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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와 주몽(朱夢)의 관계

오늘의 쉼터 2008. 5. 15. 22:33

 

 

부여(扶餘)와 주몽(朱夢)의 관계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이 태어나 자란 곳이 부여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데는

 드라마 '주몽'의 힘이 컸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불거진 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고구려에서 부여로까지 확대시킨

의미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부여는 고구려와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로 잘못 그려지기도 했다.

심지어 한(漢)나라의 현토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조선 유민들을 괴롭히는 등

오히려 반(反)한국사적인 존재처럼 묘사 되기도 했다. 

과연 그를까.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송화강 유역

(현재 중국 길림성 길림시 및 농안시 일대)에서 존속했다.

 

주몽이 남하해 처음 도읍한 지역은 졸본부여(졸본부여.현재 중국 요녕성 환인시)로,

부여 땅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셈이다.

뿐만 아니라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세운 백제 역시 부여를 계승하여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扶餘씨)라 하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라 표방했다.

남부여라 칭할 당시 백제의 서울은 미추성, 즉 지금의 평양지방이 였다.

 

 


평안남도 평원군에 남아있는 미두산성이 미추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부여라는 지명은 바로 이런 사연으로 생겼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지금도 명절 때 즐기는 윷놀이 말판의 도.개.윷.모는 각각

부여의 관직명인 자가(돼지). 구가(개).우가(소).마가(말)에서 따왔다.

 

흰 색을 숭상해 백의(白衣)를 즐겨 입었다는 것도 부여에서 기인한다.

부여란 국호는 '평야'를 뜻하는 '벌--부리'에서 나온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역사서인[삼국지] 동이전이 부여가 "동이 땅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이라고

기록한데서 방증된다. 

부여의 전성기 때인 3세기에는 영토가 사방 2000리로 인구는 8만호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사방2000리, 인구 3만호)를 능가하는 규모다.

그런데 3세기 말부터 서쪽의 선비족(鮮卑族)이 여러 차례 침입해 옴에 따라 국력이 크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494년 북쪽에서 흥기한 물길(勿吉: 말갈의 전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부여 왕실은

고구려에 망명하게 된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말이나 풍속 따위가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다"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지파(支派)라는 �이다.

고구려만 우리 고대사로 강조하는 세태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