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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이씨(全義 李氏) 시조 묘 이야기

오늘의 쉼터 2008. 5. 14. 00:10

 

전의 이씨(全義 李氏) 시조 묘 이야기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대교 북쪽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전의이씨선산(全義李氏先山)이라고

푯말이 있는 묘가 있다.

 천장지비(天藏地秘)한 명당으로 전의 이씨를 명문으로 만들게 한 묘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공주강(금강)변에 가난한 뱃사공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뱃삯을 받지 않고 건네주어 자비롭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 부근의 가난한 거지들을 잘 보살펴주어 존경을 받았고 아버지처럼 따랐다.

어느 날 떠돌이 중이 와서는 급히 강을 건너자고 했다.

사공은 급한 볼일이 있나 싶어 급히 강을 건너 주었다.

그런데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건너자고 했다.

사공은 아무런 말없이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자 또 다시 건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공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건네주었다.

이러기를 수 차례 반복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크게 감탄하고 사공의 얼굴을 살핀 다음 갑자기

 "보아하니 상중(喪中)인 것 같은데 묘 자리는 보아둔 게 있소?"라고 물었다.

사공은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3년이 다가오는데 아직 좋은 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로 매장해두었다고 하였다.

스님은 자기가 좋은 자리를 일러줄 테니 꼭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 산중턱으로 올라갔다.

한자리를 일러주고는 이곳은 명당자리로 묘를 이장하자마자 삼한통일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 나오고

또 훗날에 반드시 묘를 이장하자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니 아주 파지 못하도록 석회 1천포를 써

단단히 묻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글을 써주며 돌에 새겨 함께 묻으라고 했다.

사공은 거지들의 협력을 얻어 스님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였다.

스님의 말대로 무덤을 쓴 뒤 부귀영달이 뒤따라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공의 아들인

이도(李棹)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강을

건널 수가 없어 진군이 늦어졌는데 배를 만들고 직접 노를 젖어 왕건이 무사히 공주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공로로 그는 삼한태사(三韓太師)라는 높은 벼슬을 하였고 도(棹)라는 이름도 하사 받게 되었으며,

전의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렇게 몇 대가 지난 뒤였다.

당시 풍수지리로 유명한 박상래라는 지관이 이곳에 찾아와 묘 자리를 본 뒤

"이 자리는 산 뒤의 맥이 내려오다가 끊겨서 일시 발복할지는 모르나 몇 대가 지나면 일족이 망할

나쁜 자리이니 즉시 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박상래의 명성을 들었고 또 말도 그럴 듯하여 박상래가 잡아준 곳으로 이장을 하기로 하고

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회로 단단히 묻어서 좀처럼 파기가 힘들었다.

겨우 한 층을 걷어내자 그 속에 글씨를 새긴 글이 나왔다.

"남래요사 박상래 단지일절지사미지 만대영화지지

(南來妖師 朴相來 單知一節之死未知 萬代榮華之地)"
남쪽에 요상한 지관 박상래가 나타나 단지 일절룡이 죽은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니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박상래는 이 곳을 흉지라고 얘기하고 이장할 것을 권유할 것이나 믿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후손들은 선조의 용의 주도한 글귀에 감탄하여 이장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묻었다.

전의 이씨는 그 뒤로도 계속 번창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