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90년전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일제 때 지은 창고가 있으며 문간채와 중문채가 있다. 사랑채나 헛간채가 없어 확실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원래 이 마을 부호의 집으로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안채는 경사를 이용하여 제일 높은 곳에 있으며, 맞은편에 창고가 있다. 안채와 창고 사이의 마당을 위·아래로 구분하였는데, 창고 앞의 마당이 훨씬 넓어서 가을철 수확기에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 쉽게 하였다. 안채와 창고 앞 마당 사이에는 계단을 중앙과 동쪽 끝에 만들었는데 서쪽으로는 경사로를 만들어 수레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큰방과 방 앞에 샛방, 부엌방이 있고, 뒷쪽에는 넓은 부엌이 있다. 오른쪽에는 작은방과 사랑큰방, 사랑샛방 작은방이 있다. 대청은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중심부에 좁게 한 칸만 만들었다. 앞쪽에는 가장 오른쪽 1칸을 제외하고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창고는 중심부에 각각의 문이 있는데 일본식이 가미되어 있고, 좌우 옆면과 뒷면의 벽을 널판으로 처리한 것으로 보아 일제 때 지은 집으로 보인다.
정원시설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없으나 집 뒤에 음식저장고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넓은 대지 위에 여러 채의 집들이 세워진 큰집이다.
전문설명
마을 뒷산 기슭에 서향하여 안채가 자리하며 2단 축대 아래에 직선축을 맞춰 마당과 창고채가 마련되었다. 다만 마당의 높이 차이로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분할 뿐 집안에 있어 다양한 공간구조를 연출하진 못한다. 건축연대는 1920년대 말 쯤으로 보여지며 부농(富農)의 주택이라 할 수 있다.
안채는 전면 7칸, 측면 3칸반의 겹집형태를 취해서 중앙칸들은 전후퇴를 두었다. 간살이는 복판 칸에 대청(大廳)을 배치하고 왼쪽에 큰방, 오른쪽에 작은방을 배열하여 앞뒤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오른쪽 머리칸은 셋으로 나누어서 안쪽에 사랑큰방, 뒤로는 사랑샛방과 작은방이 상하로 놓이고 그 머릿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큰방 왼쪽은 좌우 2칸 앞쪽에는 샛방과 부엌방을 배열하고 뒤의 4칸 넓은 공간은 부엌이다. 구들 앞퇴와 아랫퇴에는 툇마루가 깔려서 복판 툇마루와 연결되며 아랫퇴 가운데는 봉당이고 뒤는 살강이 설치되었다.
댓돌은 2단 계단식으로 놓였는데 장대석으로서 잔다듬한 가공석(加工石)이다. 주초(柱礎)는 낮은 둥근꼴로서 가공한 화강암이다. 기둥은 전면과 측면 보이는 곳은 굵은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기둥머리에는 장혀를 얹어서 굴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합각이고 홑처마인데 합각면은 붉은 벽돌과 회벽돌을 사용하였으며 규칙적으로 통기구를 뚫어서 무늬를 만들었으나 좌우 무늬가 조금 다르다. 집 뒤에는 3개의 굴뚝이 각각 서 있는 데 붉은 벽돌로 장식없이 단순하게 조성했다.
앞의 창고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한옥 골기와 맞배지붕집으로서 한옥 창고로는 그 규모가 꽤나 크다. 벽체는 전래(傳來)의 광채와 같이 판자를 사용했지만 비닐판벽으로 처리했고 문은 양판문으로 만들었다. 댓돌은 잔다듬 가공한 외벌대 장대석으로 돌렸으며 초석은 낮은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정원시설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없으나 집 뒤의 산비탈에 구축한 음식저장고가 있다. 굴을 파고 전면에 토담을 쌓은 다음 석재 인방을 얹고 골기와를 덮어 만들었다. 벽 가운데에 숫기와를 이용하여 통기공(通氣孔)을 만들었다.
대문채에서 안채로 올라가는 길 안채 안채 옆면 안채 부엌 곳간채 곳간채에서 바라본 대문채 돌담 문간채 솟을대문 안채 안채마루 안채측면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