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170호 봉화 쌍벽당 종택

오늘의 쉼터 2008. 5. 2. 13:39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70호
명     칭봉화 쌍벽당 종택 (奉化 雙碧堂 宗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2필지/2,323㎡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수1길 17 (거촌리)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김두순
관 리 자김두순

일반설명

쌍벽당 김언구의 아버지 김균이 풍산의 구담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으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별당에 걸려있는 ‘쌍벽당 중수기’에 의하면 명종 21년(1566)에 안채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고종 1년(1864)에 남쪽 날개 3칸을 고쳤으며, 1892년에도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지금 쌍벽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은 이때 건축된 것이다.

높지 않은 뒷산을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서 행랑채가 낮은 자리에 있고 위에 안채의 몸채가 월등히 높게 지어져 있다. 다른 지방의 ㅁ자형 날개집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에 속하는데 안채의 몸채가 유난히 과장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행랑채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에 달린 사랑방이 마주 보인다. 사랑방은 남쪽의 날개 3칸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쌍벽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곳이 남자들의 거처였다. 중문채와 사랑채가 맞닿는 부분에 중문이 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넓은 대청이 있다. 넓은 대청을 육간대청이라 하는데 안채 몸채의 특징에 해당된다. 안채의 동쪽 사랑채보다 뒷쪽에 별당인 쌍벽당이 있고 그 뒷쪽에는 사각형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을 세웠다.

조선 전기에 지은 집으로 추측되며 후에 2차에 걸쳐 수리를 하였으나, 평면과 구조의 중요부는 비교적 옛날의 제도를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전문설명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는 조선 연산군조인(燕山君朝人)으로 그의 부친 습독공(習讀公) 김균(金筠)이 풍산(豊山)의 구담(九潭)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았으며 생원공(生員公) 김언구는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뜰에 솔과 대나무를 심으며 거문고를 즐겼는데 호는 송죽(松竹)이라 하였다. 별당(別堂)에 걸려있는 쌍벽당 중수기(重修記)에 보면 정종(正宗)을 지낸 홍공(洪公)이라는 이가 쓴 편액(扁額)에는 건물의 창건년대(創建年代)가 가청병인(嘉請丙寅)(1566년)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1864년 토사공(土舍公)이 남익(南翼) 3칸을 수선(修繕)하였고, 1892년 그의 손자 용정(容正)이 안채를 크게 수리하면서 외당(外堂)을 별도로 세웠다고 하였으니 지금 쌍벽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은 이때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옥은 10여호의 민가가 집락을 이루고 있는 완만한 경사지의 뒤편에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넓게 터를 잡았다. 행랑채에 우뚝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의 안채와 우측 별당의 정면이 보이고, 별당의 후방에 방형(方形)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祠堂)을 배치하였다.

ㅁ자형의 안채(정침(正寢))는 앞채의 좌우로 양익(兩翼)이 1칸씩 돌출하였다. 중문간(中門間) 우측에 툇마루와 2칸통(間通)의 사랑윗방 그리고 우단(右端)에 전면이 개방된 마루 1칸을 배치하고 사랑웃방 뒤에 사랑아랫방 단칸(單間)을 설치하여 사랑부분을 구성하였으며, 중문간 좌측에는 고방 1칸과 2칸통 아랫방을 배치하여 ㅁ자집의 앞채를 이루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3칸의 대청이 안마당폭 가득히 안채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이 안채의 대청은 낮은 잡석기단위에 있지만 큼직한 자연석 초석위에 주택에서는 보기드문 굵고 높은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있어 지붕이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인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종보위에 키가 높은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세워 놓았다. 대청의 좌측에는 도장방과 안방이, 우측에는 고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서 경북지방의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으며 중수기(重修記)에 1892년의 수리시 창호를 모두 새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청 뒷벽의 양개(兩開)널문에 중간설주를 세운 형식이 그대로 유존(遺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구제(舊制)를 잘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별당은 정면 4칸의 전면에 헌함을 설치하였으며 좌측 1칸은 통칸(通間) 온돌로 꾸미고 나머지 3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다.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초석을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고 우물마루를 깐 대청 상부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종보위에 파련대공을 올려 놓고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행랑채는 솟을대문의 우측에 고방과 방이 각 1칸씩 설치되었고 좌측에는 고방 2칸과 방 및 부엌이 각각 1칸씩 배치되었다.

본 가옥은 조선 초기말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며 후대에 양차(兩次)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나 평면과 구조의 중요부는 비교적 구제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조선시대 주택연구의 자료가 될 유구로 생각된다.




안채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전경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사랑채 사랑방 내부

사당 내부

사당

쌍벽당

천장

대문채 원경

솟을대문

안채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