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김사형, 신효창 묘소의 진실은?

오늘의 쉼터 2008. 5. 4. 01:15

 

김사형, 신효창 묘소의 진실은?

위치 :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구정승골





이곳에는 상하로 두 기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것은 세종임금 때 대사헌까지 오른 신효창의 묘이고,

뒤쪽은 조선 초 개국공신이며 좌정승을 지낸 김사형의 묘이다
신효창(1364~1440)은 김사형(1333~1407)의 사위로서 풍수학제조를 맡을 정도로 풍수에 조예가

깊었으며, 스스로가 장인과 자신의 묘소를 정하였다.

이곳은 풍수의 여러 학파에서 이구동성 大地라 하는데, 그분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1, 88향법을 사용하는 분들은 상하 두 묘가 乙坐辛向, 左水右到, 乾破의 正墓向으로 부귀 와 長壽를

겸전한 땅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뒤쪽의 청계산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어서 靑鷄抱卵形이라 부르는데,

상하의 묘가 알에 해당되는 정혈이라는 설명이다

2, 오대산···중은산···용문산(龍門山)···중미산(中美山)···주산인 청계산에서    좌  우로 분맥하여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듯 내려와 등을 걸어놓은 듯 산 중턱에 혈이 뭉쳤으니 掛燈 穴이다. 
 혈판은 좁으면서 약간 길게 솟아올라 뚜렷하게 결응 됨을 확연하게 보여주니누가 보아 도 명혈이다.

 혈은 등을 걸어 놓은 것과 같고 좌청룡·우백호는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쳐놓은 병풍과 같으니

만인에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형상이다.

그 불빛이 자손만대를 밝혀주니 명예가 가득하겠으며 후손대대로 귀인과 현자가 배출되리라.

3, 등잔불은 앞쪽에 장애물이 있게 되면 멀리까지 비출 수가 없다.
    때문에 뒤에 있는 김사형 묘소 보다는 장애물이 없는 앞쪽의 신효창 묘소가 더욱 낫다
.
4, 모 대학원의 풍수지리 석사 논문에서는 이곳을 거론하면서 김사형 묘소는 乳穴인데,

突 穴로 보고서 잘못 재혈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김사형 선생 묘소보다는 2~3m앞이 정혈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땅을 평가함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두 곳 모두 명당임에는 틀림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이 같은 평가에 의견을 달리한다.

첫째,
입구에서 바라본 묘역은 마치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운 듯한 형상이다
이곳 가파른 봉우리를 힘들게 올라서면 앞쪽으로 빼어난 산들이 여럿 솟아있어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과연 조선의 풍수학제조가 탐을 낼만한 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효창 묘소는 우뚝한 봉우리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정점에 묘를 썼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 지점이 최소한의 당판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즉 신효창 묘소는 뾰족한 봉우리에 축대를 쌓고 억지로 조성한 것이다
그 근거는 묘소의 좌측으로 길게 가지를 뻗어 주었는데,

그 가지가 파생되는 꼭짓점에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초학자들을 위해서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자
산이 봉우리를 짓게 되면 반드시 정점에서 좌우로 가지를 뻗게 된다.
그러나 혈은 그 정점을 입수로 의지하여 꼭짓점 아래에 당판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강회백 묘소, 김성우 장군 묘소, 이석형 묘소 등이 그러하다
한편 신효창 묘소에서는 석물이 많이 기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산이 급하게 경사진 곳에 부토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둘째,
묘역에서 바라본 주산의 형태는 어지럽게 찢어지고 갈라진 형태를 하고 있다
특히 주산의 뒤편으로는 한 봉우리가 窺峰이 되어 묘소를 날름날름 넘겨다보고 있다
매우 간특한 형상이 아닐 수 없다

古云 : 主山後之窺峰 子孫出於盜賊
(주산 너머로 규봉이 보이면 도적자손이 나온다)





셋째,
김사형 선생 묘소 뒤쪽에 짧은 과협이 있는데, 우측은 급하고 좌측은 완만하여 偏龍이고

 直龍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러한 형태에서는 과협의 중간에 작은 泡가 형성되었어야 한다.




