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88호 강릉대도호부 관아

오늘의 쉼터 2008. 2. 22. 19:42



종     목

사적  제388호
명     칭강릉대도호부 관아 (江陵大都護府 官衙)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건물지
수량/면적 8,423㎡
지 정 일 1994.07.11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강릉시
관 리 자강릉시

일반설명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보물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릉임영관 → 강릉대도호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4.11.27 고시)


전문설명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릉부(江陵府)의 객사(客舍) 건물이 자리했던 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임영지(『臨瀛誌)』를 보면 임영관(臨瀛館)이 창건된 고려 태조(太祖) 19년(936)에는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남청(南廳) ·서헌(西軒) ·월랑(月廊) 등 83칸에 이르는 매우 많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강점(强占)했던 시대에는 이곳에 강릉공립보통학교(江陵公立普通學校)가 세워짐으로써 대부분 다 헐리고 객사문(客舍門)만 남게 되었다. 광복(光復) 후에 학교 건물을 헐고 강릉경찰서(江陵警察署)를 세웠으며 1993년 경찰서를 옮긴 후 이곳에 새로운 강릉시청(江陵市廳) 청사(廳舍)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청사건립에 따라 강릉대학교(江陵大學校) 박물관(博物館)과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의 발굴 조사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는 중요한 집자리 터임이 밝혀졌다. 이는 『임영지』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遺蹟)의 중요성으로 인해 사적(史蹟)으로 지정·보호하게 된 것이다.

현존하는 강릉부사(江陵府使)의 관사건물인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 된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쓴 임영관이란 옛 현판(懸板)만이 지금 객사문(客舍門)에 걸려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전경

강릉 임영관 삼문

강릉대도호부 관아 전대청

발굴 유구

강릉 임영관 유구

발굴지현황

강릉임영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