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란 도자기,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유성에서 동학사쪽으로 들어가면 신도안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일대 계룡산 기슭에 여러 곳의 가마터가 분포한다. 그 중 이 학봉리 도요지가 중심이 되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축조하였고, 구조는 땅을 약간 파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천장과 벽을 진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라고 한다. 철화분청자·귀얄청자·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그 가운데 철화분청자가 대표적이다.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접시·술병·주전자 등 다양하며, 새겨진 무늬는 국화무늬·연꽃무늬·물고기무늬·새무늬 등 다양하다.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그 의미가 크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가마터이다.
전문설명
이 일대는 윗사기소라 하여 가마가 집중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2차 (1992-1993)에 걸친 발굴 조사에 의해 가마 구조는 좌우에 불창기둥이 하나씩 있는 오름가마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곳 가마들에서는 철화분청사기< 鐵畵粉靑沙器 >가 생산되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귀얄분청과 백자도 대규모로 만들었으며 가마들의 운영시기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학봉리< 鶴峰里)의 사기소마을 앞구릉과 뒷구릉, 우금고개 옆구릉 일대로 10여개소의 요지군< 窯址群 >이 널려 있으나, 최근 새건물의 증축, 도로의 개설, 보존사업의 미흡으로 현상이 나쁜편이다. 이곳 요지들 중 일부가 1927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해서 철화분청자< 鐵畵粉靑瓷 >를 중심< 中心 >으로, 인화< 印花 >, 상감< 象嵌 >, 귀얄, 분청자편< 粉靑瓷片 >들과 백자편< 白瓷片 >들이 잘 남아 있는 가마와 함께 발굴< 發掘 >되어 『계룡산록도요지발굴보고< 鷄龍山麓陶窯址發掘報告 >』가 된 철화분청자< 鐵畵粉靑瓷 >의 대표적< 代表的 >인 가마터이다. 발굴보고< 發掘報告 >에 의하면, 다양< 多樣 >한 철화분청< 鐵畵粉靑 >의 호< 壺 >, 접시, 병< 甁 >, 장군, 발편< 鉢片 >들과 귀얄분청< 粉靑 >의 접시, 완< 완 >, 발< 鉢 >, 호편< 壺片 >들이 중심< 中心 >을 이루고 있으며, 약간의 인화< 印花 >, 상감분청자< 象嵌粉靑瓷 >와 흑유< 黑釉 >, 백자편< 白瓷片 >들이 발견< 發見 >되었는데, 태토< 胎土 >에는 잡물< 雜物 >이 섞인 황갈색< 黃褐色 >, 회흑색< 灰黑色 >이며, 유색< 釉色 >은 암록색< 暗綠色 >, 암갈색< 暗褐色 >으로, 대부분 귀얄 수법< 手法 >으로 빠른 운동감있게 백토< 白土 >분장한 분청자< 粉靑瓷 >들에 그 특징이 있다. 발견< 發見 >된 4개의 가마터는 산록< 山麓 >의 경사면에 나란히 축조하였는데, 모두 지면< 地面 >을 약간 파고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구덩이의 좌우 윗턱으로부터 점토< 粘土 >로 벽과 천장을 둥글게 쌓아 올렸으며 칸막이 가마로 바닥은 사상< 沙床 >이었다. 제1요지< 窯址 >의 가마의 길이는 19.6m, 폭이 1.2∼1.4m, 가마아궁이는 1.84m, 폭은 1.2m였다. 제작시기는 이곳에서 출토< 出土 >된 성화23년< 成化23年 >(1487), 홍치3년< 弘治3年 >(1490), 가정15년< 嘉靖15年 >(1536)의 철화분청자묘지편< 鐵畵粉靑瓷墓誌片 >들과 귀얄, 인화분청자< 印花粉靑瓷 >, 백자< 白瓷 >, 흑유편< 黑釉片 >들로 보아 15세기후반< 15世紀後半 >에서 16세기< 16世紀 >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철화분청자< 鐵畵粉靑瓷 >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자유분방하고 대범한 시문수법< 施紋手法 >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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