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리마을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있는 집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김건수는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수리한 바 있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삿다고 전한다.
ㄷ자형의 안채와 T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중문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안채는 남향한 중앙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一자형 중문간채가 있었으나 없어져 현재는 남쪽이 트인 상태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뒷쪽에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옛 경북지방의 ㅁ자 집 평면배치법과 통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전문설명
이 가옥은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 만회(晩悔) 김건수(金建銖)(1790∼1854)가 살던 집으로 그는 순조(純祖)30년(年)(1830)에 정시(庭試)로 등제(登第)한 후에 봉화현감(奉化 縣監), 김해부사(金海 府使) 등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까지 지냈다. 이 건물의 안채는 만회(晩悔)의 6대조가 이곳에 정착하여 선주(先住)하던 여씨(余氏)에게서 매입하였다 하는데 초창연대(初創年代)는 알 수 없다.
사랑채인 명월(明月) 누(樓)는 만회가 건립하였는데 철종(哲宗) 원년(1850)에 중수(重修)한 적이 있고, 안채 앞의 중문간채는 기울어져서 1981년 임시로 철거하였다.
이 집은 마을의 우측 깊숙한 곳에 숲이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건물을 앉혔다. 골목어귀 수목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의 정면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으며 우측에 돌출한 누각(樓閣)의 합각지붕 추녀 곡선은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ㅁ형으로 남향하여 배치되고 그 앞에 一자 중문간채가 놓여져 튼ㅁ자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간채가 철거되어서 현재는 내정(內庭)의 남쪽이 터진 상태이다. 안채의 중앙은 3칸 대청(大廳)이 차지하였는데 어간(御間)의 기둥 간격이 양협간(兩夾間)보다 넓게 배치되어 있다. 대청 좌우의 익사(翼舍)에는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좌측의 안방 위쪽 웃방은 바닥이 널마루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온돌방이었고 이 방에서 도장방을 출입하게 되어있다. 대청 우측에는 상방 위쪽에 장고방이 설치되어 있고, 마당쪽으로는 상방부엌을 건너 건넌방이 1칸 놓여져 있다. 안채의 구조는 잡석(雜石)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고 전면이 개방된 대청의 상부 가구(架構)는 삼량가(三樑家)로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올린 간략한 구조다. 대청 뒷벽 각칸의 중방 하부(下部)에는 판벽(板璧)을 꾸미고 중앙에 양개(兩開) 널문을 내었는데, 여는 것과 다르게 쌍미닫이 널문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전면주(前面柱)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정면 4칸중 좌측 3칸은 후면에 2칸통 사랑방과 사랑마루 1칸을 배설하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배치하며 기둥 밖으로 헌함을 설치하였다. 우측 1칸은 후면에 뒤쪽으로 길게 칸반 크기의 온돌방을 배설하고 그 뒤에 반칸 크기의 감실방을 두었다. 전면쪽은 누(樓)마루를 돌출시키고 외부쪽 3면벽을 판벽(板璧)으로 꾸며 두짝열개 울거미널문을 각각 설치하여 마루방처럼 꾸몄으며, 3면 판벽의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뽑아서 헌함을 돌렸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집의 고식(古式)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청 뒷벽의 양개(兩開) 널문이 미닫이로 되어있는 점도 흔치않는 예로 생각된다.
안채 전경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사랑채 정면 툇마루에서 본 누마루 사랑채 해저만회고택 명월루 정면 사랑채 측면 사랑채 안채 마당 안채 외부 안채 원경 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