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보물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릉임영관 → 강릉대도호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4.11.27 고시)
전문설명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릉부(江陵府)의 객사(客舍) 건물이 자리했던 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임영지(『臨瀛誌)』를 보면 임영관(臨瀛館)이 창건된 고려 태조(太祖) 19년(936)에는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남청(南廳) ·서헌(西軒) ·월랑(月廊) 등 83칸에 이르는 매우 많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강점(强占)했던 시대에는 이곳에 강릉공립보통학교(江陵公立普通學校)가 세워짐으로써 대부분 다 헐리고 객사문(客舍門)만 남게 되었다. 광복(光復) 후에 학교 건물을 헐고 강릉경찰서(江陵警察署)를 세웠으며 1993년 경찰서를 옮긴 후 이곳에 새로운 강릉시청(江陵市廳) 청사(廳舍)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청사건립에 따라 강릉대학교(江陵大學校) 박물관(博物館)과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의 발굴 조사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는 중요한 집자리 터임이 밝혀졌다. 이는 『임영지』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遺蹟)의 중요성으로 인해 사적(史蹟)으로 지정·보호하게 된 것이다.
현존하는 강릉부사(江陵府使)의 관사건물인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 된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쓴 임영관이란 옛 현판(懸板)만이 지금 객사문(客舍門)에 걸려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전경 강릉 임영관 삼문 강릉대도호부 관아 전대청 발굴 유구 강릉 임영관 유구 발굴지현황 강릉임영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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