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참고집

백제 사리함 발굴

오늘의 쉼터 2008. 5. 15. 21:57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

 

왕흥사터 백제 사리함에서 금장식·구슬 등 수천점 나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완형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가 1430년 만에 발굴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 기초(심초석·心礎石) 부분에서

서기 577년(위덕왕 24년)에 제작해 넣은 사리장엄구와 각종 장식품 등을 발굴했다”며

“온전한 모습을 갖춘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굴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등 전문가들은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왕흥사터 목탑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발굴 결과, 가로 세로 14m에 이르던 장대한 탑이었다.

사리장엄구는 청동으로 된 사리합(직경 7.5㎝, 높이 8㎝) 안에 은으로 된 사리병을 넣고,

그 안에 다시 금으로 된 사리병을 담은 ‘3중 세트’ 형식이었다.

 

 

▲ 1430년 만에 햇빛을 본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청동사리합(맨 뒤) 안에 은제 사리병(가운데)을 담고,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합에는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장 엄구를 넣었다고 기록했다.

 

 

이 중 청동 사리합 몸체에는 한자를 29자 새겼다.  

내용은 “정유년(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절을 세웠다.

 

사리를 2매 넣고자 했는데, 부처님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됐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였다.

 

 

 ▲ 청동사리합 바깥 부분에 적힌 명문(銘文). /문화재청 제공

 

백제 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명문·銘文)이 발굴된 것은 무령왕릉 출토품(1971년 발굴)과

역시 창왕의 이름이 적힌 사리감(사리를 안치한 용기·1994년 발굴) 이후 세 번째이다.

 

이 명문으로 인해 -

▲왕흥사터 사리장엄구는 삼국 최고(最古)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에 창건됐고,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아좌 태자 외에도 577년 즈음에 사망한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이 새로 밝혀졌다.

사리장엄구 주변에서는 각종 금 장식과 귀고리, 액막이(진묘수·鎭墓獸)형 장식,

구슬 등 진단구(鎭壇具·건물을 세울 때 액을 막기 위해 넣는 것)도 나왔다.

출토된 구슬은 낱개로 8000점이 넘는다.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와, 사리를 담은 각종 용기 등 장식품)가 나온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는 금제 장식품(윗쪽)과 형형색색의 구슬들(아랫쪽)이 함께 출토됐다.

크기는 1cm 내외지만 백제인의 예술혼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발굴 결과 왕흥사는 서기 577년에 세워졌음 이새롭게 밝혀졌다.

 

위덕왕(재위 554~598)은 45년간 백제를 통치했지만, ‘가족사’는 불운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왕자 시절 고구려 장수를 베고 병사와 함께

침식했던 용감하고도 다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를 이끌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출병했던 아버지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살해되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즉위(30세)했다.  

53세 즈음에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왕흥사 목탑 사리장엄구를 둬 아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했다.

위덕왕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 못했다.

10/25일 조선일보-신형준 기자〉

 

※참고

<충남 부여 왕흥寺터에서 나온 사리병의 금.은 제품 순도 98~99%>

 

지난 10월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출토된 사리장치(사리를 담은 병이나 합, 함)에서

나온 금과 은 제품의 순도는 98~99%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에 의뢰해

왕흥사터에서 나온 금과 은으로 된 사리병에 대한 성분 분석을 했다.

유물 표면을 측정해 성분을 분석하는 X선 형광분석기를 사용했다.

그 결과, 금제 사리병의 금 순도는 98.42~98.62%였으며, 은제 사리병은 99.08%였다.

은제 사리병은 그러나 청동제 사리기 내부에 놓여 있어서 표면에는 청동녹이 많이 묻은 상태였다.

보존과학자들은 “이 정도면 24K로 볼 수 있다”고 했다.

X선 형광 분석기로 금 순도를 분석할 때 표면을 너무 닦아내면 유물에 손상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완벽하게 닦아내지 않는다.

이때 금 순도를 떨어뜨리는 ‘오염 물질’ 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X선 형광분석기의 오차 범위는 ±2%로 잡는다는 것.

고대 금제품에 대한 순도 조사는 그리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왕흥사터보다 50여 년 앞서 만든 무령왕릉 출토 금제품들은 평균 순도가 97~99.8%였다.

감은사탑에서 나온 금제 사리병 순도는 96~97%였고, 삼성미술관 리움이 가지고 있는

서기 5~6세기 금제 귀고리 10점의 순도는 3점이 95% 이상이었지만, 낮은 것은 65%짜리도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터 사리장치에는 ‘사리를 원래 2매 넣었지만, 부처님의 조화로

3매가 됐다’ 고 기록돼 있었는데, 조사 결과 사리는 나오지 않았다” 고 했다.

왕흥사터 사리장치는 서기 577년,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목탑을 세우면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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