 전해지는데 춘추전국

시대에는 이곳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됐고 이어 진나라, 한나라 때는 주민들이 제를 지냈다.

 

또 『사기』〈봉선서〉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상기와 같이 치우천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면서 민족사학도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중국의 중원은 과거 우리의 영토였으며 그 땅과 백성을 지배했던 인물이 치우천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은 부여를 통해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 환웅·단군의 삼성조(三聖祖)를 이어받은, 요동과 만주를

비롯해 북방영토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치우천왕이 지배하던 서토를 수복하기

위해 당나라의 이세민과 천하의 지배권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중원을 서쪽의 우리 땅이라는 개념에서 서토라고 불렸다.

 

고조선이래 가장 용맹스러웠던 연개소문은 중국에서 특히 그 지명도가 높아 고대 기록에 많이 나오고

중국의 연극인 경극(京劇)과  고대소설에도 나온다. 

 

당의 전기소설(傳奇小說)『규염객전(?髥客傳)』에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규염객은 용의 수염을 한

나그네 라는 뜻이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하사극 연개소문에도 그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송·원·명의 희곡 모음집인『명설창사화집(明設唱詞話集)』에도 연개소문을 소재로 한 희곡이 전한다.

 

연개소문은 한마디로 중국인들에게 경악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우는 아이도 연개소문이 온다고 하면 그쳤다 한다.

 

이에따라 중국의 중원은 과거 우리 영토이자 우리의 역사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역으로 우리의 서토,

즉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우리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할 것이다.

 민족사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상 치우천왕과 연개소문처럼 우리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드높인 인물은 없을 것이다 .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후예임이 자랑스럽다. 아~ 대한국인이여! 

 

한민족의 역사는 환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까지 무려 9206년이 되고 배달국부터

따지면 5905년이며 단군부터 따지면 올해가 4340년이 된다.

 

<민족(단재)사관연구소장  한재  신   충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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