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기장 옥녀가 비단 짜는 명당

오늘의 쉼터 2008. 1. 31. 17:42

 

 

* 기장 옥녀가 비단 짜는 명당…인물 발복


 

세계화 시대에 지방자치화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꼴이 아니냐는 지적이 될 수도 있다.

국가 단위의 경제전쟁에서 중앙집권적인 국력이 필요한데, 오히려 국력을 지방자치로

분산시킨다는 우려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과는 정반대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역사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앙집권제 조정은 줄행랑을 처버렸고 관군은 패전을 거듭했던 반면,

민초들은 의병으로 뭉쳐 왜군을 격파했다. 곽재우 의병들의 승리, 논개의희생, 진주대첩과

6만명의 장엄한 옥쇄(玉碎). 향토가 애향심을 일으키자 민초가 의병이 되었고,

 결국 국난까지 극복케 했던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감투와 녹봉에 좌우되던 중앙집권보다는 더 위력적인 향토애의 자생력을 보여주는

대비관계가 지방지치의 풀뿌리로 국력의 열매인 것이다.

이러한 향토애와더불어 풍수정서마저 물씬 풍기는 풍수의 현장이 있다.

 

바로 機張이다.

기장 풍수는 옥녀(玉女) 형국을 하고 있다.

게다가 옥녀가 비단을 짠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 이곳 산세들의 갖춤새이다.

더불어 機張 사람들은 기왕이면 다홍치마 발복을 하라고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의차림새를

잇대어 놓으니 풍수문패 지명이 바로 機張이다.

기장의 진산인 수령산(繡嶺山)은 비단폭을 뜻하는데 이를 휘감는 물마저 비단을 빤다는

완사수(絲水)라는 명칭. 따라서 옥녀풍수에 청산녹수란 번짓수다.

 

이러함에 어찌 풍수 발복이 없을소냐.

비단폭 같은 機張 미역은 옛적부터 조선 팔도에 일등 발복한 토산물이다.

하지만 옥녀직금은 재물보다는 인물 발복에 더 강하다.

직금(織錦)에서 길쌈 잘하던 機張 처녀들은 시집 가서 잘 살았다는 자랑거리도 있지만.

옥녀에서 당대정국을 움직였던 여걸(女傑)의 정치가 朴順天이 바로 機張군 대변 출신이니 무엇에 견주랴.

거친 파도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농축한 機張 미역 이듯 신토불이(身土不二) 마저 이곳에서는 달리 찾아볼

필요가 없다.

바로 機張 사람들의 기질에 배어 있기에. 타관에서 부임한 뿌리 없는 현감이 임진왜란 때 줄행랑을 쳐버리자

機張은 폐현되었으나 機張人의 기질은 18년만에 복현시켰다.

機張人의 기질이 눈에 걸린 日帝는 1914년 機張군을 폐군시키고 파출소를 2개나 세워놓았다.

이로부터 80년간 機張군이란 행정명칭은 사라지게 되나 향토애는 1994년 3월에 당당히 복군시킨 것이다.

1987년 복군 추진위원장을 짊어지고 機張향토문화연구소마저 머리에 인 孔泰道소장의 복군 증언 중에

옥녀풍수 발복과 무관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 흥미로웠다.

복군운동 20여년간 정부 요로에 35회에 이르는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機張의 진산과 안대(案袋)격인봉태산에 각각 산불감시소와 항해관측소의 철탑식 구조물이

정상을 깊숙이 누르고 있는 것이 꼭 日帝의 쇠말뚝풍수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복군만 된다면 비웃음을 받더라도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란 신념에서 예산까지 확보한 孔소장과 機張人들은

1993년 봄에 이것을 뽑아버렸다.

1994년 3월 믿기지도 않게 機張군은 복군되었다.

원래 정치적으로 바람을 맞는 이곳의 터는 朴泰俊 金東周씨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機張군의 정치적 회오리 바람을 막고 번창할 수 있는 군청 입지를 상상해보았다.

이를 본 연재 `풍수의 현장'을 통해 제시해보기로 하자.

물론 이에 대한반론은 환영한다.

개별적인 자문과 밀실의 토의는 지방자치의 악습이 되기에 공공매체를 통해 발표하고

반론을 기다리고 나서 합의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도 그러하다.

먼저 機張의 발복세는 옥녀풍수로서 일광산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 세(勢)가 좋아도 이를 받는 형(形)이 걸맞게 펼쳐져 있어야 한다.

진수성찬의 세(勢)라도 앉을 자리가 밥그릇(形) 건너편에 있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풍수의형세론(形勢論) 골격이기도 하다.

답사 결과 일광산의 밥그릇은 두어군데 놓여져 있었다.

그 중의 하나를 찍은사진이 바로 그 현장의 밥그릇이다.

예로부터 양기(陽基)풍수상 남향은 양택제1의 길상(吉相)으로 쳤다.

 선대부터 공덕을 쌓아야만 남향의 터를 구한다고 하던가.

이런 길상의 원리에서 볼 때 사진 북쪽에 우뚝 솟은 일광산은 북현무(北玄武)이다.

풍수 원전인 금랑경(錦囊經)에는 현무의 밥그릇 위치를 잡는 원리가 적혀 있다.

현무수두(玄武垂頭). 현무가 머리를 들이밀어야만 이는 방석을 깔아주는 자리로 밥그릇이 차려진 터다.

따라서 북현무인 일광산은 사진에서 보듯 마치 옥녀의 비단폭을 풀어놓듯 섬섬옥수 들이미니

이는 비단방석 격이다.

법당터가 명당인 사찰은 번영되었기에 불교풍수가 발전하였고, 군청의 입지는 군의 발복에 직결됨에

읍 취락풍수가, 국운은 왕궁이 명당이어야 하기에 도성풍수가 전래되었던 것이다.

하나 양기풍수 발복은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삼박자를 필요로한다.

機張은 복군되었으니 천시의 운이 돌아왔음이다.

지리 역시 일광산 옥녀풍수가 있으니 기왕이면 다홍치마 격이다.

 여기에 인화마저 단결된다면 금상첨화의 풍수발복 터가 바로 機張이라는 예시다.

인화마저 담을 수 있는 질그릇이 풍수 향토애가 아니겠느냐고 취재 도중 들었던 말은 아무튼 機張人이

애향심에서 들려준 신토불이 발언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일 게다.


<汕客 장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