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대접에 화가 난 지관이 기가 빠진 명당을 잡아준 이야기
명당에 대한 전설 중에는 지관을 잘 모셔야 명당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겉은 그럴 듯 하더라도 속은 별 볼일 없는 명당을 잡아주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경북 안동 가천에 있는 조선 선조 때 유명한 학자이자 신하인 김씨 묘다. 이 묘는 겉으론 누가 보아도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기가 빠진 자리로 후손에게 발복이 없어 그 까닭을 알아보니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김씨가 죽자 그 자손들은 명당을 찾아 쓰자고 협의한 결과 한양에서 당대 풍수지사로 유명한 지관을 초청해 묘 자리를 잡기로 했다. 급히 사람을 한양으로 보내 지관을 초청했다. 그러나 콧대 높은 지관은 시골 양반들의 초청에 얼른 응하지 않고 이삼일이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한시가 급한 김씨 일가는 화가 치밀어 지관이 도착하자마자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산으로 끌고 가 묘 자리를 보도록 하였다. 지관은 지관대로 김씨네의 이와 같은 행동이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당대 유명하다고 명성이 나 있는 지관이 혈이 아닌 곳을 잡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곳저곳을 답사한 끝에 그 명성에 합당할 만한 명당자리로 금계포란형의 혈장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보니 그 속에는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있었다. 지관은 그 돌멩이를 파내라고 일렀다. 바로 이 돌멩이가 명당의 생기를 가두고 있었는데 그 돌멩이를 뽑아내자 안에 뭉쳐있던 생기가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 돌멩이를 파내지 않고 그 위에 묘를 쓰면 크게 발복할 수 있음을 지관은 알면서도 김씨네로부터 푸대접 받은 감정으로 돌멩이를 파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묘지의 외형은 훌륭한 금계포란형이지만 속의 혈장은 생기가 파혈 되고 말았다. 그 뒤로 김씨 자손들은 발복을 받지 못하고 집안이 기울어 갔고 지금도 그 묘에는 당시 파냈던 큰 돌멩이가 있다고 세인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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