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출산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혀 태웠다.
타고난 재는 강물에 띄워 보냈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는 태를 태우지 아니하고 항아리에 담아서 명당에 안치 시켰다.
그리고 그곳이나 인근마을을 태봉(胎峰), 태실(胎室) 혹은 태장(胎藏)부락이라 불렀다.
따라서 태봉이나 태실이란 지명이 표기된 곳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거의 완벽한 명당들이다.
풍수지리에 공부하는 분들은 이러한 곳을 찾아서 명당공부를 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지역별로는
경기도: 연천군 중면 태봉 부락, 포천군 영중면 태봉부락, 가평군 남산면 양태봉 부락,
가평군 상면 태봉 부락.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 (태봉과 같은 뜻임)
경상도: 울진군 북면 태봉부락, 구미시 옥성면 태봉리. 성주군 월항면 태실.
마산시 진동면 태봉리, 양산시 원동면 태봉리. 부산 북구 태봉산, 하동군 휴천면 태봉
충청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보은군 내속리면 태봉, 금산군 추부면 태봉부락
전라도: 완주군 구이면 태실부락, 영암군 시종면 태봉산, 무안군 천계면 태봉리 광주 태봉...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유명명당들 찾아 쓴데는 몇가지 이유가있다.
첫째: 풍수지리의 핵심이론인 동기감응론을 따른 것이다.(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둘째:기존 사대부나 일반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 였다.
셋째:왕릉이 도읍지 100리 안에 모셔진 데 반해 태실은 전국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다.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에게까지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때문에 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정조실록(1784년9월15일자)에 역대 임금들의 태실 위치를 파악하여 임금에게 보고한 기록이 나온다.
태조의 태는 진산 정종:금산 직지사 뒤. 태종:성산 조곡산 세종:곤양 소곡산 문종:풍기 명봉사 뒤. 단종:곤양 소곡산. 세조:성주 선석사. 예종:전주 성종:광주 경안역 뒤. 중종:가평 서면. 인종:대흥 원동면. 숙종:공주 남면. 경종:충주. 영조:청주. 등
역대 임금의 태실이 어느 한 곳에 있지 않고 전국에 분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실이 어느 지방에 조성되면 태실이 소속된 현(縣)은 군(郡)으로 승격되거나 감세나 감역(減役)의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 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일제가 전국의 수많은 태실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마구잡이로 모아놓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이씨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 주자는 의도 였다. 일제가 전국의 많은 태실을 강제철거한 까닭에 현재 태실과 태봉이란 지명을 갖고 있는데도 원래 안치된 태가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김두규 著(우리땅 우리풍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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