넷째,
묘소에서 내려가면 짧은 內靑龍의 끝이 매우 큰 險石으로 묘소의 옆구리를 치는 형상이다
역시 불길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다섯째,
外靑龍이 크게 휘감아 안산을 형성한 모습은 좋다
그러나 백호의 본신은 제각 뒤로 빠지고 있다
비록 묘역에서는 이러한 飛走의 형태가 보이지 않으나, 本心이 有情한 것은 아니다





여섯째,
백호가 도망가니 명당까지 심하게 기울어 물을 수습치 못하고 있다

종합평가,
결국 이곳의 지형지세는 오뚝하게 곧추세운 모습이 오만하기 짝이 없으며,

그 독선적인 모습 때문에·백호와 물이 도망가는 형태이다
특히 주산너머의 窺峰과 추한 龍勢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간교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불안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다
정녕 이곳이 조선의 풍수학제조가 고른 땅이란 말인가?







위의 족보에서 보듯이 김사형의 후손은 화려한 벼슬이 많은 반면, 신효창의 후손은 絶孫이 많고

벼슬도 무척 寒微하다
불과 20미터 거리에서 매우 상반된 결과를 보이고 있는데, 靑鷄抱卵과 괘등혈의 명당이라면

신효창 가문의 몰락을 설명할 수 없고, 두 곳 모두 묘를 쓰기에 매우 불길하다는 본인의 판단이라면

김사형 후손의 번영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체, 김사형 묘소만 吉地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절반의 성공이라며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 것인가?
···
···
그런데 족보를 검색하던 중, 김사형의 후손 중에서 특별히 눈에 띠는 인물 2명을 볼 수 있었다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金 礩과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자점이다

<김 질> 1422~1478
김사형 묘가 1407년 조성되므로 증조부의 묘 바람을 고스란히 받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성승, 유응부의 雲劒계획이 실패하자

뒤늦게 동지들을 밀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70명이 처형되지만, 김질은 그 공으로 좌의정까지 오르며 20년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대가 金 礩의 이름 뒤에는 변절자요 밀고자라는 오명이 死後 500년이 지나도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된다.
20년의 榮辱 때문에 500년이 지나도록 손가락질을 받는 셈인데, 그것을 福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金自點> 1588~1651
김사형의 9代孫이며 金 礩의 6代孫이다
광해군 때 병조좌랑이었으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군 최고책임자인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책임을 맡고도

전투에서 도망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삼전도에서의 치욕적인 항복으로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극렬한 탄핵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인조의 비호 아래 곧 풀려난다.
그 후 청나라의 위세에 힘입어 영의정까지 오르며, 反淸 성향의 임경업 장군을 모함하여

처단하는데 앞장선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한 후 파직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조선이 北伐을 계획하고 있음을

청나라에 밀고하는데, 그로 인해 3족이 참수된다.
현대의 史家들은 이완용 등의 乙巳五賊에 버금가는 희대의 역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은 안동김씨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www.iandongkim.com)
“김자점의 변 이후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들은 그 연류를 두려워 하여 먼 지방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심지어 족보와 조상의 문적까지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구 안동 김씨 가문은 급속한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후 이곳 김사형 묘역은 200년 넘게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는데,

그나마 김사형의 묘소만 신효창의 후손들에 의해서 겨우 유지된다.
그 과정에서 公의 아들 김 승, 손자 종한, 종윤 등 많은 묘를 실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구안동김씨 일족을 滅門之禍에 이르게 한 근원에 김사형 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땅에서 오랜 세월 많은 벼슬과 富貴를 부귀를 누릴 수 있었는지

風水的으로 해명하라 하면, 나로서는 설명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풍수인의 눈에는 김사형 묘소의 요사스런 性情에서 동료를 배신하는 金 礩과,

조선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김자점의 모습이 연상됨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